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연애에 서툰 두 사람
위소는 홍사범이 말한 자신의 길을 돌아보았다.
뒤돌아선 아파트 입구. 저곳이 과연 나의 길일까?
저곳에는 피아노가 있고, 기무라란코도 있다.
위소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밤거리를 걸었다.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쇼윈도에 비친, 깡마르고 불쌍한 모습.
어느새 변해버린 독기어린 눈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거리에 울려 퍼지는 슬픈 유행가.
한참을 걷던 위소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남성복가게 앞이었다. 덩치가 표관장을 닮은 마네킹들이 멋지고 세련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순간, 마네킹이 아빠로 보였다. 낡고 헐은 양복 한 벌로 평생을 사셨던 아빠. 자신에게는 대회준비다 뭐다 해서 수십 벌의 정장을 사주셨던 아빠. 그리고 창가에서 낡은 양복의 먼지를 털어내던 표관장의 모습.
위소는 얼떨결에 들어갔다. 양복을 사들고 나왔을 때는 내가 뭔 짓을 한 거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위소는 기무라란코가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점점 적응해나갔다.
기무라란코라는 소녀는 굉장히 밝고, 위소를 대하는 것이 정성도 그런 정성이 없었다. 재채기만 안 한다면 금상첨화였다.
홍사범도 찾아오지 않은 어느 날, 기무라란코는 소포물을 받아보고 좋아하고 있었다. 페덱스를 통해 일본에서 날아온 옷들이었다. 정확하게는 코스튬이었다.
메이드의상부터 시작해서, 바니 걸, 채찍 맞는 고양이복장……. 세일러교복, 섹시한 간호사복까지.
“위짜아앙! 기대하십쇼! 짜잔!”
기무라란코는 위소 앞에서 옷을 전부다 갈아입으며 코스튬을 펼쳤다.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나오면 바니 걸이 되어 짠! 하고 등장했고, 메이드가 되어 나타났으며, 채찍 맞는 고양이가 되어 엉덩이 솜 꼬리를 흔들며 교태를 부렸다.
“호호호호! 위짱! 넋이 나갔습니다!”
위소는 충격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섹시한 간호사복 다음에, 세일러교복에서는 가슴이 쿵쾅! 거릴 지경이었다.
위소는 얼굴이 발개졌다.
“위짱, 얼굴이 발개졌습니다! 호호호호!”
기무라란코는 위소 앞으로 다가와(세일러교복을 입고서)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만져주었다. 그 때, 앞가리개를 하지 않아, 가슴이 보였다. 위소는 눈을 질금 감고 말았다.
“자, 코스튬은 이정도만 하고.”
위소는 란코 몰래 숨을 헐떡거렸다. 그래도 진정이 되지 않자, 베란다로 나가 숨을 돌렸다.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라고 생각하는 그 때, 기무라란코는 007가방을 열어 보이며 말했다. 007가방에는 권총형주사기와 약병이 담겨져 있었다. 약병에는 아무 것도 붙어있지 않았다.
“페노메논웨이브연구소에서 완성한 체력증강제라고 합니다. 고농축이며 부작용이 전혀 없으니, 한 번 사용해보는 것도 괜찮으실 겁니다.”
“검증이 된 건가?”
위소는 약물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아, 시판을 앞두고 있다고 합니다.”
“검증이 된 거냐고.”
위소는 그것이 독약 같았다.
“독약 아니야?”
“호호호!”
기무라란코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웃는 동안, 재채기를 연속 세 번 했다.
“흠흠, 아 콧물 나와. 제가 위짱에게 독약을 주사하겠습니까? 이미 검증이 끝났고, 다음 달부터 시판에 들어가는 정상적인 제품이랍니다. 제품 이름이……. ‘우화등선’ 이랍니다.”
우화등선이라, 위소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기무라란코의 정성이 갸륵해 어깨를 내밀었다. 푸슝, 소리와 함께 주사액이 혈관 속으로 파고들었다. 위소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렇지도 않은데?”
