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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떠러지 앞에 선 두 임원(2)

젖은 낙엽의 최후

by 조직실험실


회사에서 위와 아래로부터 동시에 인정받는 리더는 천연기념물 같은 존재입니다.

직장생활 커리어에서 이런 리더를 만날 수 있다는 건 천운과도 가깝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대기업에서 20년 넘게 연구 조직에 몸담은 B 임원은 그 희귀한 케이스로 임원 승진의 기회까지 'FM방식으로' 거머쥐었습니다. 오랫동안 팀장을 맡으며 성실하고 유능한 리더로 인정 받아 회사에서 “좋은 리더의 표본”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임원으로 승진했을 때 조직 안팍에서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지지했고, 그의 승승장구가 계속되기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그는 승진과 함께 그의 상위자도 동시에 교체되는 변수를 맞이했습니다. 새로운 상위 임원은 소위 ‘게임 체인저’였습니다. B 임원을 향한 상위자의 태도는 협력이 아니라 압박에 가까웠습니다. ‘길들이기’였을지, ‘견제’였을지 모를 전방위적인 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압박의 그늘

B임원이 주도적으로 추진하던 연구 과제들은 사사건건 트집 잡혔습니다. 세상 아래 모든 이유가 반려의 사유가 되었습니다.
“이건 방향이 잘못됐다.”
“다시 검토해야겠군.”

B임원은 보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총기와 생기를 잃어갔습니다.


20여년 간 쌓아온 인정과 평판이 그를 임원의 자리에까지 앉혔지만, '계약직'들의 세계에서 그의 강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듯 했습니다.


정치판에서 칼춤을 추며 권모술수를 부리는 것도, 우직하고 무식하게 밀어붙이는 것도 그가 잘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결국 그가 택한 전략은 젖은 낙엽처럼 바닥에 웅크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낭떠러지 앞에 몸을 누인 채 두려움에 떠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낮추 숨겼습니다.


불안의 전염

리더의 불안은 금세 조직으로 퍼져갔습니다. 작은 입김에도 가볍게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그의 좌절과 무기력은 연구팀 곳곳으로 번졌습니다.

각 팀에서 의욕적으로 준비한 과제들이 오히려 B 임원 손에서 원천적으로 가로막혔습니다.
“이거 가지고는 우리 통과 못할 거야.”
“내가 조금 더 고민해볼게.”

"좀 더 새로운 게 없을까?"


그 결과, B 임원은 어느새 스스로 본인 조직의 병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를 지지하며(B임원의 연명을 바라며) 뭐라도 해보려 했던 구성원들조차 하나 둘 지쳐갔고, 결국 무기력을 답습하게 되었습니다.


몰입의 붕괴

그렇게 연구 실적도, 인정도 없는 해가 거듭되었습니다. 구성원의 몰입도는 20%p 가까이 하락했습니다.


결국 그는 임원 보임 2년 만에 최단기 해임 통보를 받았습니다. 더불어 그가 이끌던 연구팀들은 타 부서에 흡수·병합되는 수순을 밟게 되었지요.

정치적 기반이 무너진 채로 B 임원이 얼마나 외롭고 모욕적인 일들을 겪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임원의 자리에서 요구되는 역할을 충분히 해냈는가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가 불가피했습니다.

위기 앞에서의 리더의 선택은, 결국 조직의 생사를 갈라놓았습니다.

심리학의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 Deci & Ryan, 1985)에 따르면, 동기부여의 핵심은 자율성, 유능성, 관계성 세 가지 요인에 달려 있습니다.

B임원은 보임 직후부터 이 세 가지가 동시에 붕괴되었습니다.


관계성: 상위자와의 신뢰가 깨지고, 구성원들과의 연결도 끊어졌습니다.
자율성: 주도하던 과제들이 제동에 막히며, 구성원들의 선택권과 자율성이 사라졌습니다.
유능성: 연구 성과를 경험할 기회가 줄어들면서 성취감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결국 한 리더의 무력감이 조직 전체의 동기 시스템을 붕괴시킨 것입니다. 리더 개인이 흔들리자, 조직 전체의 심장이 멈춰버린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A임원과 B임원은 낭떠러지 앞에서 전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스스로 온 몸을 태워 꺼져가던 불씨를 살려 몰입을 되살렸고, 다른 한 사람은 스스로 남은 온기마저 꺼뜨리는 선택을 하며 조직 전체를 무너뜨렸습니다.


*A임원 사례 : 낭떠러지 앞에 선 두 임원(1)


결국 위기 앞에서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칼날 같은 압박이 아니라, 리더 스스로 흔들림 없는 중심을 세우고 자율성·유능성·관계성의 바람을 다시 불어넣는 일이라는 것을 두 임원의 사례를 통해 관찰 할 수 있었습니다. 리더가 불씨를 지켜내면, 작은 불꽃 하나가 전체를 다시 살려낼 수 있다는 사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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