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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파란 책은 모든 걸 알고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전화번호부와 사라진 비상금

by 유블리안



그때 그 시절 상식: 전화번호부 (인명편/상호 편)


특징: 한국통신(현 KT)에서 매년 발행하여 각 가정에 무료로 배포했습니다. 두께가 5cm가 넘을 정도로 두꺼웠고, 내지는 얇은 갱지로 만들어졌습니다.

종류: 노란색 표지는 '상호 편(가게/업종)', 파란색(하늘색) 표지는 '인명편(사람 이름)'이었습니다.

용도: 전화번호 검색은 기본, 냄비 받침, 키 높이 방석, 화투 판, 불쏘시개 등 만능 아이템이었습니다.


"엄마! 찌개 넘쳐요! 받침대, 받침대!"

진우의 공중전화 무용담이 끝나고 출출해질 무렵, 거실에 얼큰한 김치찌개 냄비가 등장했다. 식탁보가 그을릴라 다들 허둥지둥하는데, 영숙이 TV 장식장 밑에서 익숙한 물건을 쓱 꺼내왔다. 표지가 너덜너덜해진 두꺼운 책, <서울시 전화번호부 인명편>이었다. 파란색 표지는 세월 때가 타서 거무튀튀했지만, 그 두께만큼은 여전했다.


"아니, 영숙아!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어? “


진구가 기가 막히다는 듯 물었다.


"이것만 한 게 없지. 두툼하니 열기도 안 새고, 높이도 딱이고."


영숙이 뜨거운 냄비를 파란 전화번호부 위에 턱 올려놓자, 거실에 묘한 잉크 냄새와 김치 냄새가 섞여 퍼졌다.

그걸 보던 진우가 혀를 찼다.


"어허, 귀한 책을 냄비 받침으로 쓰다니. 왕년에 내가 저거 때문에 힘 좀 썼는데."


"또, 또 시작이네. 네가 무슨 힘을 쓴다고? 허헛"


진구가 깐죽거렸다.


"형님 '전화번호부 찢기' 몰라? 80년대엔 그게 남자의 자존심이었다고!"


진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때 체력장이나 차력 쇼 보면 꼭 나왔잖아. 이 두꺼운 걸 맨손으로 반으로 쫙! 찢는 거. 내가 젊었을 땐 앉은자리에서 두 권도 찢었어. 동네 여학생들이 그거 보고 다 쓰러졌지."


"에이, 거짓말. 종이가 몇 천 장인데 그걸 어떻게 찢어.”


영숙이 못 믿겠다는 말투로 한마디 거든다.


"기술이 있어, 기술이! 종이 결을 딱 잡고, 기합을 넣어서 으라차차! 하면...!"


진우는 시범을 보이겠다며 냄비 밑에서 전화번호부를 빼내려다, 허리를 삐끗하며 "아이고!" 하고 주저앉았다.

”그러다 허리 찢어지겠다. 그냥 밥이나 먹자."




진구가 숟가락을 들며 옛 생각에 잠겼다.


"근데 진짜 저 파란 책 없었으면 나 장가 못 갔을지도 몰라."


"왜? 형부도 전화 못할 뻔했어요?"


"아니, 제수씨 돈이 없어서 못 건 게 아니고, 첫사랑 순희 씨 전화번호를 몰라서 못 걸 뻔했지. 그때 내가 순희 씨 이름이랑 사는 동네(혜화동)만 알았잖아. 장인어른 함자가 '박영수' 씨라는 거 하나랑. “


그 시절엔 개인정보 보호법 같은 게 없어서, 파란색 인명편 전화번호부에 세대주 이름, 전화번호가 적나라하게 나와 있었다.


"내가 혜화동 가서 그 두꺼운 인명편을 펼쳐놓고 '박영수'를 찾는데... 와, 서울에 박 씨가 왜 그리 많은지. 눈알이 빠지는 줄 알았다니까. “


진구는 돋보기를 들이대듯 눈을 가늘게 뜨는 시늉을 했다.


