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귤따기 선생님

by 하우스노마드 키라

J언니가 유럽으로 떠난 3개월 동안, 나는 제주 귤밭 안 돌집에서 혼자가 아닌 강아지와 고양이와 함께 제법 잘 지냈다. 화려하고 복잡한 서울에서 회사와 집만 오가던 내가, 한적한 시골집에서도 꽤 잘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집에 TV도 라디오도 없었기에 주변 자연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강아지와 산책을 하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텃밭에서 야채도 키우며 지냈다. 그러다 보니 새순이 돋고 꽃이 피는 계절의 변화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겁이 많은 편이라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오면 여전히 집 안으로 들어가 모든 문을 잠궜다. 그래서 제주에서 몇 년을 살면서도 제주 밤하늘에 수많은 별이 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지냈다. 심지어 우리 집 하늘 위에 북두칠성이 그렇게 크게 떠 있는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워 본 적이 없어서 함께 잠드는 것조차 무서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 녀석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한밤중에 밖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기라도 하면 강아지는 크게 짖었고, 그 소리가 그렇게 든든할 줄이야.


그러던 어느 날 마주친 옆집 아주머니가 읍내에 있는 친구 분의 카페 일을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셨다. 그렇게 나는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귤밭 속 집에서만 지내던 나는 처음으로 읍내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카페의 주인은 커피를 내리는 법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카페 운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내게 이렇게 말했다.

"키라,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카페에 필요한 게 있으면 알아서 주문하고."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였다. 나는 오래전부터 막연하게나마 작은 내 가게를 운영해 보고 싶었다. 특히 나만의 작은 카페를 여는 것이 꿈 중 하나였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카페 주인은 늘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으며 우아해 보였으니까. 그런데 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카페 운영을 경험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카페에는 유독 이 동네 제주 현지인 손님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친해지는 동네 사람들도 생겼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내가 '고마운 제주 사람 1'이라고 부르는 H아저씨였다. 그는 이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 지금은 귤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였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농부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바쁜 농사일 틈틈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고, 직접 원두를 볶아 커피를 내려 마시며, 와인도 즐기는 사람이었다.


H아저씨와는 주로 책 이야기를 나누었고, 요즘 세상 사는 이야기도 많이 했다. 11월이 되자 내가 사는 서귀포에는 주황빛 귤이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귤 수확철이 다가왔다. 어느 날 H아저씨는 내게 귤 따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나 역시 귤 따는 일을 꼭 해보고 싶었다. 도시에서 살다 제주로 온 이주민들에게 귤 따기는 하나의 로망 같은 일이니까. 게다가 이곳 서귀포는 귤 수확철이 되면 일손이 크게 부족해 귤을 딸 사람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H아저씨는 귤을 따본 적 없는 나를 '친절하게' 잘 가르쳐 매년 귤 수확철마다 나를 귤밭에 데리고 갈 나름 야무진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였다.


"키라, 귤 따는 법 잘 배워서 매년 우리 집 귤 따는 거 도와줘야 해."


귤 가위를 들고 잘 익은 귤을 하나 땄다. 그리고 가위를 귤 꼭지의 별 모양에 바짝 붙여 잘랐다. 귤 꼭지가 뾰족하게 남지 않도록 바짝 잘라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뾰족한 꼭지가 다른 귤을 찔러 상처를 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귤 따는 법을 배우며 H아저씨의 귤밭에서 서툰 가위질로 귤을 따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그때 H아저씨가 가르쳐 준 귤 따는 기술이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제주 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지금, 해마다 귤따는 철이 돌아오면 나는 H아저씨의 귤밭, H아저씨 누나네 귤밭, H아저씨 친구네 귤밭 등 여기저기 귤따러 다니느라 바쁘다.


"키라, 내일 혹시 시간 돼? 귤 좀 따줄 수 있어?"


나의 첫 귤 따기 선생님, '고마운 제주 사람 1' H아저씨 덕분에 이제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단순히 귤 따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제주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그렇게 H아저씨는 내 첫 번째 귤따기 선생님이자, 나의 고마운 제주사람1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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