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귤밭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는 '영장'이었다. 누군가 귤을 따면서 "어제 영희네 영장났어, 들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내가 가장 먼저 배운 제주어 역시 '영장'이었다.
"삼춘, 영장이 뭐예요?"
영장은 사람이 죽었다는 뜻을 가진 제주어다. '초상났다'를 '영장났다'고 표현한다. 도시에서는 회사 직원이나 친인척이 아니면 장례식장에 가는 일이 드물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마을에 영장이 나면 하나같이 마을회관으로 모인다. 다 함께 음식을 만들고 장례를 준비한다.
앞집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장례식에 갔던 날이 있다. 할머니 아들은 내게 어떻게 알고 왔냐며 너무 반가워했다. 그 후로 나와 마주칠 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 아이가 우리 어멍 영장났을 때 왔다"고 자랑하곤 했다. 난 그저 이웃이라 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영장 다음으로 많이 들었던 단어는 '잔치'다. "어제 잔치 먹으러 간?" 제주에서는 결혼식 피로연을 마을회관에서 여는 경우가 많다. 영장이 났을 때처럼 동네 사람들이 모두 출동해 음식을 만들고 피로연을 돕는다. 할머니들은 귤 따기가 끝난 오후 5시 이후에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잔치 먹으러 간다.
잔치와 영장에 빠질 수 없는 게 부조(축의금, 조의금)다. 제주는 특이하게 '쌍부조' 문화가 있다. '겹부조'라고도 불리는 이 풍습은, 손님이 고인이나 신랑·신부뿐만 아니라 그들의 부모 등 가족과도 인연이 있을 경우, 각각 따로 부조를 하는 문화를 말한다. 무슨 말이냐면, 육지에서는 A가 결혼하면 축의금을 한 번 낸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내가 A를 알고, A의 부모님도 알면 부조를 각각 해야 한다.
그래서 제주 피로연에는 축의금 데스크가 따로 없다. 손님들이 각자 자신과 관계된 사람에게 부조를 직접 건네기 때문이다. A는 A의 손님에게, A의 부모님은 부모님의 손님을 맞이하며 축의금을 받는다. 그래서 '쌍부조'라는 표현을 쓴다.
육지 사람들이 제주에 와서 가장 적응하기 힘든 게 이 쌍부조다. 하지만 요즘은 육지에서 온 사람이 많아 각자의 방식으로 부조를 하고, 제주 사람들도 육지 사람도 각각 서로의 문화를 이해해주는 분위기다.
그러고 보면 영장과 잔치야말로 제주 사람들의 대표적인 공동체 문화가 아닐까 싶다. 사실 육지 사람이 제주에서 장례식이나 잔치에 참석하기는 쉽지 않다. 특별한 관계가 아니면 육지사람은 잘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문화야말로 육지 사람이 꼭 경험해봤으면 좋을 제주 문화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함께하는 공동체 문화가 있지만, 신기하게도 독립적인 문화도 존재한다. 보통 제주 집에는 안채와 바깥채라 부르는 '안거리'와 '밖거리'가 있다. 안거리에는 아들 내외가, 밖거리에는 어멍(어머니)이 사는 경우가 많다.
내가 가장 신기했던 건 이들이 함께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자의 집에서 각자의 부엌에서 각자의 밥을 먹는다. 처음엔 정말 낯설었다. 같은 경계 안에 두 집이 있지만 생활은 독립적이다. 육지라면 며느리가 시어머니 식사를 챙기느라 바빴을 텐데 말이다.
처음엔 야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가족인데. 하지만 제주에 살면 살수록 이것이 얼마나 현명한 시스템인지 금세 깨닫게 된다. 제주 할머니들은 자식들에게 거의 의지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활비 정도는 스스로 해결한다. 정말 부지런하시다.
이와 비슷하게 귤밭에서 본 '품앗이' 개념도 육지와 달랐다. 육지는 '오늘 우리 밭일 도와줬으니 다음번에 너희 밭일 도와줄게'라는 식이다. 그런데 제주는 다르다. 내가 오늘 A집 귤을 따주면 반드시 그날 일당을 현금으로 받는다. 가족이어도 마찬가지다. 나중에 내가 일이 생겨 도와주지 못하더라도 서운해하지 않는다. 육지에서는 "내가 지난번에 도와줬는데 넌 왜 안 도와줘?" 하며 서운해하는데 말이다.
처음엔 낯설었던 제주의 이러한 문화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성향과 잘 맞는다는 걸 깨달았다.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고,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갚아주며, 혼자 지내지만 때로는 함께하는 일상.
나는 운이 좋게도 제주 할머니들과 귤을 따면서 이런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를 직접 접할수 있었다. 아마 수박 겉핥기식의 한달살이였다면 절대 경험할수 없는 문화이니까. 공동체를 이루되 서로의 독립성을 존중하는 이 절묘한 균형감이 참 매력적인 곳이다. 아마 이런 문화 때문에 제주 사람들이 겉으론 차가워 보여도 속마음은 따뜻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귤 따러 갈 때마다, 나는 오늘 또 어떤 제주 음식을 맛보고, 어떤 제주어를 배우고, 어떤 제주 문화를 새롭게 배우게 될지 늘 설레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