“체력증강제이니, 특별한 몸의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기무라란코는 항상 그래왔듯이 노트북을 꺼내 무엇인가를 작성했다.
“그건 뭐하는 거야? 누가 보는 거야?”
위소가 물었다.
“위짱의 체력증진프로그램관련 모든 사항은, 제 박사과정 논문자료로 사용될 것입니다.”
기무라란코는 또 다른 가방에서 장비를 꺼냈다. 뇌파를 측정하는 휴대용장비였다.
“위짱의 뇌파가 알파파로 바뀌어야 합니다.”
모니터에 그래프가 그려졌지만, 알파파와는 전혀 상관없는 베타파를 그리고 있었다. 기무라란코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실망한 것 같네.”
기무라란코는 화들짝 놀라, 위소를 바라보았다.
“제 표정이 그렇습니까?”
“응.”
“아닙니다. 실망은요. 인간의 뇌파가 알파파를 유지한다는 것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근데 혹시, 나에게 뭐 숨기는 것 있어?”
기무라란코는 또 다시 놀라 얼굴이 붉어졌다.
“아닙니다. 숨기는 것이라뇨?”
“뭘 그리 놀래? 아님 말지.”
위소는 란코의 큰 여행가방을 보았다.
“난 이 가방 안에 레고가 잔뜩 담겨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 헌데, 이런 첨단장비에 의료기구들이라니.”
“제가 어린 아이입니까. 아직도 레고 가지고 놀게.”
“3년 전까지 가지고 놀더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거 있잖아. 운동장에 탑 세우다가 실패하던데…….”
“위짱, TV보셨습니까?”
“응.”
“저도 위짱을 TV에서 보았습니다.”
“뭐?”
“예술의 전당에서 피아노 치는 거 말입니다.”
“아…….”
위소는 그날이 그리웠다.
“사실, 저 기무라란코 그 때 위짜아아앙! 에게 반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얘기를 듣고, 얼마나 기뻤던지. 위짱과 함께 하는 6개월 기무라란코 정말 즐겁습니다!”
기무라란코는 얼굴이 발개졌다. 진심은 진심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위소는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위소는 의문이 있었다. 뇌파를 측정할 때 기무라란코의 행동이 이상했음을 확신했다. 또 모추용과는 어떤 관계일까? 모추용이 왜 자신을 신경 쓰는 것일까, 라이벌이 키우는 제자라서 그러는 것일까? 위소는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위짜아앙!”
기무라란코는 코맹맹이소리로 애교를 섞어 위소를 불렀다.
“왜?”
“피아노 한 번만 쳐 주십쇼!”
“싫어.”
“아잉, 저는 위짱을 위해 코스튬까지 펼쳤잖습니까.”
위소는 할말이 없었다.
기무라란코는 위소의 팔을 붙잡고, 어린아이처럼 졸라대더니 재채기를 1시간 동안이나 계속 해댔다.
“자기 몸도 어떻게 못 하면서…….”
위소는 훌쩍거리는 란코가 안쓰러웠다.
“저기, 란코상?”
“하이?”
“사실, 우리는 아주 오래 전에도 만난 적이 있는데.”
기무라란코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가 여섯 살 때였어. 영국 멘사 모임에 초대되었을 때…….”
“에, 에취! 아, 위짱. 감기가 심해서 못 견디겠습니다. 옷 갈아입으면서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저 먼저 들어가 자겠습니다.”
란코는 코를 훌쩍이며, 방으로 건너 가버렸다. 위소는 말하다 말고, 무안해졌다.
란코가 방문을 닫자, 위소는 거실에 혼자 남아 피아노덮개를 어루만졌다. 덮개만 열면, 열 손가락이 폭풍처럼 건반을 휩쓸 것만 같았다. 동시에 망치에 얻어맞던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의 비명소리도…….
