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에밀 싱클레어에게

데미안, 싱클레어 그리고 나

by 즉흥인간

안녕 에밀 싱클레어,



네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 부르면 낯설지만 경쾌한 느낌이 들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꾸 불러보게 돼.

에밀 싱클레어, 에밀 싱클레어, 에밀 싱클레어...


고등학교 시절, 난 학교에 비치된 A4 반정도 사이즈의 얇은 청소년 대상 간행물을 종종 봤어.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를 읽는 게 재미있어서 투고 사연란을 주로 들춰보곤 했지. 그런데 볼 때마다 사연 중 하나에는 데미안, 싱클레어,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단어가 보였어. 낯설지만 왠지 사랑스러운 단어들을 알아보고 싶다, 그러니 헤세의 책을 봐야겠다 생각했는데 참... 이렇게 세월이 많이 흐른 최근에서야 <데미안>을 봤어. 네 이야기를 일찍 봤다면 삶의 단계마다 종종 생각하며 다른 내가 되지 않았을까 잠시 후회도 했어. 물론 그랬다면 이십 대 중반 교회를 더 이상 안 가겠다고 선언한 나 때문에 주름이 간 엄마의 얼굴에 주름이 하나 더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지금에서야 너를 만나서 더 좋다. 어린 난, 너의 방황 그리고 데미안과 에바 부인의 말을 이해 못 했을 것 같거든. 삶을 어느 정도 살고 조금 알 것 같은 이때, 널 만난 게 완벽하게 느껴져. 너의 이야기로 내 한없이 미숙했던 시절도 같이 돌아볼 수 있어서 그런가 봐.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 소설 데미안 중에서 -



너의 고민이 나랑 비슷해서 신기해. 특히 안온한 세상에 대한 의심, 선과 악의 정의와 경계, 원형과 본질, 사랑, 우정, 나와 세계, 아브락사스, 진정한 나, 가야 할 길 등 말이야.


우리 각자는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다가 언젠가 한 번은, 내 안에 어쩌면 진정한 나도, 길도, 답도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 이건 책상 앞에서 머리로만 배울 수 없고, 시간도 꼭 필요해. 길을 알아도 그 길을 갈 수 있느냐 아니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 말이야.


한때 난 누군지도 모를 데미안을 오래도록 기다렸어. 나타나만 준다면 한눈에 알아볼 것 같았어. 그런데 나타나지 않더라. 낙인을 볼 눈을 가지지 못했던 난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나의 데미안은 그런 날 잡지 않았던 걸까.


그런데 말이야. 내가 하는 일에 소크라테스 문답식으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었어. 시간도 많지 않은데 바로 답을 알려주지 않고 빙빙 돌려서 기어코 나의 대답을 끌어내려고 하는 게 도통 이해 가지 않았지. 그들은 어떤 문제이든 내 문제는 나만 풀 수 있다는 것을 내 몸에 새겨주고 싶었나 봐. 맙소사. 지금 깨달았는데 데미안 같은 사람들이었어.



이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 소설 데미안 중에서-



싱클레어, 고생 많았어. 진정한 자신이 되느라 수고했어. 데미안이 힌트를 주고 스스로도 깨쳤지만, 그 모든 것을 몸소 겪으면서 어른이 되는 것 역시 쉽지 않았지? 고뇌의 시간은 길었는데, 한순간, 네 의지와 상관없이 운명에 휘말리고 손쓸 새도 없이 훌쩍 자라 버린 게, 마치 인생 같다.

이제 넌 너의 우주에서, 심지어 스스로의 얼굴을 보며 데미안을 느낄 수 있게 되었잖아? 그럼에도 너희들이 이별하는 장면은 가슴 아팠어. 그 고통을 지나 알을 깨고 마침내 아브락사스에 닿은 것 정말 축하해.


고백할 게 하나 있어. 난 삶의 대부분을 불안과 함께하며,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러 부러 둔해졌어. 아프기 싫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싶어서, 눈을 가리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며 그 안에서 잠시 행복하기도 했어. 하지만 그런 것만 있는 세상은 진짜가 아니잖아. 영원히 기쁠 일도 슬플 일도 없고, 고통과 불안 역시 우리 삶이며, 우리는 그저 존재로서 행동할 뿐인가 싶어.


그래서 말이야. 네가 찾은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길, 나도 찬찬히 다시 찾아보려 해. 아직 남은 인생이 까마득하더라고. 나는 이번 생에 나의 데미안을 만나고 말 거야. 만약 만나지 못한다면 내가 데미안이 될래. 그 대가로 너처럼 지독한 고독을 견뎌야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싱클레어,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하고 싶어. 우리가 데미안을 그리워하고 만지고 만나고 싶은 것처럼, 난 네가 보고 싶고 그리워. 미숙했던 너도 그리고 지금의 너도 자랑스러워.

잘 있어줘. 사랑해 나의 싱클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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