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검(快劍) #2

참교육의 시작

by 임경주

# 1화



때는 원이 망하고 명이 흥하던 시대다.

명나라 군대에 의해 원나라의 주력 군대가 궤멸되었다.

원나라의 재기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

영웅호걸들과 협객들도 사라졌다.

검을 버린 자, 이름을 버린 자, 은둔에 들어간 자.

정의를 자처하던 명문정파들 또한 변질되었다.

혼란의 시대였다.




매향루의 하루는 새벽 묘시(6시)부터 시작된다.

기생들의 하루 업무가 시작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새벽 늦게까지 손님을 상대한 어린 기생들은 피곤함은 둘째고 숙취로 인해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는 시간이다.

보통 매향루를 찾는 손님들은 오후 미정(2시)이 되어야 하나 둘 찾아온다.

어린 기생들은 늦어도 정오에는 기상해야 꽃단장을 끝내고 손님을 맞이할 수가 있다.

그러면 매향루 업주는 묘시부터 정오까지 12시간을 지각으로 잡고 이 시간을 임금에서 깐다.

붙잡혀 오고 팔려온 어린 기생들은 오후 2시부터 새벽 늦은 시간까지 술 취한 손님들을 상대하며 웃음을 팔아봐야 빚만 늘어나는 구조다.

아직 어린 나이들이고 예쁜 걸 좋아할 때이니 업주가 사다주는 비단 옷이라든지 장신구를 그저 좋아 덥석 받는다.

이 또한 다 갚아야 할 빚이다.

죽어라 일해봐야 오히려 빚만 늘어나면 업주는 얼씨구나 기생을 다른 기루에 팔아넘긴다. 얼굴이 반반하고 어리면 값이 더 매겨지는데 그 돈 또한 기생에게는 빚으로 잡힌다.

동서루, 천향각, 월영루, 만화정까지.

어린 기생들은 팔려 가는 횟수만큼 빚만 늘어난다.

더 이상 못하겠다고 반항하거나 도망치다가 붙잡히면 돌아오는 건 잔인한 채찍 고문 끝에 죽음이다.

그 죽음은 공개처형이다.

매향루 업주 진천은 폐가로 부하들을 보낸 뒤 도망쳤다가 다시 붙잡혀온 한 기생을 공개처형 했다.

“저런 년은 되파는 것보다 한번씩 본보기로 삼는 게 영업에 훨씬 이득입죠.”

“그렇지. 자네가 장사를 좀 할 줄 아네.”

남궁세가의 대공자 남궁휘가 팔각정에서 기생들을 양쪽 옆구리에 끼고 술을 받아 마시며 처형을 즐기고 있었다.

처형을 당한 기생은 연약한 등의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갔고 뼈가 드러난 채로 숨이 끊어졌다.




폐가 앞마당, 방금 전까지 시정잡배들이 기합과 동시에 비명을 내지르며 날아다니던 곳이다.

이제 기이한 정적만이 맴돌았다.

그 정적은 이내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고기 굽는 냄새로 채워졌다.

진천이 보낸 덩치 큰 부하들은 이제 무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지존보의 눈빛 한 번에 혼비백산하여, 어느새 앞치마라도 두른 듯 정성스럽게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한 명은 부지런히 부채질을 하며 불꽃을 살렸고, 다른 한 명은 인근 숲에서 잡아온 산토끼의 가죽을 벗겨 노릇하게 굽는다.

또 다른 무리는 폐가 안쪽의 먼지를 털어내고 지푸라기를 깔아 소녀가 누울 자리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봐, 너무 태우지 마. 아이가 먹을 거다.”

지존보의 무심한 한마디에 토끼를 굽던 거한의 손이 덜덜덜 떨렸다.

“걱정 마십시오, 형님! 겉은 바삭 속은 촉촉으로 모시겠습니다!”

지존보는 그 꼴이 우스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낡은 천으로 칭칭 감긴 자청보검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그저 신기하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지금 이 광경을 지켜본다.

