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좋아하는 영화가 있다. 30대 여성이 인생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그린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바로 그것이다. 주인공 리즈(줄리아 로버츠)가 이탈리아에서 친구들과 식사하며 각자의 도시를 상징하는 단어를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스톡홀름은 '순응', 뉴욕은 '열망', 그리고 로마는 '섹스'라고 표현된다.
그렇다면 '제주'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무엇일까?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제주라는 단어 자체만으로도 '위안'을 얻는것 같다. '제주로 여행을 간다'거나 '제주에 산다'는 말에서 부러움을 느끼는 걸보니. 그런 많은 사람들에게 '제주'는 로망이자 휴식이지만, 정작 나는 제주에 그리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제주를 몹시 싫어했던 사람이었다. 내게 제주는 그저 물가가 비싼 관광지 중 하나였을 뿐이었고, 바람이 많이 불고 습하며 관광객으로 가득 찬 곳. 당시 나는 '어떻게 하면 은퇴 후 외국에서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사람이었기에, 제주를 여행하는 사람도 제주에 사는 사람도 전혀 부럽지 않았다. 그래서 내 삶과는 전혀 관련 없는 단어, 앞으로도 관련없을 단어가 바로 '제주'였다.
하지만 나는 벌써 제주에서 아홉 번째 여름을 맞이하는 9년 차 이주민이 되었다. 철부지 같았던 30대의 나는 어느새 40대 중반이 되었고, 이제서야 제주가 어떤 곳인지 비로소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계획하는 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도.
내 갑작스런 제주살이는 지인과의 가벼운 농담에서 시작되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난다는 지인에게 "내가 대신 언니네 집을 지켜줄까?"라고 가볍게 던진 한마디. 그렇게 시작된 제주 생활. 과연 이 조용하고 불편한 점이 많은 시골 집에서 적응하며 살 수 있을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일주일만 지내 보자' 했던 것이 3개월이 되고, 1년이 되고, 9년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은 제주 사람들조차 '시골'이라 부르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제주도 남쪽, 대한민국 최대 감귤 생산지이자 한라산이 가장 멋지게 보이는 곳이다.(물론 내 생각이다.) 아침이면 새소리에 눈을 뜨고, 창문을 열면 초록빛 귤나무가 가득하며, 밤 9시만 넘으면 모든 집의 불이 꺼지고 가로등마저 잠이 드는 곳. 심지어 일흔이 넘은 할머니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그런 동네다.
이제 나에게 제주는 더 이상 관광지가 아니다. 제주는 '일상'이고, '자연'이며, '삶'이다. 계절이 지나도 변함없이 늘 푸른 귤나무가 있고, 언제든 달려가 소리 지를 수 있는 바다가 있으며,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 덕분에 이곳에서 나는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법도 배우고 있다.
늘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술을 마시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여행하는 것이 익숙했던 내게, 지극히 개인적이었던 내게, 주변 사람들에게 고마워할 줄 몰랐던 내게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었다. 이 낯선 곳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귤따기'였다. 도시의 삶에 익숙했던 내가 시골에서 할머니들과 함께 귤을 따며 사는 삶을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어쩌면 신의 계획이었지도 모르겠다.
이제, 이곳 제주에서 할머니들과 함께 귤을 따면서 알게 된 이야기들을 당신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내가 제주에 살지 않았다면, 귤을 따지 않았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그 이야기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