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소 #17

#17 화이트 브레인

by 임경주

이것은 운명을 거부하고,

돌파구를 원하는 한 인간의 희망에 대한 기록이다.


-애브젝트 7도, ‘위소(危巢)’에 관한 보고서 중에서-

토요일 늦은 밤, 11시 30분.

박태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뜻하지 않았던 전화였다.

“아 다른 게 아니라, 도장 열쇠 가지고 있지? 뭘 두고 와서.”

“내일 저 도장에 나갈 건데요?”

“아, 조금 급한 거라. 지금 집 앞이니까 잠깐 내려와. 금방 다녀와서 돌려줄게.”

“네, 알았어요.”

위소는 도장 열쇠가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서슴없이 건네주었다.

12시 20분.

손전등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빛은 레이저처럼 도장 구석구석을 비춘다. 박태일은 관장실로 향했다. 중국인들에게 건네받은 낡은 나무상자가 몹시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태일은 그것이 ‘나선문’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인간의 호기심은 죄가 아니라지만, 태일은 분명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중이었다. 위소에게 밀리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태일은 관장실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뒤돌아, 현관문을 비추어 잘 잠겨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관장실 앞에 섰다.

이제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태일의 양심은, 지금이라도 문을 돌리면 관장실문이 잠가져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관장실문은 열려 있었다.

“하아…”

손전등이 관장실 안을 비춘다. 쉼 호흡과 함께 태일은 안으로 들어섰다. 표관장의 오래된 사진들이 손전등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죄송합니다.’

손전등의 불빛은 다시 책상 위의 기념패들로 멈추었다. 후, 하고 불자 수북이 쌓인 먼지들이 날렸다. 한줄기 빛 속에서 보석처럼 빛을 뿜어낸다.

<서울 동부경찰서 검도특별지도 사범위촉패>

<서울 동부경찰서 감사패 직원일동>

<서울 우송고등학교 검도부 감독감사패>

<진검도대회 1회 개인전 우승>

<진검도대회 단체전 준우승>

태일은 기념패들과 우승트로피들을 하나씩 눈 여겨 보며 추억과 함께 표관장의 위대함을 실감하고 있었다. 진검도대회 1회에서 우승메달을 차지한 사람이 바로 표운삼관장이었다.

‘그냥, 나가자…’

태일의 양심이 그를 막았다. 돌아서는 순간, 양도정이라는 중국인노부부와 표관장의 대화가 떠올랐다.

‘나선력’에 관한 무엇인가가, 틀림없이 여기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태일은 관장실에서 고개를 내밀어 잘 잠겨있는 정문에 손전등을 비추어, 잠겨 있는 것을 또 확인했다.

드르륵, 불빛이 책상서랍을 하나씩 뒤지기 시작했다. 죄스러운 마음이 또 일어났다. 그 누가 그랬던가, 양심은 논리의 전개과정과도 같아 있으나마나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그런 궤변 따위……. 도둑놈도 아니고…’

서랍 안은 잡다한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정리 좀 하시지는…’

서랍을 모두 뒤진 태일은 허탈했다.

‘진짜 나가자.’

돌아서는데, 손전등은 의자 뒤의 캐비닛(철장)을 비춘다.

“이익!”

태일은 문을 열어보았다. 캐비닛은 잠기어 있었다.

“에이…”

토요일일요일도 꼼짝 말고 수련해라. 자 이 열쇠를 줄 테니 복사해 오너라.

태일은 표관장이 위소에게 키를 건네주던 순간이 떠올랐다. 순간, 표관장의 손에서 찰랑거리던 열쇠꾸러미 중에서 작은 키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거야!”

‘예비키가 또 있을 텐데…….’

순간, 책상 위 연필꽂이가 손전등에 붙잡혔다.

태일은 그것을 뒤지다가, 급한 마음에 아예 뒤집어엎었다.

뚜껑이 없는 매직과 오래된 볼펜들 그리고 손톱깎이와 작은 드라이버가 왕창 쏟아졌고, 그 사이로 먼지와 국적불명의 동전 한 개가 빠져 나왔다.

태일은 동전 구르는 소리에도 놀랐다. 바로 그 때 작은 열쇠 하나가 마지막으로 떨어졌다.

“이거다! 있다!”

태일은 잠시 망설였다가, 캐비닛을 열었다.

귀를 자극하는 마찰음과 함께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태일은 제일 먼저 캐비닛이 4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중 세 번째 칸에는 여러 개의 봉투들이 쌓여 있었다.

수련생들의 관비였다.

‘건물 임대료를 지불하고 있기나 한 거야…….’

제일 위 칸에는 도복이 몇 벌 잘 정돈되어 있었고, 두 번째 칸에는 수십 권의 서적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혹시, 이건가?’

태일은 서적들을 통째로 내려 한 권씩 훑어보기 시작했다.

<조선세법>

<본국검법>

<검도총서>

<검도교본>

<유소년 검도 지도요령>

<검도입문>

<기초검도>

<실전검도교실>

그리고 나머지 책들은 한국검도협회 간행물이었다.

“뭐야…….”

태일이 원하는 ‘나선력’에 관한 서적은 단 한 권도 없었다. 서적들을 정리해 들고 일어서는 순간, 맨 아래 칸을 차지하고 있는 낡은 나무상자를 발견했다. 손전등이 뿜어내는 빛은 그곳에 고정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래, 이거야…”

태일은 그 나무상자를 비추고 있는 손전등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했다. 서적들을 원위치 한 다음 상자를 빼냈다.

“잠겨있네…….”

