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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땡이 러너 Feb 18. 2020

처음은 언제나 불편한걸

달리기 찬가#11. 새 러닝화가 남긴 상처, 아물어 가며 익어가는 관계

글 쓰는 일을 하지만, 퇴근 후엔 몸 쓰는 일을 즐기는 직장인. 대학생이던 2012년 무렵부터 취미로 러닝을 즐기고 있다. 이런저런 운동에 손을 댔지만, 결국 러닝이 가장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뛸 때마다 잡스런 생각을 하다 보니 러닝을 하며 가장 튼튼해진 건 마음. 달리며 얻은 이런저런 생각들을 공유한다.


천생연분인 줄 알았다. 


첫 만남은 오후 6시쯤이었다. 서로가 가장 편한 시간으로 맞췄다. 그는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마주하고 서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미리 많은 얘기를 듣고 왔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깔끔하고 시원시원한 모습이 마음에 꼭 들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조심스레 같이 걸어도 보고, 뛰어도 보았다. 그는 나를 단단히 잡아줬다. 내가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 줬다. 품은 포근했다. 때로는 단단했다.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도, 든든하게 지지해 줄 거라고 확신했다.


아, 새 러닝화 이야기다.




러닝화도 교체시기가 있다. 600~800km 정도를 달리면 기능이 떨어진다.  일주일에 30km 이상을 달린다면 거의 5~6개월에 한 번 정도는 러닝화를 교체해줘야 하는 셈이다. 


물론 교체시기가 돼도 쉽사리 운동화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안 든다. 우선 외관상 별 차이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가 좀 묻고 있고, 발바닥에 자잘한 돌조각들이 끼어있을 뿐. 나름 정(情)도 들어 쉽게 포기가 안 된다.


하지만 러닝화는 기능성 신발이다. 신을수록 바닥의 충격 흡수 기능이 저하된다. 몸무게를 지탱하는 중창이 압착돼 기능을 서서히 잃어가기 때문이다. 아웃솔(바닥) 형태 변형으로 발에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얼마 전 새 운동화를 구입했다. 오후 6시쯤 매장을 찾았다. 하루 중 발의 크기가 가장 큰 시간이다. 하루 종일 혹사당한 발은 오전보다 10%가량 넓어지고, 길이는 10mm가량 길어진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의 대회가 오전에 열리지만, 달리기를 하다 보면 발이 부어오른다. 때문에 오후의 발 크기에 맞추는 것이 좋다.




러닝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브랜드마다 내세우는 러닝화의 기능과 재질이 다양해졌다. 보고 있자면 혼란스러울 정도다. 덕분에 적당히 신어보고, 뒤꿈치에 손가락이 들어가는지 확인해 운동화를 고르는 일은 이제 구식이 됐다. 


대신 브랜드별로 '플래그십 스토어'를 방문하면 각종 데이터를 통해 내게 딱 맞는 운동화를 찾을 수 있다. 아니라면 '러너스 월드' 등 전문 매장도 찾으면 된다. 전문가들이 각종 도구로 내 발을 분석하고, 꼭 맞는 러닝화를 찾아준다. 


매장에 가면 직원과 상담하고 내가 추구하는 러닝과 맞는 러닝화를 신어 본다. 매장에 러닝머신이 있다면 위에 올라 다양한 속도로 달려본다. 달리는 모습은 러닝머신 앞뒤로 배치된 카메라로 모두 촬영된다.


전문 교육을 받은 직원들이 영상을 보며 내가 달리는 모습을 다시 분석한다. 발목과 무릎의 위치, 다리가 들어 올려지는 각도 등을 계산한다.


어떤 브랜드에선 신발에 동전만 한 칩을 달고 매장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게 한 뒤 칩에서 데이터를 추출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절차를 거쳐 내게 딱 맞는다고 결론이 난 러닝화를 들고 나온다. 




그리고 그날 저녁, 기쁜 마음으로 달리기에 나선다. 새 운동화 끈을 조이고 내딛는다. 그런데 생각만큼 러닝화가 발에 달라붙지 않는다. 어딘지 모르게 겉도는 느낌. 지면의 느낌이 다르다. 밑창도 너무 단단한 느낌이다. 뻣뻣한 뒤축은 내 뒤꿈치를 긁어댄다.


금세 근육은 뻣뻣해지고, 참고 달렸더니 뒤꿈치엔 상처가 났다. 양말 아래로 쓰림이 전해진다. 기분이 묘하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운동화인데도 불편함이 느껴진다니. 


사실 답은 간단하다. 새 러닝화라 그렇다. 아무리 분석을 했다지만, 그 결과는 '내게 잘 맞을 것'이라는 예측일 뿐이다. 정말로 내게 '잘 맞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그냥 시간이 아니라, 나와 함께 달리면서 내 발 모양에 맞게 서서히 닳아가는 적극적인 시간들이다. 


신발을 신고 벗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단단하던 뒤축도 차츰 누그러든다. 이에 맞춰 고통을 선사하던 뒤꿈치에도 새 살이 돋는다. 상처에서 회복한 뒤꿈치는 더 단단해진 기분이 든다. 


내 발에 맞는 러닝화라면, 달리면 달릴수록 점점 편안해진다. 신발이 내 발에 맞춰가는 만큼, 내 근육들도 새 신발에 적응해간다.




러닝을 하며 러닝화를 만나듯, 일상을 보내며 많은 관계들을 맺게 된다.


내가 원해 맺은 관계도, 어쩔 수 없이 맺게 되는 관계들도 있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딱 잘라 어느 비중이 더 높다고 하기는 어렵다. 어찌 되었든 뒤섞인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관계 속에서도 가장 많은 에너지가 드는 지점은 관계를 형성하는 부분이다. 내 나름의 기준과 고민으로 평가하고, 관계를 선택한다. 막상 관계가 시작되면, 완벽이란 없다.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지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적다.


경험이지만, 결국 관계 역시 서로에게 맞춰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잘 고른 러닝화라도 우리 발에 맞춰가는 시간이 필요하듯, 마음속에서도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 얕은 상처가 나기도 하고, 쥐가 날 수도 있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결국엔 서로가 맞아떨어지게 된다. 


노력도 필요하다. 무조건 시간이 불협화음을 해결하지는 않는다. 러닝화에 적응하고, 진가를 알기 위해선 일단은 충분히 달려야 한다.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충분한 대화와 노력이 있을 때 문제가 해결된다. 내가 관계를 시작하게 된 그 지점을 생각하며 천천히 짚어보자. 


물론, 무작정 참을 필요는 없다. 러닝화의 익숙해짐도, 내 발의 데이터에 꼭 맞는 신발이라는 전제 아래 이뤄진다.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오래 신는다고 해서 완벽한 러닝메이트가 될 수는 없다. 러닝화에 몸을 맞추다 보면, 내 몸이 불편해진다.


(끝)


Tip. 러닝화 구입과 오래 신는 팁

오전이 아닌 오후에 신발을 구입한다. 활동을 많이 하고 난 오후에 측정한 발이 아침보다 길고 넓다.

가급적 왼쪽 발에 신발을 신어보자. 통계적으로 왼쪽 발이 오른쪽 발보다 크다.

일어선 상태에서 신발을 신자. 앉아 있을 때보다 서 있을 때 발 크기가 10mm까지 커진다. 

러닝화는 러닝 할 때에만 착용하자. 유연성과 경량성이 높아 다른 운동을 할 때에는 부상 위험이 있다.

뒤축을 구겨 신지 말자. 뒤꿈치를 지지해주는 보강재가 손상돼 부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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