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도시, 까만 마음

by 하우스노마드 키라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내가 누렸던 삶은 보통 내 또래 30대 싱글 여성이 누리는 것보다 훨씬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다. 한국의 사교육 시장을 대표하는 교육 기업에서 특수목적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한 입시 강사로 시작해 제법 이른 나이에 빠르게 승진했다. 나이 서른에 한 브랜치의 원장 타이틀을 달았으니까.


학생과 학부모들은 나를 선생님이라 불렀고, 직원들은 원장님이라 불렀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그 당시 나는 세상에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내가 이렇게 빨리 승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내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업무를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을 무능하다고 생각했고, 출근 시간이든 회의 시간이든 지각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강사 시절, 나는 새벽까지 학원에서 수업 준비를 하면서도 늘 즐거웠다. 하지만 경영자로 승진한 후부터는 달랐다. 목이 돌아가지 않을만큼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심지어 꿈속에서도 예산을 짜고 있을 정도였다. 학생과 학부모 관리, 직원 관리, 예산과 결산.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정말 꼭 좋은 대학에 입학해야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강사로 일할 때 나는 그 누구든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땅덩어리 좁은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강의만 하던 선생님에서 경영자로 자리가 바뀌면서 나의 직업적 가치관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즐겁던 일이 재미없어지고, 타인을 설득할 자신이 사라졌다. 스트레스로 인해 온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밤마다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평일엔 소화가 안 되어 끼니를 거르고, 주말엔 폭식하는 일이 많아졌다. 결국 병원에 입원하는 일까지 생겼다.


결국 여행 가방을 챙겨 해외 배낭여행을 떠났다. 아무런 기약도 없이 떠난 여행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클리어 하고 있었다. 내 버킷리스트는 단 세 가지였다. 네팔 안나푸르나 트레킹,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모로코 사하라 사막.

여행을 통해 나는 그동안 돌본 적 없었던 내면의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지난 삶의 장면들이 마치 영화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특히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수많은 노인들을 통해 '나이들어 가는 것'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던 내가 '어떻게 하면 잘 늙어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정작 내면의 나를 돌보는 시간은 없었다. 그래서 마음이 늘 가난했던 사람이었다.


모든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풀던 내 삶에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자동차 없이 못 살 줄 알았던 나는 자동차 대신 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높은 하이힐 대신 운동화를 신고, 루이비통 백 대신 백팩을 맸다.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일을 시작할 때도 기존 회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온라인 강의와 교육 콘텐츠 개발 회사에 입사했다. 급여는 이전 회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맨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그런데 6개월쯤 지났을 무렵, 나는 이 회사에서 불법 대행 업무와 탈세 등 각종 비리를 목격하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단어가 하나쯤 있을 것이다. 내게 그 단어는 '정직'이었다. 내 신념과 맞지 않는 이곳에 계속 머물러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때, 제주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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