나무상자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상자에 비해 굉장히 큰 자물쇠였다.

“흠흠! 향기 좋은데.”

상자에서는 향나무 향기가 풍겨 나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열어…….’

몇 분이 지나갔을까? 호기심은 죄가 아니라고 했다. 태일은 드라이버를 사용해 장석자체를 뜯어내고 싶었다.

‘잠깐… 뒤에도 장석이 있겠지?’

태일은 상자 뒤를 돌려보았다. 손전등을 비춰보니, 역시 두개의 장석이 고정되어 있었다.

‘옳지!'

상자 뒤편, 두개의 장석은 세월의 흐름 따라 몇 번 손을 본 흔적이 역력했다.

‘한강에 배지나간다고 흔적이 남아?’

태일은 연필꽂이에서 드라이버를 꺼내, 나사를 풀어 장석을 통째로 빼냈다. 자물쇠가 채워진 앞 장석이 상하지 않게, 아주 조금 사이를 벌려 틈새로 내용물들을 비추어 보았다. 역시 예감이 적중했다. 낡은 서적들이었다.

태일은 하나씩 잡아 뺐다.

“아!”

태일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상자에서 뺀 낡은 서적들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국보급자료였다.

그 위에는 -애브젝트 0도 오리엔탈일급자료- 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태일은 마음이 급했다. 서적을 뒤지기 시작했다.

-백뇌기록지(白腦記錄誌)-

태일은 손전등을 입에 물고, 첫 장을 넘겨보았다. 한자와 한글이 병행으로 기록되어 있어 읽을 수가 없었다. 시계를 보았다.

새벽 12시 40분.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표관장이 온다면, 큰일이었다. 태일은 망설였다. 이대로 덮느냐, 아니면 대충이라도 훑어보느냐. 태일은 궁금증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읽을 수가 없어 그대로 덮으려고 하는데, 뒤에 붙어 있는 또 다른 책이 있었다. 태일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한글 번역본이었다.

태일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읽어 내려갔다.

<나 김석돌은 조선인이다.

내 나이 열세 살, 임진년에 일어난 왜란으로 남원성전투에서 부모를 잃고 사쓰마 번에 끌려와 영주(領主) 시마즈가문의 가신(家臣) 도고 시게타메의 개인시종이 되었다.

나의 고향은 전라도 남원이며, 내 아버지는 조선의 도공이었다.

난 매일을 나의 고향을 생각한다…….>

“김석돌?”

글을 작성한 김석돌이라는 사람은, 고향에 대한 향수로 첫 장 지면을 가득 채워놓았다.

태일은 시간을 건너 뛰어, 김석돌이라는 사람과 만나고 있었다. 한참을 읽어 내려가던 중 매우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그 누구도 시게타메님을 이기는 자가 없었다.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8척 장신의 거대한 몸으로 빠르기도 빨랐으며 그 힘은 실로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시게타메님이 가진 힘의 깊이는 그 누구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중략)

후쿠시마의 무사 한 명이 시게타메님에게 도전을 해 왔다. 그는 슌이치라는 자로 나이가 오십 세였다.

후쿠시마 가문은 시게타메님이 모시는 사쓰마의 영주 시마즈가문과 적대적인 위치에 있었다.

시마즈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셨고, 후쿠시마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반기를 들고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합류된 가문이었다.

슌이치라는 무사는 칼솜씨가 높다고 소문이 난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칼은 시게타메님의 한 칼에 부러져 나갔고, 쇠테가 이마에 박혀 즉사해 버렸다.

그 순간, 뜻밖의 일이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졌다.

그 결투를 지켜보던 그의 아들 가쓰라와가 부러진 칼을 집어 들고 미친 듯이 시게타메님에게 덤벼들었는데, 시게타메님의 내려치기를 막아내고 역습을 감행하여 오히려 시게타메님을 궁지로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시게타메님의 다섯 번째 격에 가쓰라와는 아버지 슌이치와 같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후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가쓰라와는 아버지의 반대로 칼을 한 번도 잡아본 적이 없는 백면서생이었다고 한다.

사쓰마 영주 시마즈님의 전폭적인 후원과 지휘 아래, 시게타메님을 필두로 무인 열 명과 의원 다섯 명이 조직되었다.

시마즈영주가 주력하며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분노했을 때 뇌의 변화상태였다.

실험대상은 죄다 죄수들이었다.

나는 그 실험에서 잡일을 도맡게 되었다.

첫 실험자는 시마즈가문을 배신해 번을 탈출하다가 붙잡힌 가신 중 한명이었다. 그는 이미, 삶에 대한 절망과 체념의 상태로 분노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게타메님을 비롯한 무인들은 현장에 숨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의원 한 명과 내가 남기로 하였다.

우리는 계획에 따라 의자에 묶인 그가 밧줄을 스스로 풀 수 있게끔 적당히 묶었으며 의원은 그를 협박하며 고문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를 결국 분노하게 만든 것은 고문이 아닌 그의 가족들의 생사와 안전에 관한 위협이었다.

고문을 버티어내던 그 실험자는 결국 분노하며 광기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묶인 밧줄을 쉽게 끊어 버렸고 의원을 붙잡아 목을 조르기 시작하였는데, 그 순간, 숨어 있던 무인들에 의하여 즉시 제압당하였다.

죄수는 무인들에게 붙잡혀, 발버둥치며 실험대 위에 올라가 사지가 묶이게 되었고, 의원들은 망치와 정 그리고 톱을 동원해 그의 머리를 살아있는 상태로 절개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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