“너, 이름이 뭐냐?”

“…설아예요. 백설아.”

소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지존보는 설아라는 이름을 입 안에서 낮게 읊조렸다.

“난 지존보다.”

“지존보요? 우와, 이름이 정말 강해 보여요! 꼭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사람 같아요.”

천진난만한 설아의 말에 지존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라니. 지키지 못한 아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보검을 묶은 매듭이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그때, 잘 구워진 토끼 뒷다리 하나가 설아의 코앞으로 내밀어졌다.

고기를 굽던 부하가 비굴할 정도로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아가씨. 어서 드셔 보십시오. 아주 맛있는 산토끼입니다요.”

설아는 지존보의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얼른 다리를 받아 들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살코기를 한 입 베어 문 설아의 얼굴에 처음으로 환한 꽃이 피었다.

“맛있어요! 무사님도 드세요.”

설아가 살점을 발라 지존보에게 건넸다.

지존보가 설아가 건넨 고기를 씹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와 반역의 소용돌이 속에서 잊고 지냈던, 따뜻한 음식의 온기가 입안 가득 퍼졌다.

한편, 매향루의 주인 진천은 초조하게 발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보낸 부하들이 함흥차사다.

“이것들이 떠돌이랑 고아 하나 잡아오는 데 무슨 천 년이 걸려?”

결국 참다못한 진천이 직접 폐가로 향했다.

소림사에서 파계 당했지만, 그의 금강불괴(金剛不壞) 무공은 자부심 그 자체였다.

칼날도 튕겨내고 화살도 뚫지 못하는 몸을 가진 그가 직접 나선다면 상황은 종료될 터였다.

하지만 폐가에 도착한 진천이 본 광경은 가관이었다.

자신의 정예 부하들이 앞치마를 두른 채 “더 드십시오, 아가씨!” 라며 재롱을 떨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이 천치 같은 놈들이 지금 뭐 하는 거냐!”

진천이 사자후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그의 온몸이 구릿빛으로 빛나며 금강석처럼 단단해졌다.

하지만 지존보는 일어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자청보검의 검병을 쥔 채, 앉은 자세 그대로 검을 뻗었다.

빡-!

금강불괴라 호언장담하던 진천의 정강이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끄아아악!”

철벽같다던 그의 몸도 지존보의 정교한 혈도 공격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지존보는 보검을 뽑지도 않았다.

그저 헝겊에 싸인 검 집 끝으로 진천의 급소 몇 군데를 툭툭 건드렸을 뿐이다.

잠시 후, 진천은 모추용보다 더 처참한 꼴이 되어 매향루로 기어 들어왔다.

얼굴은 멧돼지에게 짓밟힌 듯 엉망이었고, 소림의 비기라는 금강불괴는 온데간데없이 온몸에 시퍼런 멍이 가득했다.


매향루 상층의 화려한 밀실.

남궁세가의 장남이자 대공자인 남궁휘가 술을 마시고 있다.

“진 주인, 그 꼴은 뭔가? 어느 개한테 물렸기에 소림의 무공이 비빔밥이 되었나?”

진천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울먹였다.

“대공자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놈은 사람이 아닙니다. 검을 뽑지도 않고 저를… 저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 검을 볼 줄 아는 자가 말하길 그 검이 자청보검이라는데 아무튼 분명 예사 놈이 아닙니다!”

남궁휘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피 냄새를 즐기는 자다.

지루하던 차에 나타난 강자의 소식은 그의 살인귀 본능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자청보검이라… 이름은 들어본 것 같군. 검을 뽑지도 않는 무사라니, 흥미롭네.”

남궁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등 뒤에 매여 있는 검에서 서늘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가자. 끄응, 내 직접 봐야겠어. 참으로 피곤하군.”

“죄송합니다 대공자님! 하지만 그놈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라...”

“닥쳐라.”

남궁휘의 손가락이 가볍게 튕겨졌다.

