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영화 같은

by 민교

정신을 차려보니 손에 든 건, 5천 원과 관람권이다.




♤ 비가 오고 있었다

어제 소나기가 온 덕분에 한결 시원해는데,

밤 사이 비가 왔는지, 도로가 젖어 있다.

가벼운 차림으로 집 밖을 나왔다가 두워지는 사방을 보고 집에서 우산을 가져와서 몇 걸음 걷자, 빗방울이 되었다.


이런 날은 발길이 뜸한 공원보다 영도다리를 건넜다 오는 게 나은 날이라, 광복로로 향했다. 며칠 전에 개봉한 <베르메르, 위대한 전시회>의 다음 상영시간을 보려고 모퉁이 극장 안내판 앞에 섰는데, 보고 싶은 영화를 9시에 볼 수 있다니.




7시 20분이라, 마음이 바빴다. 버스를 타고 집에 와서 집을 대충 정리하고 마트에서 장을 볼 준비와 물 한 병과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자, 8시 10분이다. 극장으로 걸어가는데, 어제 읽었던 페이지가 떠올랐다.


저자는 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독일의 아우토반을 달리는 중이었는데, 앞차의 엉덩이를 봤다는 내용이었다. 미래를 미리 본다는 말인데,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명확한 구분은 없다는 말이다.



[뉴턴의 아틀리에]. 김상욱, 유지원 저. 민음사. p164중에서



극장 앞에 오니, 8시 45분이다. 아침 10시에 열리는 은행은 굳게 닫혔고, 2찻집에는 불이 켜져 있다. 극장엔 직원의 인사만 들리고, 조용하다. 혹 혼자 대관하는 건 아닌지?


9시, 영화가 시작되었다. 스크린으로 보는 온라인 전시회. 베르메르의 그림은 별로 볼 기회가 없었 는데, 남겨진 작품이 45점 밖에 없다고 했다. 사방으로 흩어진 귀한 작품을 어렵게 모아 스크린 전시회를 연다는 해설을 들으며, 포스터에 그려진 대로 소녀의 눈동자 색깔과 진주 귀고리가 같은 색깔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팍'하는 소리가 났다.



까맣던 스크린에는 비상등이 비췄고, 영화를 같이 보던 직원이 급하게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직원은

"갑자기 정전인데, 20분을 기다려서 볼"

건지 물었다. 왜 안내포스터를 볼 때, 다음 영화가 11시에 시작되는 걸 봤을까. 든 건 멈춰야 했다. 직원은 불 꺼진 실내를 빠른 걸음으로 오가다 데스크에서 5000원과 관람권을 내밀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낯이 익은 직원이 신경을 분산시키지 않고 차분하게 수습하려면, 나는 빨리 극장을 나와야 했다. 어둡다고 휴대폰 후라쉬를 켜라고 했지만, 오래전부터 드나든 곳이라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니 2층도, 1층도 굳게 잠겨 있었다.


늘 사람들로 복닥이던 광복로는 휭하고 바람이 지나갔고, 어정쩡한 시간이라 텅 빈 도로에서 한 손에는 지폐와 관람권, 한 손엔 가방과 우산을 욱여넣은 장바구니를 든 자신이 낯설었다.


맞아,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혹 급하게 밖으로 나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물병과 가방과 우산을

장바구니에 넣었었다.


영화를 보다가 이리저리 바뀌는 화면을 생각해서 느슨하게 한 고무줄을 당겨 매고 정신을 차리려고 가까이 있는 공원에 갔다. 장바구니에 든 가방을 꺼내서 물을 마시고 조그맣게 장바구니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양우산을 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공원 산책로를 걷는데, 여행자의 시간인 공원에는 외국인들의 말소리만 들린다.



