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믹스매치와 시간의 찰나를 입다:

80년대 엘레강스와 소녀적 위트의 랑데부

by 유수연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숲길

차갑게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지고
그렁그렁 눈물 같은 꽃망울
찬란한 봄빛 속에 아롱아롱...


— 유수연, <흩어진 봄> 中


벚꽃의 계절.


세상은 온통

차갑게 얼어붙은 동토를 뚫고 나온 핑크빛 퍼레이드

그러나 올시즌 패션에서의 핑크는 그저 보드랍기만 한 봄바람은 아닙니다.


런웨이를 가득 메운 핑크는

어깨를 세우고 허리를 단단히 조인 엘레강스.

80년대의 견고하고 구축적인 실루엣의 복귀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화려한 귀환의 모습에는 일본의 서브컬처로 자리 잡은

만화같이 귀여운 섹시 '가와이이(Kawaii)'라는 지극히 찰나적인 소녀의 기호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TAO(구리하라 타오)2026/27 FW

미니멈'의 단조로움에 심심해하던 패션계에 던져진 새로운 에너지.


디테일과 군더더기를 떼어내다 지친

뉴 맥시멀리즘(New Maximalism)'의 신호탄입니다.


어쩌면 80년대의 권위적인 볼륨과 소녀적 감성이 뒤섞인 이 기묘한 재해석은, 우리가 붙잡고 싶은 '영원한 찰나'에 대한 가장 사치스러운 갈망일지도 모릅니다.


​[Archive: 나비가 길을 잃은 그 찰나의 기록]


툭,
툭툭,
툭툭툭
...
어느새 하늘 가득 만개한 그리움
향기에 취한 나비
아스라이 갈 길을 잃으면
비로소 느껴지는 꽃잎의 무게

시, 유수연 <봄에 피는 꽃>


문득 이상봉(2012 S/S)의 나비 컬렉션이 떠오릅니다. 안갯속에서 화려한 날갯짓을 멈춘 채 투명한 우산 위로 내려앉은 나비 떼.

그때의 봄은 '길을 잃은 봄날의 형상화였다는 기억입니다.


시간이 지나 2026 S/S 컬렉션은 또 다른 대답을 내놓습니다.


80년 대풍의 구조적인 재킷에 섬세한 핑크 트위드를 입히고, 그 아래에 프릴 양말을 매치하는 식으로

복고와 스타일의 믹스매치.


장난스러움이 넘치고 소재도 PVC가 많이 등장하지만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조형과 디테일의 표현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60년대의 미니멀리즘부터 90년대의 슬립 드레스까지, 시대적 맥락 없이 소환된 기억들이 기괴한 동거를 시작한 지금.


이 혼돈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이정표는 아이러니하게도 '소재의 차별화'에 있습니다


역시 과감한 포름에는 최첨단 소재공학이 접목되어야 합니다.


결국 이들 최첨단 소재들의 질감이 표현하는 현대적 엘레강스의 종착지야말로 명품이 누리는 특권일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루이비통 리사의 캠페인 컷

루이뷔통의 앰버서더 리사가 보여주는 이 소녀적 룩은 마냥 귀엽다기보다 훨씬 지적이며 '성숙한 소녀'의 모습입니다.


명품의 권위와 'kawaii(귀여움, 사랑스러움)의 위트가 어떻게 공존하며 새로운 에너지를 만드는지 증명하는 것이지요.


특히 올시즌 뷔스티에나 파자마, 스포츠웨어와 결합하며 보여주는 사랑스러운 란제리 룩은 유혹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코스프레적 유희에 가깝습니다.

Image credit: Launchmetrics Spotlight/Sandy Liang)



80년대를 비롯한 그 뒤죽박죽 된 시간의 잔상 속에서, 이렇게 화사한 봄날 다시 핑크로 무장하고 거울 앞에 서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Image credit: Launchmetrics Spotlight/Sandy Liang)

지루한 '미니멈'의 일상을 뚫고 나오는 생명의 빛.

짧아서 더욱 소중한 봄날의 순간들을, 내 몸 위에 가장 단단한 실루엣으로 박제해 두고 싶기 때문입니다.


Chanel 2026 S/S Haute Couture

그런 의미에서 2026 SS파리오뜨 꾸뛰르의 무대에서 샤넬이 보여준 핑크는 더욱 서정적입니다.


견고한 트위드의 질감 아래로 쏟아지는 분홍빛 깃털(Feather)의 물결.


그것은 가벼움이 가진 힘이자, 바람 한 점에도 흩어질 것 같은 '찰나의 아름다움'을 붙잡으려는 디자이너의 처절한 '헌사'와도 같습니다.



하늘 가득 만발했던 벚꽃
살랑살랑 오가는 바람 따라
길 위에 흩어진 봄

​어제의 내 마음도
이제 옛 마음

​— 유수연, <흩어진 봄>


하늘 가득했던 벚꽃도 바람 한 번에 '옛 마음'이 되어 길 위로 흩어집니다.


80년대의 엘레강스도,

소녀들의 사랑스러움도 결국은 이 찰나의 런웨이를 지나가겠지요.


인생의 가장 화사한 순간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핑크색 실크 셔츠 한 자락에 프릴 디테일을 슬쩍 얹어보세요.


꽃 봉오리가 피어나는 듯한 볼륨감, 흩날리는 꽃잎의 질감을 살린 실크, 봄날의 햇살을 머금은 듯 반짝이는 크리스털까지...

사랑은 지금, 거울 속에 비친 당신의 미소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뷰티플 경주. 스트리트는 이미 런웨이의 한장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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