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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만 있으면 나도 4번 타자 '주먹야구'

1986년, 담장을 넘긴 전설의 주먹

by 유블리안


사라진 놀이: '짬뽕(손야구)'

준비물: 말랑말랑한 고무공(또는 털이 다 빠진 헌 테니스 공), 1루/2루/3루/홈을 표시할 돌멩이나 벽돌.
경기장: 학교 운동장 구석이나 전봇대가 있는 골목길.
공격 방식 : 투수가 없는 경우가 많음. 타자가 스스로 공을 허공에 띄운 뒤, 떨어지는 타이밍에 맞춰 주먹이나 손바닥으로 쳐냄.
수비 및 아웃 : 뜬 공을 바로 잡으면 아웃. 땅볼을 잡아 1루에 던져 타자보다 먼저 도착하면 아웃. 주자가 달릴 때 수비수가 공을 던져서 주자의 몸을 맞히면 아웃. (일명 '맞추기')

​"야, 유희수! 이거 봐라. 다음 편 예고 떴다."


요즘 한참 뜨고 있는 브런치북에 나의 이야기가 연재되고 있던 것이다.



​동창회 2차 장소인 호프집, 친구 박철우가 내민 스마트폰 화면에는 낯익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주먹만 있으면 나도 4번 타자 '주먹야구'' 희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문구 하나가 순식간에 희수를 40여 년 전, 1986년 땀 냄새 진동하던 한강의 동쪽 좁은 골목길로 소환했다.


​그때 우리는 야구 배트 따위는 필요 없었다. 글러브? 그런 건 부잣집 도련님들이나 끼는 거였다.


우리에겐 헌 테니스 공 하나와 튼튼한 오른손 주먹, 그리고 찢어져도 엄마에게 덜 혼날 각오가 된 무릎만 있으면 충분했다. 우리는 그것을 '짬뽕'이라 불렀다.


​1986년, 국민학교 5학년 유희수는 골목길의 지배자였다.


TV 뉴스에서 "라면 먹고 뛰었다"는 육상 스타 임춘애 선수가 금메달을 휩쓸며 온 나라가 아시안 게임 열기로 들썩이던 그해 가을.


희수는 학교가 파하기가 무섭게 가방을 마루에 던져두고 골목으로 뛰쳐나갔다.


​"오늘 4대 4 짝 맞지? 유희수, 네가 4번 타자해라."


​골목대장 철우의 말에 희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목을 풀었다. 또래보다 덩치는 작았지만, '깡' 하나만큼은 전교에서 으뜸이었다.


누구든 희수의 눈빛을 보면 먼저 꼬리를 내리곤 했다.


​짬뽕의 룰은 단순하면서도 야만적이었다. 투수도 없다. 타석에 선 내가 스스로 공을 공중에 띄운다.


중력에 이끌려 공이 떨어지는 그 찰나, 온몸의 회전력을 실어 주먹을 내지른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공이 뻗어나가면, 그때부터는 전쟁이다.


수비수들은 그 공을 잡아 주자를 향해 힘껏 던진다. 베이스를 밟는 게 아니라, 사람을 맞혀야 아웃이 되는 잔인한 규칙. 그 스릴이 사내아이들을 미치게 했다.


​그날은 유난히 하늘이 높고 파란 가을이었다. 철우네 팀과 희수네 팀은 50원짜리 아이스께끼 내기를 걸고 맞붙었다.


스코어는 5대 5 동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골목길에 긴 그림자를 드리울 무렵, 9회 말 투 아웃 주자 만루의 기회가 희수에게 찾아왔다.


​"희수야! 끝내기 한 방이다!"


"넘겨버려!"


​같은 편 아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희수는 심호흡을 했다. 손에 쥔 테니스 공은 털이 다 빠져 반들반들했다.


희수는 타석(맨홀 뚜껑) 위에 섰다. 전봇대가 1루, 남의 집 대문이 2루, 연탄재 쌓아둔 곳이 3루였다.


​희수는 공을 높이 띄웠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공이 정점에 멈췄다가 떨어지는 순간, 희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오른팔을 휘둘렀다.


​퍼-억!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짜릿한 손맛이었다. 공은 수비수들의 키를 훌쩍 넘어 빨랫줄처럼 뻗어나갔다.


수비수들이 뒷걸음질 쳤지만 소용없었다. 공은 골목길의 파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더니, 기어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챙그랑-!'


​경쾌한 타격음 뒤에 이어진 것은, 날카로운 유리창 깨지는 소리였다.