위소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들어가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 안에서 만지작거리는 것은 자신의 성기였다. 세일러교복, 섹시한 간호사복, 바니 걸 망사 스타킹과 엉덩이 솜뭉치 꼬리, 채찍 맞는 고양이……. 멋진 코스튬을 펼치던 란코의 환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세일러교복 사이로 보이던 하얀 젖가슴.
“에이!”
위소는 베개에 코를 묻고 잠을 청했다. 성기가 딱딱해져서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늦은 밤, 기무라란코는 재채기를 연신해대며, 노트북에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실험대상, ‘게슈탈트’에 의한 부작용으로 뇌파가 불안정하고 분열증상은 보이지만 폭주가능성은 제로. 확인결과, ‘게슈탈트’ 는 활동하지 않고 있음-
기무라란코는 파일을 전송했다. 위소의 뇌파측정파일이었다.
위소는 기무라란코라는 소녀의 모든 것이 다 궁금했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위소는 용기를 내어 기무라란코가 지내고 있는 방문을 노크했다.
“저기, 란코상?”
“하이?”
문을 열자 노트북 앞에서 일하고 있는 란코가 위소를 반겼다.
“드라이브 갈래?”
기무라란코의 얼굴이 환해졌다.
“좋습니다!”
란코는 노트북을 덮었다. 밤 10시, 위소는 자전거바퀴에 바람을 잔뜩 넣었다.
금세라도 별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맑은 밤하늘 아래, 위소는 기무라란코를 태우고 차가운 강바람을 가르며 자전거페달을 밟았다. 위소와 란코는 반포대교교량분수에 도착했다.
“자, 다 왔어.”
기무라란코는 자전거에서 내리며 얼굴이 환해졌다. 교량분수에서 뿜어내는 야간 분수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위소는 이곳이 좋았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비행기가 날고 있었다. 순간, 고무동력비행기를 조립해 날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듭이 다섯 번 감길 때까지 감아 날리는 거야? 알았지? 어설픈 추진력은 양력에 무리를 주지만, 강력한 추진력은 모든 것을 다 극복할 거야.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말대로 -물리적으로 말도 안 되지만-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추락했을까? 날아올랐을까? 위소는 아빠에게 했던 거짓말 때문에 괴로웠다. 그 거짓말이 영원히 묻혀버려 더욱 더 가슴이 아렸다. 몇 번이고 사실을 고백하려했었지만, -아주 작은 용기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하질 못했다.
밤공기는 쌀쌀했다. 란코의 감기가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강변 밤공기는 너무도 상쾌했다.
“달지 않아?”
“네?”
란코는 위소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차가운 공기는 정말 달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찬 공기는 시원하다 못해 설탕처럼 달았다.
“저 쪽으로 가자. 다시 타.”
위소는 란코를 다시 태우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기무라란코는 위소의 허리를 꼭 잡고 등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뒤에 자동차가 많은 곳에서, 위소는 멈추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때? 좋지?”
“네, 좋습니다. 너무너무 좋습니다.”
달빛과 별빛을 담고 유유히 흐르는 한강. 강변카페에서 쏟아내는 네온사인까지 반사해 더욱 더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위치한 5층 러브호텔 네온사인까지도 강물 따라 흐른다.
교량분수 뒤편, 이곳을 찾는 연인들은 러브호텔에 가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강변, 카페에서 맞은 편 한적한 자리, 즉 위소와 란코가 자전거를 뒤로 하고 나란히 앉아 있는 곳은 낚시꾼들도 자리를 펴지 않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일명, 차 안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장소라고나 할까…….
그러나 기무라란코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위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옆에 주차되어있는 차안이 왜 습기로 가득한지, 멀쩡하게 잘 주차되어있는 차가 왜 흔들리고 있는지……. 두 사람은 전혀 몰랐다.
기무라란코는 그저 아무런 말없이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며 연신 한숨만 쉬어댔다.
