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을 부는 나

일타강사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 주인공 바흠은 “원하는 대로 멀리까지 갔다 와도 되지만 해가 지기 전에 출발 지점으로 꼭 돌아와야 하오. 그러면 당신이 다녀온 땅은 당신 것이 되는 것이오.”라는 제안을 받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잠시 고생하면 인생이 달라진다’고 다짐하며, 계속 걷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나는 20대 후반 수험생 시절에, 나 자신의 역량을 풍선으로 여기고, 퍼텐셜을 키우기 위해서, 이 풍선에 매일 죽을힘을 다해 바람을 집어넣었다. 당시에는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낙오자가 된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한국 사회는 IMF 사태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우리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슬로건을 부르짖으며, 우리 스스로를 끊임없이 긴장시켰다. 풍선은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며 가볍게 부유할 때 가장 아름답지만, 무한의 팽창을 추구하면 결국 찢어져 사라진다.

나는 운 좋게도, 그 시험에 합격해, 죽을힘을 다해 나의 풍선을 부는 일에서 탈출할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수험생은 실패의 쓴맛을 곱씹으며, 하루하루 자신의 풍선에 온 힘을 다해 바람을 불어넣었다.

땅을 너무도 사랑한 바흠은 해가 뜨기 전에, 편하게 걷기 위해서 장화를 벗고 출발한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효율적 선택처럼 보인다. 그는 스스로의 체력과 발의 보호 필요성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일종의 ‘나는 이 정도쯤은 문제없어’라는 자만이 드러난 선택이다.

여기에서, 장화는 단지 물리적 보호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방어, 경계 유지, 외부로부터의 완충 장치이다. 바흠이 장화를 벗었다는 것은 자기 보호를 포기한 것이고, 경계심을 내려놓은 것이며, 욕망에 대한 자제력의 이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이다. 이것은 단지 육체적 선택이 아니라, 정신적 경계의 붕괴를 나타내는 첫 징후로 읽을 수 있다.

바흠의 두 번째 패착은 조끼, 부츠, 물병, 모자를 던져버린 것이다. 조끼는 체온 유지를 위한 것으로, 그것을 버림으로써, 자기 방어에 실패한다. 부츠는 바흠의 발을 보호하여 장거리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어서, 그것을 놓아버린 것은 지속적인 행군에 실패를 의미한다. 물병은 생존에 필수적인 수분을 제공하지만, 이를 던져버려, 생존의 조건이 무너진다. 모자는 뜨거운 햇살을 피하게 해 주지만, 이것을 챙기지 않아 냉철함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이제 바흠은 살기 위해서 걷는 것이 아니라, 땅을 얻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상태에 돌입한다. 그는 무게를 줄이려고, ‘이건 없어도 된다’는 오만한 판단을 한 것이다. 그는 필요한 것을 버려야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오판하면서, 욕망이 충족되면 삶이 구원될 것이라고 착각한다.

바흠은 언덕 아래에는 해가 졌지만, 언덕 위에는 해가 보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출발 지점을 향해 뛴다. 이것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 패착이 된다. 그의 생각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지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흠은 태양의 실제 위치, 자신의 체력 상태, 출발 지점까지의 남은 거리, 시간을 모두 무시하고, 희망만으로 출발 지점을 향해 달린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자기 욕망에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하며, 죽음을 향해 맹목적으로 질주한다. 이 장면은 인간의 어리석음이 가장 숭고해 보이는 순간이다. ‘인간의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마지막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의 마지막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6 피트인 바흠이 묻힌 공간이 그에게 필요한 땅의 전부였다.”라고 ‘인간의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파괴한 대가를 신랄하게 묘사한다.

바흠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끊임없이 땅을 좇았지만, 결국 자신의 무덤 크기만큼의 땅만을 얻게 된다. 톨스토이는 생전의 모든 욕망은 무의미했고, 인간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죽음의 공간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지혜를 뜻하는 한자, ‘智’를 좋아한다. 한자 해설서에서는 ‘智’를 ‘知’가 쌓여서 해(日)처럼 밝아지는 경지라고 설명한다. 지혜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그 지식이 스스로를 비추는 힘을 가질 때 생기는 것이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그것이 삶에 적용되지 않으면 지혜는 자라지 않는다. 결국 지혜는 삶의 오류, 반성, 눈물, 부끄러움 등을 통해서 빚어지는 것이다. 바흠도 어느 정도 세상 물정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욕망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는 없었다.

나는 바흠을 보면서, ‘과연 사람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자신에게 불편한 진실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눈은 모든 것을 보지만, 자기 자신은 보지 못한다. 따라서 자기를 판단하는 자와 판단받는 자가 동일할 경우에는, 판단은 늘 왜곡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우리는 고독 속에서 자기 자신에 갇히지만, 타인의 말, 표정, 거울 같은 피드백 속에서 자신의 무늬와 결을 새삼스레 발견한다.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구성한다.

나는 나 자신을 풍선처럼 여기고, 죽을힘을 다해 바람을 한없이 불어넣으려 노력했지만, 운 좋게 탈출했다. 나도 계속 나의 풍선을 불었다면, 바흠처럼 터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풍선

나는 풍선에 바람을 넣는다

조금 더, 조금 더

풍선이 커지면 희망도 커지는 줄 안다

하지만

풍선은

멈추지 않으면 터진다

바흠의 풍선은 터져버렸다

그에게 필요한 건

겨우 6피트의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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