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배운 세상

by 민교

나는 한글을 만화로 배웠다.


위로 언니, 오빠가 있었지만, 다들 바빠서 막내 동생의 한글 공부에 신경은 쓰질 않았다. 대신 열 살이 많은 오빠가 집에서 만화방을 해서, 집에는 만화가 어지럽게 늘려있었다.


글을 몰랐을 때는 그림만으로는 재미가 없었다.

언니, 오빠가 선심 쓰듯이 주던 종이는 반듯하게 잘라진 것도 아니고, 꺼칠꺼칠했다. 몽당연필을 얻어 방구석에서 만화를 보고 그리다, 그림이 좋아졌다. 그러다 한자씩 익힌 한글이 늘어갈 때, 국민학생이 되었다.


글자를 웬만큼 익혔을 때, 오빠의 만화방은 문을 닫았다. 오빠는 호떡을 팔고, 아이스케키를 팔러 가면서 같이 가자는 말은 안 했지만, 눈치가 빨랐던 나는 여러모로 필요한 일꾼이었다.

그리고 3학년이 됐을 때, 오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원이 되었다.


청운의 뜻을 접어야 했던 오빠는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책을 많이 사 왔다. 한자가 많이 쓰있던

한국단편문학선과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백과 사전은 만화를 많이 본 내가 보기에 벅찼지만, 그냥 읽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사전의 어떤 페이지가 너덜너덜해지고, 한국문학선과 그 외 책들은 오빠 방으로 옮겨지고 문이 닫혔다.


오빠는 다섯 남매 중 외동이었다. 엄마의 자랑이 었던 오빠는 총명한 데다 집안의 경제를 위해 고등학생 때부터 온갖 알바를 했지만, 그렇게 원했던 서울의 대학은 합격을 하고도 눌러앉아야 해서 엄마 가슴에 커다란 못이 되었다.


오빠 한때 기타에 빠졌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날이 갈수록 많은 책과 전집을 사 왔고, 오빠 방문은 오빠가 있는 시간만 열렸다.


그때쯤,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만화방이 생겼다. 엄마가 간간이 주시던 용돈으로 만화방에 가서 민애니도, 엄희자도 만났던 시절. 공책 뒷장 에는 인형들이 그려지고, 종이를 잘라서 옷을 그려 입혔다. 아이들은 인형옷을 그려달라고 줄을 섰지만, 큰 재미는 없었다. 나와 아이들의 취향도 달랐고, 색연필 매끄럽지 않은 12색이었으니까.


인형옷을 그려달라던 송미는 두 살이 적은 남동생과 논다고 인형에도, 만화에도 별 관심이 없었고, 신작로가 넓어지면서 같이 놀던 아이들은 어딘가로 이사를 갔다.


진종일 놀아도 '저녁을 먹어라'라고 불리지 않던 나는 숙제를 다하고 엄마 장사가 끝날 때까지 만화방에 갔다. 언니들은 6학년과 중학생이 되어 바빴다. 가끔 말을 걸어왔지만, 어린 동생을 깔보는 게 '넌 만화파고, 우리는 소설파'라는 듯 한자 투성이 책들을 흔들어 보였다. 오빠가 방문을 닫기 전에 본 책들은 그림이 하나도 없이 글자만 빽빽했는데, 그걸 재밌다고 하다니.


단골만화방에 주인이 바뀐다는 말이 들렸는데, 아주 예쁘게 생긴 서울아줌마였다. 엄마가 주시는 용돈으로 일주일에 한 번 만화방에 갔었는데, 그날은 기다리다 본 엄희자 만화가 정말 재미가 있어 눈물까지 흘리며 보고 있었다.


"너, 글자를 아니"

한다. 나에게 한 말인 줄도 모르고 만화에 빠졌 는데, 그 아줌마가 내 손을 잡았다.

"아까부터 봤는데, 아주 조그만 애가 웃었다가, 울었다가 해서 그런다."

"예, 3학년인데요."

하면서 고개를 들자, 들고 있던 고구마를 주시며

"참 집중을 잘하네. 너무 재밌게 봐서 그랬다."

고 했다. 마침 엄희자 만화책은 다 봤고, 밖은 깜깜했다. 옆에는 새로 들어온 민애니 만화가 보였다.

"오늘은 늦었으니 집에 가고 다음에 와서 봐라."

하신다."

인사를 하고 집에 오면서 목이 메는 고구마를 먹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는 용돈을 못 받아서 오래 그 만화방을 못 갔다.


중학생 언니의 심부름으로 국수를 사 오는데, 만화방 아줌마가 아기를 얼르고 있었다. 아기는 계속 칭얼댔고, 초보 엄마인 아줌마는 어쩔

몰라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저 가게에 가서 파 좀 사다 줄래?"

하며, 돈을 내밀었다.

자주 가는 큰점방은 우리 동네 백화점이었다.

쌀부터 온갖 것들을 팔아서 큰점방이었던 가게는

저녁 찬거리를 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파를 사서 만화방에 갖다 주고, 언니가 기다릴 국수를 들고 집에 왔더니, 언니는

"니, 또 만화방에 갔다 왔제."

한다. 늦었다는 말이었지만, 언니도 한때 만화광이었다.


서울아줌마는 내가 만화를 보러 가면 돈을 안 받고, 심부름을 시켰다. 그 대신 만화는 몇 권을

봐도 되었다. 아기는 자주 칭얼거렸고, 아줌마는

허둥대다 밥을 태우고, 넋이 나간 듯할 때가 많았다. 나는 4학년이 되었고, 아기는 돌을

지나 자박자박 걸었다. 5학년이 될 때쯤 아줌마는

친정 동네로 간다며 만화방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만화방에는 민애니나 엄희자보다 머시마들이 좋아하는 만화가 많아졌다. 5학년이 되자, 서울아줌마도 없고 취향이 다른 만화만 있는

만화방은 나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6학년이 되 었을 때는 4컷의 만화를 보는 아이들이 낯설었다.

한동안 읽기를 멈추었고, 중학생이 되었다.



어떻게 읽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손에 든 책은 펄벅의 대지였다. 그때 메뚜기떼가 마을을 휩쓸던

대목이 마음에 걸려 며칠을 밥도 못 먹었다. 주인공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주변의 이야기와 비교하면서 책을 읽었던 터라 책 읽기가 고역이었다.


대지 이후, 책을 읽을 때면 특정한 부분을 상상한다고 책 읽기가 쉽지 않았다. 대지는 아주 좋은 책이었지만, 한꺼번에 하늘을 뒤덮는 메뚜기처럼 자연에 대한 묘사가 많은 책은 읽기가 힘들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오빠가 TV를 사 왔다. 동물의 왕국과 자연 다큐 프로를 보면서 어떤 책이든 읽을 수 있었다. 그건 만화를 보며 익힌 감각이었다.



※ 청출어람이라고 했다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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