♤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은


저린 손을 치료하러 한의원도 가고, 마트에 갈 생각인데, 왠지 걷기가 싫어서 비프광장으로 향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서른 살이나 됐다지만, 한 번도 안 가봤는데, 영화제로 온 여행객인지, 부산을 찾는 여행객이 많아서인지, 거리는 형형색색의 캐리어로 가득하다. 자갈치 시장으로 가는 건널목에는 얼마 남지 않은 추석 장보기에 바쁜 할머니들이 끌차를 끄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외국인들이 거리를 메운다. 목도 타고 달달한 게

당겨서 들어간 롯데리아에서 플레인 요거트를 키오스크로 주문하는데, 건장한 체격의 세 명의 외국인은 영어도, 일어도, 중국어도 아니다.

갑자기 낯선 외국의 이름 모를 도시를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기분이다.




♤ 손목에 멍을 남기다


버스를 타고 한의원에 갔다. 접수를 하고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 누운 침대는 매우 딱딱하다. 아픈 손에 하나, 둘 꽂히던 침은 머리에서 씨앗을 뿌리듯 마구 꽂힌다. 아픈 건 알고 왔으니,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엎드려서 시간이 가길 기다리는데, 발끝에 느껴지는 휴대폰 진동음이

잦아들 때쯤, 앞과 옆의 할머니들의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린다.


손목과 손등, 목에 항과 뜸을 뜼다. 각오한 아픔과 뜨거움이었지만, 동그란 멍이 손목을 차지한다. 한의원을 나서는데, 무표정한 간호사들은

" 세 시간 안에는 물에 손 넣으면 안 돼요."라고

한다. 집에 와서 세 시간 동안 물에 손을 안 넣을 거라고 넷플릭스를 켰다.



♤ 영혼은 밤이 더 외로울까


몇 번 본 영화인 <밤에 우리 영혼은>을 켰다.

남자 주인공은 며칠 전에 돌아가신 로버트 레드포드. 많은 영화에 나왔지만, '추억'이란 영화에서 처음 봤다. 그 영화를 같이 본 친구는

영화를 본 후 바로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아직 한 번도 보질 못했다.

이십 대 중반에 만난 친구는 내가 둘째를 낳고 일주일 되었을 때 친정나들이를 왔다가 전화를 했었다. 미국에서 아이 셋을 키우며, 직장을 다닌다는 그녀가 편안한 중년을 살았길 바란다. <밤에~>는 이웃에 홀로 사는 노년의 남녀가 쉽게 잠들지 못할 때, 같은 침대에서 두런두런 이야길 하며 잠에 든다는 내용이다. 그때의 이야기들은 오직 한 번만 살 수 있는 인생에서 자신의 뜻과 다르게 흘러가는 삶의 가닥을 이어가야 하는 이야기들이 아니었을까. 영화 중에 주인공은

아들과 손자를 위해 떠나고, 혼자 남아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꿈을 찾아 그림도구를 사러 갔다가 들은 이야기는 담소를 나누던 친구가 '자다가 갔다.'는 이야기다.

로버트 레드포드도 자신의 집에서 자다가 영면했다는 말처럼 인생이 영화이고, 영화가 특정할 수 없는 인생 같다.


외모가 출중해 뛰어난 연기가 묻혔다는 로버트 레드포드. 중년에 맡은 배역도 좋았지만, 분장 없이

맡은 배우 자신을 되돌아본 듯한 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을 몇 번 더 볼 생각이다. 그의 생각과 업적도 뛰어났다지. 알고리즘으로 찾아온 그의 아이들과 노는 장면은 영화에서 옆집 손자였던 제이미와 노는 모습으로 확인되었다. 아마 영면 하는 모습도 편안함이리라.




♤ 우리 삶도 영화처럼 편집할 수 없을까


침을 맞을 때 오래 달그락거린 전화는 고등학교 때

친구였다. 참 좋은 친구인데, 결이 달라서 언제부턴 가부터 삐그덕 거린다.


영화처럼, 정말 영화처럼 만나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여행도 가면 좋으련만. K 장녀에 공사다망한 친구의 일상은 우리의 만남에 무시로 끼어든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와는 같이 본 영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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