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와 지수가 기억하는 10원짜리 탑의 전설
그때 그 시절 상식: 빨간색 다이얼 공중전화
시기: 1970년대 ~ 1980년대 중반 주류 (80년대 후반까지 동네 점빵에서 현역 유지)
특징: 오직 10원짜리 동전만 사용 가능. (100원, 50원 투입 불가)
요금: 시내 통화 1통(3분)에 20원.
국룰: 동전 투입구 위에 10원짜리를 미리 탑처럼 쌓아두고, 끊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밀어 넣는 '순발력'이 필수였습니다.
"아, 형님! 그 통금 때 담 넘은 얘기는 10년째 레퍼토리가 똑같아. 지겹지도 않아요?"
설날 오후. 기름진 전 냄새가 가득한 거실에서 막내 진우가 투덜거렸다. 방금 전까지 큰 형님 진구가 "내가 79년에 서말구보다 빨랐다니까!"라며 통금 시절 무용담을 침 튀기며 늘어놓던 참이었다.
옆에서 배를 깎던 누나(영숙)가 피식 웃으며 거들었다.
"얘, 진우야. 형 나무라지 마라. 너는 뭐 할 말 없니? 지수 씨 꼬실 때 공중전화통 붙잡고 울고불고했다며? 호호."
그 말에 얌전히 밤을 까던 지수의 귀가 빨개졌다. 진우가 억울하다는 듯 먹던 전을 내려놓고 발끈했다.
"아니, 누님! 그게 내가 울고 싶어서 운 게 아니라니까? 그놈의 빨간 전화기가 웬수였다고, 웬수!"
"그때가 아마 84년 겨울이었을 거야.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우리 지수 씨한테 반해서 아주 정신을 못 차릴 때였거든."
진우는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썰을 풀기 시작했다.
"그날 내가 큰맘 먹고 고백하려고 학교 앞 대성상회 공중전화로 달려갔지. 근데 가난한 대학생 주머니에 뭐가 있냐? 버스비 빼고 나니까 딱 100원짜리 동전 하나 남았더라고. 근데 그 시절 동네 전화기가 어디 100원을 먹나? 오로지 10원짜리만 잡수시는 빨간색 돼지였잖아."
그는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당시의 다급함을 재연했다.
"내가 대성상회 할머니한테 가서 100원만 바꿔달라고 사정을 했어. 근데 이 할머니가 드라마 보느라 쳐다도 안 보는 거야. '껌이라도 하나 사야 바꿔주지, 맨입으론 안 된다' 이러면서 파리채를 휘두르는데... 환장하겠더라고."
"그래서 껌 샀냐?"
진구가 짓궂게 물었다.
"껌 살 돈이 어딨어! 껌 사면 10원짜리가 줄어들잖아! 난 집에 걸어가는 한이 있어도, 100원어치 꽉 채워서 통화해야 했다고!"
진우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가게 밖을 힐끔 보니까, 그 잠깐 사이에 전화기 줄이 점점 길게 늘어서는 거야. 동전 바꾸기 전까지 한두 명이었는데, 어느새 교복 입은 학생에 아저씨들까지 쭉 더 붙었어! 저 사람들 다 기다리려면 30분은 족히 걸릴 텐데, 그럼 날 새잖아! 마음은 급해 죽겠는 거야."
진우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는 안 바꿔주지... 결국 간식 사러 온 어떤 누나가, 안절부절못하는 내 표정이 안쓰러웠는지 자기 거 계산하면서 바꿔주더라. 그 누나 아니었으면 나 그날 통화 못 했다."
진우가 비장한 표정으로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손이 덜덜 떨리는데, 전화기 위에다가 10원짜리 10개를 탑처럼 쌓았어. 중간에 끊기면 안 되니까! 20원을 투입구에 넣고 돌렸지. 드르륵, 탁. 드르륵, 탁."
"여보세요?"
