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증
아마 세상에서 가장 추잡한 건 나일 것이다.
아기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한 번 들어가 박히면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위험천만한 병균의 꽃을 입안에 지녔기에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가을이 오면 구내염이 심해진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입안에 염증이 자리 잡는다. 염증은 가을이 지나야 사라진다. 약도 먹어보고, 광고로 유명한 연고를 써 봐도 소용없다. 염증은 때가 지나야 사라진다. 내가 마스크를 착용하는 이유는 내 병균이 타인에게 옮길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난 사람들의 호흡이 좋다.
그녀도 남들처럼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먹던 음식에 함부로 젓가락질을 한다. 그녀는 내가 불쾌해한다고 생각한다. 뭐 어때? 나 좋아하는 거 맞아? 이런 질문을 해올 때면 난감하다. 오해를 풀고 싶지만 그 설명자체가 원죄처럼 느껴진다. 그 죄는 나에게만 해당되었으면 좋겠다. 그나마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위안 받을 수 있는 건, 옳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이들의 나약함이다. 내가 그녀와의 관계에서 진부한 쳇바퀴를 돌고 있는 것처럼 그들 역시 각자의 쳇바퀴를 돌고 있다. 그 쳇바퀴는 나약함이고 무력함이다. 그리고 그 해결책을 종교와 철학을 통해 구하고 있다.
까마득한 옛날에는 법이란 게 없었다고 한다.
역설 같지만 혼돈이라는 것이 사람 마음에 뿌리를 깊숙이 박고 있는 단단한 쇠기둥을 닮았다면, 이것은 결코 흩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쇠기둥이 한 번 흩어지면 법이라는 것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였을 것이다.
나는 그림을 좋아한다. 그녀는 그림에 관심이 없다. 그녀는 글을 좋아한다. 나는 글에 관심이 없다.
최초의 혼돈에 법이 생겨난다면 그 법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한번 그음에서 생겨날 것이다. 내가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언젠가 그녀와 함께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녀는 첫 문장에서 법이 생겨난다고 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아직까지는 헤어지지 못하고 만남을 지속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혼돈의 법을 세우는 그림의 첫 획도 마음에 따른 것이고 첫 문장도 마음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어떤 때는 마음의 명령 따위 일일이 다 따르고 싶지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부드럽고 유한, 소박한 그림을 좋아한다. 튀는 그림은 싫다. 그녀는 소박하다. 튀지 않는 옷을 즐겨 입고 늘 조용하다. 맑고 투명하고 따뜻한 눈은 까마득한 옛날 법이 없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혼돈이 없기에 불필요한 개칠을 하는 법도 없다. 그렇다고 판에 박힌 촌스러움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남의 기법을 따라하는 사람도 아니다. 평범하지만 신묘함이 서려 있고, 작은 도화지 위에 들판을 옮겨온 것처럼 단아하다.
이것은 겉모습일 뿐이다. 칸트의 말처럼 시간을 나의 의식의 내적 체험이라고 하고 공간을 외적 체험이라고 한다면, 내가 받는 그녀의 고운 마음은 시공이 하나로 융화된 완벽한 그림 그 자체이다. 푸른 바다의 전설과도 같은 파도의 흐름처럼, 산의 계곡을 따라 흐르는 이야기의 강물처럼 바다가 우리에게 어떤 영감을 준다면 산의 계곡 또한 그러하듯 그녀는 나에게 영감을 준다. 그녀의 내면은 아름답다. 층층이 펼쳐지는, 어머니를 닮은 완만한 산의 능선을 닮았다. 때론 기암절벽이 존재하고 내 입 속에 깊게 패인 가을의 꽃처럼, 그녀의 마음 속 한 편에도 깊게 패인 계곡이 있어 슬픈 산의 서리와 안개 이슬과 구름이 모여 그녀가 사랑하는 문장들을 따라 한 곳으로 귀결되기도 할 것이다. 그녀는 결국 바다다. 거대한 물결의 흐름을 나타내는 도화지 위의 바다일 수도 있고, 생명의 근원으로 진짜 살아 숨 쉬는 바다일 수도 있다.
거기에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하늘에 맹세코 그녀에게 상처를 줄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이 아주 많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들은 나의 첫 획을 지난 다음의 획들과 그녀의 첫 문장과 다음 문장들이 서로 엉키고 엉켜 하나로 융합된 엉킴의 세계를 이룬 하나의 작품과도 같을 것이다.
이 작품은 나도 싫고 그녀도 싫어한다. 그녀에게도 혼돈은 있을 것이다. 싫은 계절도 있겠지. 그녀의 혼돈은 무엇일까? 그녀를 향한 내 사랑이 언제까지 진부한 쳇바퀴를 도는 것처럼 겉만 맴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론 마음의 명령 따위 일일이 따르지 않고 그녀와 거친 사랑을 나누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아기 같다. 그리고 그녀는 비겁한 변명이라고 말했다.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
그녀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말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는 우리는 사내커플로 3년을 사귀고 있다. 결혼을 이야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가을이 오면 모든 것이 힘들어진다. 염증은 꽃이다. 독기가 잔뜩 오른 가을의 꽃이다.
아침저녁으로 시린 냉기가 옷 속으로 파고 들 때면 입안의 바이러스가 그 시린 냉기를 자양분 삼아 무럭무럭 꽃을 피우는 것만 같다. 내가 과연 누구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정도 되면 난 무척이나 이기적인 놈이다. 그녀를 보내주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 시린 가을의 꽃만 사라지면 그녀를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을의 꽃은 어김없이 또 찾아와 활짝 핀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