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누군가를 위해 산다는 것

영화 '소방관'을 보고

by 낙하산부대

싱가포르 출장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를 보았다.


제목은 소방관. 2001년 1월에 발생한 홍제동 화재 사건을 모티브로 한 실화 영화였다.


출장의 긴장과 피로가 뒤섞인 시간, 그 영화를 보며 나는 다시금 ‘누군가를 위해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게 되었다.


홍제동의 어느 다세대 주택에서 불길이 치솟던 날,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들은 어느 한 어머니의 절규를 들었다. 방화범이자 집주인의 아들을 구해 달라는 모친의 간절한 외침이었다.


이미 건물은 불길에 휩싸여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소방관들은 그 외침을 외면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아들을 살려달라는 절박한 부탁 앞에서 그들은 망설임 없이 불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그 선택은 곧 비극으로 이어졌다.


수색 작업 도중 건물이 붕괴하며 대원들이 그대로 매몰된 것이다. 뒤이어 출동한 200여 명의 동료들이 사력을 다해 구조에 나섰으나, 끝내 아홉 명 중 여섯 명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날 이후 여섯 명의 별이 하늘로 흩어졌다.



그 사건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소방관들의 처우와 현실에 눈을 돌렸다. 생명을 건 사투를 치르면서도 턱없이 부족한 장비와 인력,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는 그들의 모습이 세상에 알려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도와 환경은 조금씩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의 헌신에 비하면 부족하다. 오늘도 소방관들은 누군가의 삶을 지키기 위해, 알 수 없는 위험 앞에 서 있다.



비행기 안 좁은 좌석에 앉아 그 장면들을 마주하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래된 기억이 되살아났다.


내가 소위로 임관하던 날이었다. 부대 배치를 받고 책상 앞에 앉아 장교수첩 첫 장에 이런 문장을 적어 놓았다.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서 명예와 자부심을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은 누군가가 걸었고, 또 내가 걸어야 할 길일 뿐이다.”


처음 그 문장을 적을 때의 벅찬 감정과 굳건한 다짐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 단순히 내 선택의 길이 아니라, 이미 앞서 간 이들이 피와 땀으로 걸어간 길이라는 사실이 가슴을 뜨겁게 했다. 동시에 그 길을 이어 걸을 책임이 내게 있다고 다짐했다.



군인의 길은 늘 고단했다.


훈련과 작전, 수많은 책임이 날마다 이어졌다. 그러나 그 길이 자랑스러웠다. 내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나로 인해 누군가가 조금 더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나를 버티게 했다. 군복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 ‘내가 이 길을 걷는 이유’는 늘 분명했다.



지금은 후배들이 그 길을 이어가고 있다.


가끔 후배 장교들이 책임의 무게로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면 애틋하면서도 든든하다. 나는 더 이상 군복을 입지 않지만, 그들이 내 뒤를 이어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마음속 깊은 울림을 느낀다. 마치 긴 바통 터치처럼, 사명의 길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군 생활을 마친 후 나는 민간의 삶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군복을 벗었다고 해서 다짐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위해 산다’는 마음은 여전히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지금은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한 직장의 리더로서 나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하려 한다. 때로는 군인 시절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결국 본질은 같다. 내가 조금 더 헌신하면 누군가의 하루가 조금은 더 편안하고 따뜻해질 수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면 충분하다.



삶의 무게가 벅차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돌아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누군가’가 있었다. 가족, 동료, 선후배 그리고 내 곁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지켜주고,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나는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다.



비행기 창밖으로 저녁빛이 퍼져 나가던 순간, 나는 조용히 다짐했다.

내가 걷는 길은 이제 더 이상 군인의 길은 아니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나를 지탱하고 있다. 소방관들이, 군인들이, 그리고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 자기 몫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듯, 나 또한 내가 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



내 작은 노력이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내가 살아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자, 다시 걸음을 내딛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