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만화로 배운 세상에 이어서
집 가까이 있는 도서관은 개관한 지 50년이 다 되어 시설이 많이 낡았다. 소장된 책들은 엄선에 엄선을 거듭한 좋은 책들인데, 사서들이 서가가 좁다고 책들을 숨도 못 쉬게 꽂아놓았다. 이러면 책도 상하고 이용하기는 불편하다.
어떤 책은 오래되었다고 서고에 있고, 큰 활자 책은 찾는 사람이 적다고 3층에 있다. 유독 빽빽히 꽂힌 책을 꺼내다 짜증을 내면서 발견한 책은, 의견이 분명하고 따뜻해서 좋아하는 기자가 쓴 책이다. 신문 기사도 기사지만, 몇 권의 책을 읽은 터라 열람실에서 읽다가 대출해 왔다.
<어릴 적 그 책>이라니. 제목도 제목이지만, 양장본에다 빨간 가름끈이 있다. 집에 가서 빨리 읽으려는 마음을 아는지, 마을버스가 멈추고
곧이어 집 앞으로 가는 환승버스도 왔다.
집에 와서 차분하게 책을 펼쳤는데,
<어릴 적 그 책>은 성장드라마였다. 기자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힘들 때, 기쁠 때, 머뭇거려질 때, 책을 읽게 된 계기 등의 개인사도 있지만, 또래들이 어렸을 때 읽고 손을 떠난 책을 찾는 모험담이랄까.
어떤 독자는 책을 읽고 나서 이런 푸념을 했다.
"기자의 학력, 직업, 외모도 부럽지만. 제일 부러운 건 '어릴 때 봤던 책 시리즈를 가지고 있는 것'"
이란 말에 찡했다.
<어릴 적 그 책>은
1장, 유년의 정원에 삶의 씨앗을 뿌리다.
2장. 그렇게 아이는 성장한다.
3장, 소녀는 이제 울지 않는다.
로 나뉘어 삶이라는 모험의 시작과 이어짐을
쓰고 있다.
한 아이가 태어나 글을 익히고, 자라고, 뜻을 펼치고, 부모를 떠나 타향에서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과 회한과 보이지 않는 차별과
맞서야 할까.
나는 나고 자란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지만,
딸은 타향에 뿌리를 내리려는 힘겨움을 아침에
한 시간여의 통화로 다 풀지는 못한다.
딸은 통화 중에 '청출어람'이라고 했다. 청출어람이라니.
부모를 앞서가는 것은 당연하고, 물 설고 낯선 이국의 시골에서 익힌 살아있는 경험까지 끌어와
사는 딸은 초등 3학년 때, 청출어람이 어떤 것인 지를 보여주었다.
유리그릇을 만지다 깼는데, 충분한 주의와 실내화를 신기고 나머지 뒷정리를 시켰다. 걸레로 바닥을 닦더니, 전날 가지고 놀던 풍선을 가져와서 바닥에 굴리는 게 아닌가. 그때 깨우쳤다. 딸의 의식범위를. 그때부터 한 사람으로 동등하게 대우했다.
나의 아이들은 어떤 책을 읽었을까.
딸은 엄마가 자신들이 어렸을 때, 도서관에
데리고 다닌 것과 이동도서관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동도서관 아동코너에는 유아교육과 교수가 자신의 아이를 키우면서 쓴 그림책이 있었다.
실생활을 그린 책으로, 화장실 이용과 밖에 나갈 때 어떤 신발을 신어야 하는지, 인사하는 법 등이 쓰인 책으로 잘 때도 안고 자던 책이었다. 빌리고, 또 빌려서 독점한다 싶을 때, 다른 아이들도 볼 수 있게 딴 책으로 빌려가자니까 한참 생각을 하더니,
그림이 예쁜 책을 집었다. 초등학생 때는 만화시리즈를 많이 봤지만, 내 눈에 그 시리즈는
진정한 만화가 아니었다. 그리고는 한우리 독서 회원이 되어서 단계별로 책을 읽었었지.
딸은 그런 단계를 거치게 했다고 고맙다고 한다.
통화 중의 청출어람은 다른 의미였지만, 딸은
여러 방면에서 엄마를 이끈다.
{책은 사람이 만들었지만, 책이 만든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을 실감한다.
나는 어릴 때 내 책이 없었다. 4 학년일 때 눈이 아파서 작은 수술을 했는데, 중학생인 언니가 심부름도 잘하고, 참기도 잘했다고 보수동 책방 골목에 데리고 가서 <사랑의 선물>이라는 책 한 권을 사주었다. 양장본에 가름끈이 있던 그 책은 내가 받은 첫선물인데도 언제,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마 오빠 방에 있던 책은 잘 챙기면서 돈이 조금 모이면 집수리를 자주 했던 탓이리라.
그 이후 내가 돈을 벌면서 책을 많이 샀다.
아무튼 <어릴 적 그 책>으로
나의 어린 시절과 아이들을 키우며 책으로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어서 고마웠다.
우리 집 아이들이 만든 첫 집은, 책을 세워서 만든 알록달록한 집이었다.
※ 청출어람의 뜻은 인터넷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