"지수 목소리 듣자마자 내가 머리가 하얘져서 헛소리만 해댔잖아. 날씨가 춥네, 기말고사는 잘 봤네... 근데 이놈의 전화기가 눈치가 없어요. 벌써 '딸깍, 딸깍' 소리가 나는 거야."
진우는 다급하게 손가락으로 동전을 밀어 넣는 시늉을 했다.
"내가 동전 탑에서 하나씩 밀어 넣는데, 피가 마르더라. 뒤에선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언제 끝나나' 하고 레이저를 쏘지, 동전은 자꾸 줄어들지... 마지막 10원짜리 들어갈 때 내가 결심했지. 더 이상 돈도 없겠다, 에라 모르겠다!"
"지수야, 나 할 말 있는데..."
"응? 뭔데?"
"내가 숨을 딱 들이마시고 '나 사실 너 좋...' 하는데!"
그가 손뼉을 짝 쳤다.
"툭. 소리가 나더니 뚜- 뚜- 거리면서 끊겨버리는 거야! 야속한 10원짜리가 내 고백을 삼켜버린 거지. 내가 수화기 붙잡고 얼마나 허망했는지 아냐?"
가족들이 "아이고~" 하며 탄식했다. 영숙이 혀를 찼다.
"그러게 평소에 용돈 좀 아껴 쓰지. 쯧쯧."
그때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지수가 반격을 시작했다.
"난 그날 전화가 뚝 끊기길래, 네가 술 마시고 전화했다가 속 안 좋아서 끊은 줄 알았지."
"뭐? 술?"
"그렇잖아. 대학생이 밤에 전화해서 횡설수설하다가 갑자기 '나 사실...' 하고 뚝 끊어지니까. 다시 걸려오지도 않고. 그래서 일기장에다 썼어. '진우는 술버릇이 안 좋다. 토하러 갈 거면 말을 하고 끊지.'"
거실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진구는 바닥을 구르며 웃었다.
"으하하하! 야, 인마! 첫사랑이 주정뱅이가 됐었네! 서말구보다 빠르다는 내가 낫네!"
진우의 얼굴이 빨간 공중전화기처럼 달아올랐다.
"아니, 돈이 없어서 못 건 거지! 내가 그때 맨 정신에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는데!"
"그래도 뭐, 그 덕분에 니들이 결혼까지 한 거 아니니?"
영숙이 깎은 사과를 내밀며 말했다.
"그날 전화가 끊겨서, 진우가 다음 날 강의실 앞에서 쪽지 줬잖아요. '어제 전화 끊겨서 미안해. 사실은 너 좋아해.'라고 쓴 꼬깃꼬깃한 쪽지."
지수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그 쪽지가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갔을지도 모르지. 술 취한 줄 알고."
진우는 툴툴거리면서도 지수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그때 그 빨간 전화기만 아니었으면 더 멋있게 고백했을 텐데..."
비록 10원짜리는 부족했지만, 낭만만은 넉넉했던 그 시절.
가족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빨간 전화기의 '땡그랑'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금은 빨간 전화를 영화에서나 볼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통화할 수 있는 휴대폰과 문자가 있고 SNS를 통해 서로 안부를 물어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가끔은 그 불편함이 그립기도 하다. 동전 하나에 마음을 졸이고, 끊어진 수화기 너머의 진심을 궁금해하던 그 간절함. 엄마, 삼촌들, 그리고 외숙모의 추억담을 들으며 그 당시 낭만에 대해 잠시 구경해 볼 수 있었다.
"파란색 전화번호부의 추억"
이번엔 진구가 나섰다.
첫사랑의 기억으로 소환된 두꺼운 파란색 전화번호부. 개인정보 보호가 전혀 되지 않던 그 시절, 이름과 동네만 알면 누구나 쉽게 전화번호를 알 수 있었다는데...
과연 그는 그 수많은 이름 속에서 그녀를 찾아냈을까?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