술잔 속에 있던 술이 떠올라 화살처럼 날아가 진천의 뺨을 스치며 깊은 자상을 남겼다.

진천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었다.

“내가 직접 움직이는 건 격이 떨어지는 일이긴 하지. 하지만 자청보검이라. 혹시 아나? 그 검은 우리 남궁세가의 보물 창고에 어울리는 물건일지. 그리고 그 계집애... 북방에서 온 생존자라고 했나?”

남궁휘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걸렸다.

“북방의 정보를 가진 아이를 정파의 이름으로 구조해서, 우리 지하 감옥에 가두고 정보를 짜내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길 수 있겠군. 그 과정에서 떠돌이 무사 하나쯤은 유괴범으로 몰아 처단하면 그만이고.”

“네, 네”

진천이 무릎을 꿇은 채로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폐가.

설아가 지존보의 무릎 근처에서 곤히 잠들어 있다.

지존보는 타오르는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천의 부하들은 이미 겁에 질려 멀찌감치 떨어져 덜덜 떨며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그때, 밤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산들바람이 불어오던 숲에서 갑자기 벌레 소리가 끊겼다.

지존보의 눈이 번뜩이며 자청보검의 검병을 움켜쥐었다.

“나와라. 정파의 향취를 풍기며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어둠 속에서 흰 옷을 입은 무사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남궁세가의 정예로 구성된 청운검대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남궁휘가 화려한 부채를 접으며 걸어 나왔다.

“허허, 귀신같은 감각이군. 과연 보검의 주인답소.”

남궁휘는 잠든 설아를 슬쩍 훑어보더니 비릿하게 웃었다.

“나는 남궁세가의 남궁휘라고 하오. 그 아이는 우리 가문에서 찾고 있던 실종된 양가댁 규수라는 제보가 있어서 말이오. 유괴범인 귀하를 체포하고 아이를 보호하러 왔으니, 순순히 검을 내놓고 무릎을 꿇으시지.”

지존보는 헛웃음이 나왔다.

명문정파의 대공자라는 자가 입을 열자마자 내뱉는 것이 새빨간 거짓말과 탐욕이라니.

“양가댁 규수라... 이 아이는 북방 오랑캐에게 부모를 잃은 고아다. 남궁세가의 눈에는 아이의 눈물보다 검의 광채가 더 잘 보이는 모양이군.”

“거? 참, 말이 많군. 정파의 명을 거역하는 것은 곧 마교의 무리라는 증거! 여봐라, 저 유괴범을 처단하고 아이를 구하라!”

“그래! 이 자식아! 넌 이제 죽은 목숨이다!”

진천이 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용기를 내어 말하고는 다시 숨었다.

남궁휘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청운검대의 검들이 일제히 지존보를 향해 쏟아졌다.

지존보는 일어남과 동시에 설아가 곤히 잠든 모습을 내려 보았다.

아이가 비명 소리에 깨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지존보는 여전히 검을 뽑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에 묶인 자청보검이 어둠 속에서 보랏빛 잔상을 남기며 휘둘러졌다.

깡!

소리와 함께 검이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날아가 버린다.

순식간에 검을 놓친 청운검대 대장 송철의 두눈이 휘둥그레졌다.

엄청난 힘이다.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고 싶다.

고수다. 아니 그 이상이다.

이건 그냥 아이와 어른의 싸움이었다.

꿀꺽.

긴장한 탓에 침이 저절로 삼켜졌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유괴범이라는 저 떠돌이 무사는 살기가 없다. 청운검대를 상대로 체면을 살려주며 하나 둘 제압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봐, 손목이 너무 높잖아. 자네는 발위치가 잘못됐고.”

뽑지도 않은 검으로 탁탁 처가며 자세를 교정까지 해준다.

남궁휘의 표정을 보아하니 어이를 상실했다. 무적의 청운검대가 떠돌이 무사 따위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어?

“가라. 돌아가라. 명문정파의 검대들이여. 그대들은 협객이 아닌가?”

