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화. 동상이몽: 그날, 가슴의 손수건은 왜 딱딱했을까

​세 사람이 기억하는 3월의 모래바람과 콧물의 진실

by 유블리안

그때 그 시절 상식: 국기 하강식

​시기: 1970년대 ~ 1989년 1월 폐지
​내용: 매일 오후 6시(동절기 5시)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길을 가던 모든 국민은 동작을 멈추고 국기를 향해 경례를 해야 했습니다.

1. 엄마(영숙)의 기억: "아니, 이게 웬 누룽지야?"


​"아들, 너 이 사진 기억나니?"


​영숙은 앨범을 정리하다가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희수의 국민학교 1학년 입학식 사진이었다. 더벅머리에 코를 훌쩍이던 녀석. 그 왼쪽 가슴에는 하얀 가제 손수건이 큼지막하게 달려 있었다.


​그때는 다들 그랬다. 아이들은 왜 그리 사시사철 콧물을 달고 살았는지, 휴지는 또 얼마나 귀했는지. 엄마들이 옷핀으로 가슴에 손수건 하나씩 달아주는 게 입학식의 '국룰'이자 필수 준비물이었다.


​영숙은 이 사진만 보면 아직도 헛웃음이 나온다. 희수가 입학하고 얼마 안 됐을 때, 그날따라 녀석이 흙투성이가 돼서 집에 돌아온 날이었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들의 몰골이 아주 가관이었다.
오후반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이랑 얼마나 뒹굴었는지, 무릎은 하얗게 뜨고 얼굴은 꼬질꼬질한 게 영락없는 거지꼴이었다.


​"아이고, 이녀석아. 또 어디서 구르다 왔어."


​영숙은 혀를 차며 씻기려고 흙투성이 잠바 지퍼를 내리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슴에 달아준 그 하얀 손수건이 무슨 풀 먹인 광목천처럼, 아니 말라비틀어진 누룽지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빳빳하게 서 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옷핀을 떼어내는데 손수건에서 '투둑' 하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너 여기에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니? 이게 왜 이래?"


​영숙이 기가 차서 물었더니, 희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상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엉뚱한 대답에 영숙은 녀석의 등짝을 때리는 대신 박장대소할 수밖에 없었다.



2. 아들(희수)의 기억: "죽느냐 닦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날 희수는 오후반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한창 신나게 도망 다니는데, 갑자기 운동장 스피커에서 '치직—' 하더니 웅장한 전주가 울려 퍼졌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애국가였다. 국기 하강식 시간이었다.


​"엄마, 애국가 나오면 얼음! 해야 되잖아. 그래서 내가 미끄럼틀 잡고 딱 멈췄거든?"


​희수는 그때를 회상하며 침을 튀겼다. 그런데 하필이면 국기 하강과 함께, 콧속에서 묵직한 녀석이 같이 하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기는 내려오고, 콧물도 내려오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저 멀리서 그 무서운 체육 선생님이 기다란 회초리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콧물은 인중을 넘어 입술로 들어가려고 하고, 손을 움직여 닦자니 선생님한테 걸려서 되게 혼날 것 같고. 어린 희수에게는 죽을 맛이었다.


​"내가 그냥 닦으면 선생님한테 혼나잖아. 그래서 머리를 썼지!"


​희수는 선생님이 자기 앞을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을 노렸다.


​“에취!!!”


​희수는 재채기하는 척 고개를 숙이면서, 가슴에 달린 손수건에다가 코를 냅다 '박치기' 했다. 아주 강력하고 빠르게.


​"그래서 선생님한테 안 걸렸어? 혼 안 났어?"
"안 걸렸어! 선생님이 나보고 애국심이 대단하대. 히히."


​그날 희수의 가슴팍에는 콧물로 코팅된, 세상에서 가장 딱딱한 훈장이 남았다.



​3. 체육 선생님(동석)의 기억: "그 녀석의 필사적인 연기"


​1982년, 체육 교사였던 동석에게는 잊을 수 없는 1학년 꼬맹이가 한 명 있었다.


​그때는 오후 6시만 되면 온 세상이 멈췄다. 버스도 서고, 사람도 서고. 모두 그 자리에 서서 국기가 있는 쪽을 향해 경례를 하는 국기 하강식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석은 당시 체육 선생이자 규율을 담당하는 지도 교사라, 유일하게 움직이며 학생들을 감시해야 했다. 특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는 국민학교 저학년 아이들은 통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움직이다 걸리면 혼난다. 이 회초리 보이지?"


​그의 한마디에 운동장은 거대한 '얼음땡' 놀이터가 되었다. 아이들은 왜 하는지는 몰라도 움직이면 큰일 난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때, 미끄럼틀 옆에 서 있던 한 녀석이 동석의 눈에 들어왔다. 희수라는 아이였다. 녀석의 코에서는 콧물이 쭈욱, 마치 치즈처럼 내려오고 있었지만 녀석은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린 채 부동자세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 필사적인 표정이 너무 웃기고 귀여워서 동석은 헛기침을 해야 했다.


​'저거 저거, 입으로 들어가겠는데.'


​동석이 녀석의 앞을 지나가려는 찰나였다. 녀석이 갑자기 눈치를 보더니 과장된 몸짓으로 재채기를 시도했다.


​“에취!”


​그러면서 고개를 최대한 가슴에 붙여, 재빨리, 아주 전광석화처럼 가슴팍 손수건에 잔여 콧물을 훔치는 장면을 동석은 똑똑히 목격했다.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호랑이 선생님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진정시킨 동석은 회초리 끝으로 녀석의 어깨를 툭 치며 한마디를 던졌다.


​"너... 애국심이 아주 대단한 녀석이구나."




​지금은 입학식도 강당에서 하고, 빵빵한 히터가 있어 아이들이 콧물을 달고 살 이유가 없다. 필요하면 주머니에서 톡 뽑아 쓰는 티슈나 물티슈가 널려 있다.


​국기 하강식도, 가슴의 뻣뻣한 손수건도, 오전/오후반의 소란스러움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영숙이 기억하는 그날의 '투둑' 소리와, 동석이 참았던 웃음, 그리고 꼬마 희수가 느꼈던 그 긴박함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각자의 마음속에 따뜻한 모래바람으로 남아 있다.



​[다음 편 예고]


​"아줌마! 100원만 바꿔주세요, 빨리요!"
​칼바람이 불던 동네 슈퍼 앞.
빨간색 다이얼 공중전화 앞에는 줄이 길었다.


진우의 기억속에는 첫사랑과의 통화가 긴박하게 흘러갔다.

전화 다이얼에 그녀의 번호를 누르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남은 동전 두개. 진우의 첫사랑 지수와의 달달한 스토리를 공개합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