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계절을 먹다

내가 귤을 따면서 첫 번째 배운 게 '제주어'였다면 두 번째 배운 건 ‘리얼 제주 로컬 음식’이었다. 제주 향토음식점에서 돈을 주고도 절대 맛볼 수 없는, 제주 할머니가 손수 만들어 주는 진짜 제주 음식. 제주 할머니들이 어릴 때부터 먹으며 자란 제주 음식들.


귤밭에서 만난 제주의 진짜 맛

귤을 따면 3번의 쉬는 시간이 있다. 오전 간식시간, 점심시간, 오후 간식 시간. 보통 오전 간식 시간에는 컵라면이나 김밥을 먹기도 하지만, 운이 좋으면 제주 토속음식을 먹게 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요즘 제주 사람들조차 쉽게 맛볼 수 없는, 할머니들의 기억 속에 담긴 아주 옛날 제주 음식들이다.


메밀가루와 고구마로 만든 담백한 메밀범벅, 제주 해녀 할머니가 직접 잡아 온 성게로 즉석에서 만든 성게 칼국수를 먹기도 한다. 제주에서 아이를 낳으면 먹는다는 메밀을 수제비처럼 떠서 넣어 끓인 메밀미역국, 돼지고기를 푹 삶아 중면에 말은 고기국수를 먹기도 한다.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내어 온갖 재료 가득 넣은 진한 국물의 잔치국수는 또 어떤가. 또 계절에 따라 호박죽을 먹기도 하고, 팥죽을 먹기도 한다.


그리고 정말 잊을 수 없는 맛이 하나 있다. 아주 더운 여름날, 오후 간식시간에 귤밭주인 할머니가 빨간 바구니를 뒤집어 거기에 귤을 까서 손으로 빡빡 밀어서 귤주스를 만들어 주셨다.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정말 옛날 방식 그대로 손맛이 담긴 귤주스.

내가 어디서 이런 진짜 제주의 맛을 볼 수 있을까?


할머니 도시락 속 사계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낮 12시, 점심시간이다. 직접 싸온 도시락을 다 모여 함께 밥을 먹는데, 어젯밤 제사가 있었던 할머니는 제사음식을 챙겨 와서 나눠먹는다. 이때 제주 제사상에서만 맛볼 수 있는 옥돔구이, 소라꼬지, 그리고 여러 가지 적도 함께 맛을 본다.


내가 특별히 이 점심 시간을 좋아한 이유는 따로 있다. 할머니들이 도시락 반찬을 짠~하고 펼치면 그 도시락 안에는 제주의 사계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고사리철에는 약속이나 한 듯 모두 고사리 반찬을 싸온다. 양애철에는 양애무침, 호박잎철에는 호박잎국을 만들어온다. 어떤 때는 직접 담궈 살얼음 동동 쉰다리를 꺼내기도 한다. 쉰밥과 설탕을 이용해 유산균 가득한 달달한 술을 만드는 거다. 제주 사람들은 그 어느 재료 하나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다.


또 어떤 날은 직접 만든 오메기떡을 가져온다. 관광객들이 사먹는 콩고물 묻은 오메기떡 말고, 제주 할머니가 직접 집에서 만든 좁쌀 오메기떡 먹어는 봤나?


우영팟, 제주 할머니의 텃밭

제주 할머니들이 사는 집에는 '우영팟'이라는 자신만의 텃밭이 집집마다 있다. 그곳에 자신들의 먹거리를 심고, 그걸로 반찬을 만들어 먹는다. 일 년 내내.


할머니들에게 배운 덕분에 우리 집 텃밭에도 일년내내 다양하고 신선한 채소들이 계절별로 자란다. 상추, 쑥갓, 쪽파, 양파, 대파, 부추, 방풍나물, 당귀, 토란, 달래... 도시에 살면서는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마트에서 사는 채소가 아닌, 내 손으로 키운 제철 채소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 도시 생활자에게는 꿈의 음식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팜투테이블이 아닐까?


나 역시 도시에 살 때는 맨날 마트에 가서 매대 위에 모양이 일정한 예쁜 야채를 고르고, 그걸로 음식 비슷한 것을 만들어 먹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우리집 텃밭에는 고추, 가지, 깻잎, 대파가 자라고 있다. 봄이면 어김없이 집주변에는 항상 달래, 방풍, 당귀, 부추도 제법 올라온다. 벌써 내 마음은 텃밭의 야채들로 배가 부르다.


할머니들이 직접 기른 채소는 요리법도 아주 단순하다. 유채나물을 갓 따서 참기름과 소금만 넣고 조물조물 무쳐 내놓는다. 양애 어린 순이 올라오면 손으로 톡 끊어 된장에 찍어 먹는다. 여름이면 콩잎을 따서 고기와 함께 쌈을 싸 먹고, 텃밭에서 물외를 하나 따서 된장을 풀어 시원한 냉국을 만들어 먹는다. 호박잎을 뜯어 밀가루나 메밀가루를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해 호박잎국을 끓이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한 끼가 된다.

이렇게 손쉽게 만든 음식인데도 어찌나 맛있는지. 시장에서 파는 채소로는 절대 낼 수 없는 깊은 맛이 난다.


자연이 차려주는 계절 밥상

봄이 오기 전, 배추꽃이 올라오면 배추꽃으로 김치를 담가 먹고, 풋마늘이 연할 때 짱아찌를 만들어 장아찌통에 차곡차곡 눌러 둔다.


여름이면 해녀 할머니가 바다에서 건져 온 우뭇가사리를 말려 묵을 만들어 먹으며 더위를 식힌다. 지난여름, 해녀 할머니가 직접 바다에서 잡아온 뿔소라, 미역, 청각으로 제주식 냉국을 만들어주셨다. 미역쌈을 싸서 함께 저녁을 먹는데 이 밥상이야말로 진정한 제주 건강 제철 밥상이었다.


가을에는 노란 늙은호박을 푹 익혀 갓 잡은 갈치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끓인 갈치국이 밥상을 장식한다.


겨울이 오면 텃밭에서 배추와 무를 뽑아 콩국을 끓이고, 무국을 한솥 끓여 뜨끈한 국물로 찬바람을 이겨낸다.


이처럼 자연이 주는 건강한 밥상을 먹고 사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음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요즘 흔해진 '제철'이라는 단어가 그저 마케팅 용어였다면, 여기서는 정말 그 계절에만 맛볼 수 있는 진짜 제철 음식을 먹으며 살아간다. 자연의 리듬에 맞춰 자연이 차려주는 할머니들의 밥상에서 나는 비로소 '제대로 먹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후 12시 점심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제주의 계절을 먹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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