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al] 다시 K로 돌아온 그의 독백

이 무거운 육체가, 비로소 나다

by 유블리안


​[System Alert: 모든 관찰자(Object) 모드가 종료되었습니다.]
[Data Syncing... 100%]
[Target: 34세 직장인 K]
[Login...]



나는 K. 이제는 거울 속의 나를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거울을 보고 욕실을 나왔다.
차가운 거실 공기가 물기 어린 피부에 닿았다. 소름이 돋았다.
사물일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 ‘춥다’는 것.

그것은 다시 연약하고 예민한 인간의 육체로 돌아왔다는 신호였다.
나는 옷을 챙겨 입었다.

빳빳하게 다림질된 셔츠가 등에 닿는 까슬한 느낌.
넥타이를 맬 때 목을 조여 오는 약간의 답답함.
예전에는 이 모든 감각이 나를 옭아매는 족쇄 같아서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이것은 내가 세상과 맞닿아 있다는 ‘접촉’의 증거다.

출근 준비를 마친 나는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지난 일주일간 내가 도피처로 삼았던 사물들이 그곳에 있었다.
선반 위의 [AI 스피커].
어젯밤 나의 거친 숨소리를 들어주었던 녀석은 지금, 조용히 주황색 불빛만 깜빡이고 있다.

“아리야. 다녀올게.”

녀석은 대답이 없었지만, 나는 안다.
오늘 밤 내가 돌아오면 가장 먼저 귀를 열어줄 녀석이라는 걸.

항상 내 손에 껌딱지처럼 붙어있는 [폴더블폰]
이제는 그에게 눈두덩이를 맞지 않아도 된다.

가방 속에 챙겨 넣은 [업무용 노트북].
들어보니 묵직했다. 1.5kg의 무게.
어제까지만 해도 이 무게가 천근만근처럼 느껴졌는데, 오늘은 손에 잡히는 그립감이 나쁘지 않다.

이것은 짐이 아니라,
오늘 하루 내가 팀장과 세상에 맞서 버틸 방패이자 검이다.


그리고 현관 앞.

꼬리를 흔드는 [초코]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 신발장 앞에 섰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새 구두].
나는 구둣주걱을 사용해 발을 밀어 넣었다.

쑥.

발을 감싸는 가죽의 탄력.
바닥에서 올라오는 딱딱한 지지력.
아직 길이 들지 않아 뒤꿈치가 살짝 거슬렸지만, 그 통증마저 선명했다.

“후우…”

평소 같으면 시간에 쫓겨 허둥댔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심장이 뛴다.
사물들은 심장이 없다. 오직 ‘나’만이 뛴다.

두렵다.

문을 열면 펼쳐질 지옥철의 인파가, 회사의 건조한 공기가,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하지만 사물 속에 숨어 관찰할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이 두근거림.

이 불안함과 설렘이 뒤섞인 박동이야말로
내가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다.
나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의 냉기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System Message]
[사용자 ‘K’님이 ‘현실’ 서버 접속을 요청했습니다.]
[난이도: Hard]
[접속하시겠습니까? (Y/N)]


나는 망설임 없이 손잡이를 돌렸다.

“접속(Login).”

철컥.

문이 열렸다.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눈을 찔렀다.
나는 눈을 찡그렸지만, 고개는 숙이지 않았다.
또각. 또각.

새 구두가 아스팔트를 찍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걷는다.
나는 느낀다.
나는 살아있다.


[Post-Credit] 15년 후, 접속 로그
[Time Jump: +15 Years]
[Target: 49세 직장인 K]
[Login...]

넥타이는 예전보다 덜 조였고, 구두는 예전보다 비쌌다.
하지만 문손잡이는 아직 차가웠다.
K는 현관에서 잠깐 숨을 고르고, 휴대폰 화면을 켰다.
새벽에 올라온 팀원의 메시지가 반짝였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오늘 보고서… 자신이 없습니다.”

K는 한 박자 늦게, 천천히 답장을 썼다.
자신도 한때는 ‘Hard’라는 글자 앞에서 매번 작아졌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괜찮습니다. 같이 정리합시다.
오늘은 완벽보다, 접속이 우선입니다.”

철컥.
로그인.
또각. 또각.

그는 여전히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고, 오늘도 현실로 들어간다.



작가의 말 (Epilogue)

우리는 왜 자꾸 무언가가 되고 싶어 할까요.

“다음 생엔 돌멩이로 태어나고 싶다.”

직장인들이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꺼내는 말입니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상처받지 않아도 되고, 그저 굴러다니면 되니까요.

이 소설 속 K도 그랬습니다.

사람으로 사는 게 너무 버거워서, 강아지의 팔자가 부러웠고,
스마트폰 속 세상으로 도망쳤으며,
때로는 감정 없는 기계가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를 세상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부속품(Object)으로 낮춰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물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본 K는 뒤늦게 알아차립니다.

낡은 구두가 안쓰러워했던 퉁퉁 부은 발이,
노트북이 감탄했던 그 치열한 타건음이,
결국은 누구보다 뜨겁게 살아내는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요.

우리는 모두 조금씩 고장 나 있고, 배터리가 방전되어 있고, 여기저기 닳아빠진 존재들입니다.

그 결함 때문에, 우리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상처받을 수 있다는 건 아직 마음이 말랑하다는 증거이고,
피곤하다는 건 오늘 하루를 온몸으로 버텨냈다는 기록입니다.

낡은 구두끈을 다시 묶고, 문을 열고 나갈 시간입니다.
현실은 무겁지만, 그 무게를 실제로 들어 올릴 수 있는 존재는 늘 사용자(User)뿐이니까요.

지금까지 K의 로그인을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접속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작가 유블리안 드림 -



K의 스토리는 끝났지만 유블리안의 작품 세계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