“왜 그렇게 한숨을 푹푹 내쉬어?”
“네, 네에?”
뭐, 훔쳐 먹다가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란코였다.
‘위짱바보, 여자는 안기고 싶으면 이러는 거야. 후우!’
위소는 기무라란코의 옆모습을 보았다.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소는 확 안아버리고 싶었다.
란코는 위소의 속도 모르고,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했다.
“한국 사람들, 시민정신이 낮습니다. 코푼 휴지를 여기다 버렸습니다. 이렇게 시민정신이 낮아서야 되겠습니까? 어, 여기도 있습니다.”
“여기도 있네.”
위소는 그 화장지의 정체를 모르기에, 발아래 화장지를 발로 툭 건드리며 란코의 말에 장단을 맞추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도 하얀 휴지, 저기도 하얀 휴지. 위소와 란코를 중심으로 목련이 떨어진 것처럼, 사방에 버려진 휴지들이 많았다. 마치, 란코의 말처럼……. 코를 풀고 버린 것처럼 말이다.
마침, 옆에 주차되어있는 차가 더욱 심하게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꿀꺽.
위소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무안할 정도로 크게 들렸다. 이제야 눈치를 챈 것이었다. 위소는 난감하고 민망해서, 반대로 고개를 돌려 먼 곳만 바라보았다. 란코는 아무 것도 모르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런데, 뒤에서 창문이 징하고 열리더니, 란코의 머리 위로 휴지를 내던졌다.
“어머, 난 몰라. 자기야 사람 있었어.”
여자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란코가 머리 위의 화장지를 손으로 잡는 순간, 부앙! 하고 도망치듯 사라져버리는 승용차.
“…….”
“…….”
란코도 이제야 눈치를 챘다. 위소는 미안해졌다. 란코는 하얀 휴지를,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불결한 세균덩어리처럼- 두 손가락 끝으로 겨우 잡아 코로 가져가다가, 휙! 하고 멀리 내던져 버렸다.
“…….”
“…….”
침묵 가운데 란코의 숨소리가 유난히 거칠게 들려왔다.
“집에 갈까?”
“후우! 아니, 아닙니다.”
“…….”
오랜 시간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 오고갔다.
“춥다…….”
“추워?”
“네, 춥습니다. 에, 에취!”
위소는 꼼짝하지 못했다. 이 일본여자를 안고 싶었다. 정말 안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순간, 홍사범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닌 게 아니라, 홍사범이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위소와 란코는 알 리가 없었다.
“위짜앙. 위짱은 죽음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무라란코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 슬펐다. 위소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죽음은 잔인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저는 두려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죽음은 두려운 것입니다.”
“왜?”
“모르니까요. 죽음이 뭔지 알면, 전 죽을 수 있습니다. 모르니까, 죽음이 뭔지 모르니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 말이 어딨어.”
“위짱은 두렵지 않습니까?”
“난 죽는 거 두렵지 않아. 어설프게 살아있는 지금이 더 두려워.”
“음, 그럼 저 대신 죽어줄 수 있습니까?”
“으, 으응? 누가 괴롭혀?”
“호호호! 아니, 아닙니다.”
“누가 괴롭히면 말만해. 확, 혼내줄게.”
“말이라도 감사합니다.”
기무라란코는 위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위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홍사범에게 기습키스를 당했던 때가 생각났다. 위소는 기무라란코에게 기습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만 있다가,
“저기, 란코상.”
하고 위소가 불렀다.
“하이.”
하며 기무라란코가 고개를 들어 올릴 때, 위소는 에라 모르겠다! 입술을 날렸다. 그러나 입술은 입술에 포개지지 않고, 턱을 찍었다.
기무라란코는 위소의 돌발행동에 깜짝 놀라 얼굴이 빨개졌다. 위소는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 아무리 머리가 성숙한 천재소년소녀라지만, 감성은 제자리. 아직은 연애에 서툰 두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