무거운 질문이었다.

대답조차 할 수가 없었다. 송철은 무력감에 사로 잡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병신들!”

결국 참다못한 남궁휘가 나섰다.

부채를 암기처럼 지존보의 얼굴을 향해 날린 뒤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남궁휘의 손이 딱 멈춰 있다.

검로가 막혔다.

부채에 의해 손등이 지그시 눌린 상태로 온 몸이 굳어 버렸다.

소름이 돋아났다.

굉장한 힘이다.

도대체 무슨 심법에 어떤 내공을 지녔기에 나 남궁휘가 이토록 무력하단 말인가!

먼저 부채를 눈앞에서 붙잡고 단 일보로 거리를 좁혀들어 온 지존보의 신묘한 움직임에 깜짝 놀랐다.

저 정도의 이형환위는 절대고수의 것이다.

두 눈으로 직접 보아서 안다.

아버지 남궁혁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검성의 움직임!

그것보다 더 빠르다.

“익! 이익!”

남궁휘가 안간힘을 쓰다가 보법을 펼쳐 빠져 나가려 하지만 상대의 보법이 더 빠르다.

어느 쪽으로 움직여도 꽉 막혀 있다.

남궁휘가 다시 안간힘을 썼다. 그 때다.

“뽑지 마라. 죽는다.”

귓속을 파고 들어와 뇌를 뒤흔드는 낮은 목소리.

무섭다.

찔끔 오줌을 지려버렸다.

퍽.

상대방의 가벼운 발길질에 남궁휘는 발라당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오줌? 저거 오줌 맞아?”

“지린 거야?”

진천의 부하들이 남궁휘의 소중한 곳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곤거린다.

“하하, 하하하하.”

남궁휘가 재빨리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뭐 어때? 하는 척 하고 있지만 이미 쪽 팔릴 대로 쪽팔리고 자존심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단정한 머리도 한쪽이 풀어져 꼴이 말이 아니다.

“놈!”

출수.

남궁휘가 분노를 이겨내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드는 그 때다.

퍼억.

지존보의 발차기 한방에 남궁휘의 몸이 기억자로 꺾여 날아가 나무를 통째로 부러뜨리고는 바닥을 몇 바퀴나 구르고는 멈췄다.

“너… 너, 이놈…”

남궁휘가 겨우 고개를 들고는 지존보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지만 그대로 의식을 잃고는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고 말았다.

“으… 으으.”

옆에서 쭉 지켜보고 있었던 진천이 뒷걸음질을 치다가 발을 헛디뎌 나자빠지고 있었다.

다시 재빨리 일어나 죽을힘을 다해 도망친다.

청운검대 송철이 신형을 날려 남궁휘를 흔들어 깨우고는 일으켜 세워주었다.

“너 이놈! 이 마교 놈아! 너 거기서 기다려. 딱 기다려! 너 두고 보자 이놈아!”

남궁휘도 절뚝거리며 내뺄 준비를 한다.

꼴에 두고 보자며 소리를 바락바락 내지르더니, 꽁무니를 빼며 도망치는데 그 모습을 보며 진천의 부하들이 또 고자질을 시작했다.

“보셨죠? 저 새끼 저거 진짜 아주 악질입니다요.”

매향루와 관련된 진천과 남궁휘의 모든 악행을 조잘조잘 또 일러바치는 것이다.

사실 남궁휘가 이곳에 나타나기 전, 진천이 얻어맞고 도망칠 때 남궁세가 대공자를 데리고 올 거라며 남궁휘의 모든 악행을 일러바친 녀석들이다.

근데 또 이르고 있다.

“제가 그렇게도 좋아했던 애월이도 저놈들 손에…”

덩치가 산만한 녀석이 꺼이꺼이 하는 그 때다.

“너희들은 안가냐?”

“네?”

지존보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진천의 부하 네 명이 재빨리 무릎을 꿇으며 제발 제자로 거둬달란다.

또 빡! 하는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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