"박영수... 박영수... 손가락에 침 묻혀가며 30분을 뒤졌어. 그러다 딱! '혜화동 박영수'를 찾았을 때 그 희열! 심마니가 산삼 캔 기분이 그랬을 거야. 그 번호로 전화해서 '거기 박순희네 집 맞습니까?' 했을 때 목소리가 들리는데... “


"스토커가 따로 없네, 스토커가. “


영숙이 핀잔을 줬지만, 진구의 표정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흐뭇해 보였다.


"요즘 애들은 모르지. 그 수많은 이름 속에서 내 사랑을 찾아내는 그 아날로그의 맛을. “



한참 옛날이야기에 빠져 있는데, 찌개를 다 먹고 영숙이 냄비를 치우려다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랐다.


"잠깐! 진우야, 그 책 좀 줘 봐라."


"왜? 냄비 받침 치우게?"


"아니, 가만있어봐. 내가 예전에 거기다 뭘 끼워놨던 것 같은데..."


영숙은 떨리는 손으로 누렇게 뜬 전화번호부를 넘기기 시작했다. '가', '나', '다' 순으로 넘어가던 페이지가 '바' 쯤에서 멈췄다.


후드득.


책갈피 사이에서 바짝 마른 단풍잎 코팅 몇 개와, 빳빳한 만 원짜리 지폐 세 장이 떨어졌다.


"어머! 내 돈!"


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구권 만 원짜리,


"아니, 누님! 이걸 여태 여기 숨겨두고 까먹은 거야?"


"어머, 세상에. 아르바이트비 받고 비상금으로 숨겨둔 건데... 이사 다니면서도 용케 안 잃어버렸네! “


영숙은 단풍잎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돈부터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이 책 버렸으면 큰일 날 뻔했다. 얘, 오늘 저녁은 이 돈으로 통닭이나 시켜 먹자!"


"엄마, 이 돈 아직 쓸 수 있는 거야? 당근마켓에 팔지. 구권이니까. ^^"


진우가 투덜거렸다.


"아니, 내가 아까 찢어서 차력 쇼 했으면 저 돈 공중분해 될 뻔했네."





"요즘은 궁금한 거 있으면 다 스마트폰 검색창에 치잖아. 1초면 나오지. “


진구가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근데 가끔은 그게 그립더라. 침 묻혀가며 종이 넘기는 소리, 깨알 같은 글씨 속에서 아는 이름 찾았을 때의 반가움 같은 거."


그 말을 듣고 있던 내가 끼어들었다.


"나 때는 초등학교 졸업앨범 뒤에도 주소록 하고 집 전화번호 싹 다 적어놨었잖아요. 삼촌들은 학교 친구들과 교제는 안 했나 봐요? 전화번호부를 뒤질 정도면. 하하하."


우리는 냄비 자국이 동그랗게 남은 낡은 파란 전화번호부를 다시 TV 장식장 밑으로 밀어 넣으며 한바탕 웃었다.


그 안에는 우리가 잊고 지낸 수만 명의 이름과, 영숙의 잃어버린 시간, 그리고 혹시 모를 또 다른 만 원짜리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편 예고]


"내 주먹이 곧 방망이다! 전설의 4번 타자“


야구 방망이도, 글러브도 필요 없다.


오직 말랑말랑한 고무공 하나와 튼튼한 주먹만 있으면, 우리는 누구나 홈런왕이 될 수 있었다. 학교 운동장 구석이나 골목길 바닥에 돌멩이로 1루, 2루를 표시하고, 스스로 공을 띄워 주먹으로 냅다 쳤던 그 놀이,


'짬뽕(손야구)'.


잘못 맞으면 제자리에 차렷 하고, 너무 잘 맞으면 남의 집 담장을 넘어 민망해했던 그 시절 골목길 야구의 추억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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