환호하던 녀석들의 입이 일제히 '합' 다물어졌다. 공이 넘어간 곳은 다름 아닌 골목길 끝집, 일명 '호랑이 할아버지'네 집이었다.


공을 뺏기는 건 예사고, 시끄럽게 굴면 소금을 뿌린다는 그 무시무시한 집.


​"튀어!"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의리 없는 녀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1루, 2루, 3루 주자도 모두 증발했다.


하지만 희수는 도망치지 않았다. 비겁하게 등을 보이는 건 사나이 유희수의 사전에 없는 일이었다.


그는 두 주먹을 꽉 쥐고 깨진 창문 쪽을 노려보았다.


​끼익.


녹슨 철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런닝 차림의 할아버지가 몽둥이 같은 빗자루를 들고 나오셨다.


​"누구냐! 어떤 놈이 남의 집 창문을 깼어!"


​할아버지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무서웠지만, 희수는 턱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제가 홈런 치다가 그랬습니다!"


​예상치 못한 당당함에 할아버지가 멈칫했다.


"뭐... 뭐라? 네 놈이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디서 행패야!"


​"행패가 아니라 운동한 겁니다! 유리창 값은... 제가 용돈 모아서 꼭 갚겠습니다!"


​희수는 기죽지 않고 할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 눈빛에는


'잘못은 했지만 비굴해지지는 않겠다'


국민학생 소년의 자존심이 서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기가 차다는 듯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리셨다. 빗자루를 든 손이 스르르 내려갔다.


​"허허, 그놈 참... 맹랑한 놈일세. 보통 놈들은 다 도망가는데, 네놈은 간이 배 밖으로 나왔냐?"


"남자가 한 짓엔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희수의 대답에 할아버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책임이라... 그래, 사내놈이 배짱은 있어야지. 됐다. 안 쓰는 창고 창문이니 변상은 필요 없다."


​할아버지는 대문 안으로 들어가시더니, 깨진 유리 조각 사이에서 테니스 공을 찾아오셨다. 그리고는 바지 주머니에서 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꺼내 희수의 손에 쥐여 주셨다.


​"공 가져가라. 그리고 이건 네놈 배짱 값이자 홈런 상금이다. 저기 가서 친구 놈들하고 과자나 사 먹어라. 대신 다음엔 운동장 가서 놀아라. 알았냐?"


"감사합니다! 진짜 홈런왕이 되겠습니다!"


​희수는 90도로 씩씩하게 인사를 하고 공과 동전을 받아 들었다. 골목 모퉁이 뒤에 숨어서 벌벌 떨던 친구들이 그제야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와... 유희수 미쳤다. 호랑이 할아버지한테 말대꾸를 하냐?"


"야, 할아버지가 웃는 거 처음 봤어. 너 진짜 배짱이다."


​그날 우리는 흙먼지 날리는 골목길을 개선장군처럼 행진했다. 나의 오른손은 승리의 전리품인 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꽉 쥐고 있었다.


비록 유리창을 깨부순 사고뭉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골목의 전설이자 진짜 사나이였다.




​"희수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친구의 목소리에 희수는 현실로 돌아왔다. 스마트폰 화면 속 '4번 타자'라는 문구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아냐, 그냥. 그때 내 주먹도 셌지만, 깡다구 하나는 진짜 끝내줬다는 생각이 나서."


​희수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굳은살 하나 없이 매끈해진 손. 이제는 테니스 공 대신 자동차 핸들과 결재 서류를 쥐는 것이 더 익숙한 가장의 손이다. 더 이상 짬뽕놀이는 찾아볼 수 없고 추억에서나 존재하는 놀이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희수는 알고 있었다. 40여 년 전 그 골목길, 호랑이 할아버지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고개를 빳빳이 들던 그 맹랑한 12살 소년이 여전히 이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희수는 맥주잔을 높이 들었다. 마치 그날의 당당했던 외침처럼, 시원하게 건배를 제안했다.


​"자, 쫄지 않는 인생을 위하여! 짬뽕의 전설을 위하여!"




​[다음 편 예고]


"야! 눈 감지 마! 한 방 남았단 말이야!"


24방, 36방... 셔터 한 번 누르기가 쌀 한 톨보다 귀했던 시절.
실패가 두려워 숨죽이며 셔터를 누르던 그 쫄깃한 긴장감을 기억하시나요?


장롱 속 보물단지, 필름 카메라 느림의 미학과 한 장 한 장의 신중함을 아는 그 시절로 떠나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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