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봉
2024년 12월 3일 저녁, 매년 연말처럼 송년회 술자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꿈나라에 들어가기 직전, 황급히 아내가 나를 깨우며, 외친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어!” 나는 아내의 외침에 놀라, “에이, 설마” 하며, 거실로 끌려 나와 TV를 트니, 비상계엄포고령이 방영되고 있다.
이 황당한 방송 화면이 최근에 읽은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와 겹친다. 삽시간의 아이러니한 상황이 저녁에 들이켠 독주의 기운을 폐부에서 급격하게 몰아낸다.
44년 전 5월 17일 토요일 오후에 아버지는 나를 자전거에 태우고 충장로로 향한다. 30분 정도를 가니, 도청 근방에 도달한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최루탄을 맛본다. 오리지널 한국산 최루탄의 매서움에 눈물 콧물을 짜내며, 기침을 해댄다. 바로 아버지는 자전거를 돌려 집으로 돌진한다. 내 머릿속에 각인된 계엄령은 공포 그 자체다.
1987년 6.10 항쟁에서 직선제 개헌이 통과되고,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 한국 사회에서는 사형 집행이 사라진다. 나는 계속되는 평온에 도취되어, 내 생전에 다시는 1980년 계엄령의 공포가 재현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대학 다닐 때는, 가투 한번 나가 볼 용기도 없다. 나는 학창 시절 이후 완전 쫄보로 살고 있다. 책을 같이 읽는 독서 친구들은 대부분 베테랑 시위꾼이다. 그 친구들 덕분에 2016년 10월이 되어서야, 광화문 광장에 나가지만, 박근혜 정부가 계엄령을 실행하리라는 염려는 1도 하지 않는다.
이런 안온한 삶은 2024년 12월 3일 이후에 완전히 산산조각 나버린다. 책이나 영화에서나 봤던 공포가 이제는 내 눈앞에 다가와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열심히 여의도나 광화문으로 나가지는 못한다. 겨우 딱 한 번 여의도 집회에 나갈 뿐이다.
탄핵 심판의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진다. 가장 빈번하게 한 상념은 ‘과연 헌법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헌법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다.
탄핵 결정문 전문을 출력하여 차분히 일독한다. 114페이지의 분량이지만, 별 어려움 없이 읽힌다. 다른 판결문과는 달리, 평이한 용어로 서술하고 있으며, 민주주의 의미를 밝힌 멋진 문장이 여러 군데 나온다.
그렇다면, 헌법은 도대체 무엇을 규정하고 있을까? 민법은 민사 생활을 규율하고 있고, 형법은 형사 사건을 규율하고 있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헌법은 그 내용을 직관적으로 알기 어렵다.
헌법의 憲은 우리가 평상시에는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지 않는 한자다. 아마도 ‘헌’ 자는 헌장 정도에서 사용하고 있다. 영어로는 ‘charter’ 정도가 이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헌법은 기본적으로 그 국가가 지향하는 원칙이나 가치를 담고 있다. 물론 이 외에도 훨씬 더 많은 것이 규정되어 있다.
내가 주목하는 대한민국 헌법 내용은 대통령 중심제와 자유 민주주의 원칙이다. 우리 헌법은 1948년 제정된 이래로 자유 민주주의 원칙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다만 대통령 중심제는 1960년 개정된 헌법에서는 내각책임제로 수정되었지만, 1962년 다시 대통령 중심제로 개정되었고, 이후 계속 유지되고 있다. 결국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헌법 내용은 대통령일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대통령은 10명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나는 김영삼 대통령 선거부터 투표권이 있었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투표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것은 2002년부터다. 그때도 투표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로부터 선거 당일 14시 즈음에 문자 한 통이 도달한다. “노무현 일병 구하기” 나는 거실에서 빈둥거리고 있다가, 그 문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 옆에서 누워 있는 아내를 깨운다. 아내는 투덜댄다. “왜 내가 오빠 따라서 투표하러 가야 돼?” 나는 아내를 꼬신다. “맛난 거 사줄게”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선 아내와 함께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참가한다.
이후로는 빠짐없이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 선거에 참여한다. 가장 관심이 가는 선거는 역시 대통령 선거다.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도 대통령을 ‘선출된 왕’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2016년 10월 즈음에는 신문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혼군’이라 비난한다. ‘혼군’ 말 그대로 혼란에 빠진 임금이다. 신문은 박근혜 대통령을 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대통령을 선출된 왕으로 보는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 특히 우리의 어르신들은 대통령을 도덕적 지도자나 구원자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는 대통령은 비판하면 안 되는 존재이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초월적 통치자다.
우리 사회의 마지막 왕조인 조선은 일제에 의해서 강제로 붕괴된다. 조선의 마지막 왕실인 고종과 순종은 우리 민족의 주권을 지키지 못한 책임이 막중했으며, 일제 강점기에도 너무도 무기력하여 국민의 신뢰를 상실했다.
1945년 이후 우리 사회는 공화정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유교적 위계 문화와 군사 정권의 잔재로 민주주의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대통령을 여전히 국부나 정치의 아버지로 여기고 있다. 최근의 대통령도 합리적 관리자로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강한 팬덤을 활용하여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을 적대시하며,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다가 급기야는 군사력을 동원한 계엄령 선포에까지 이른다.
이번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문은 극도의 혼돈을 말끔하게 정리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먼저, 헌법 제1조의 의미를 되새긴다. “헌법 제1조 제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하여 민주주의를 통치형태로 채택하고 있고, 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규정하여 국가권력의 근원과 주체가 국민이며 국민만이 국가의 정치적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국민주권주의를 선언하고 있다.”
조선과 대한제국은 군주가 주인인 나라였지만, 대한민국은 조선과 대한제국과는 다른, 국민이 주인인 나라라는 것을 선언한 헌법 제1조 제1항 및 제2항으로부터 피청구인의 위반 여부를 판단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단호하게 환기시킬 수 있다.
탄핵 결정문을 탐독하면서, 내가 가장 주목한 문장은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율적 이성을 신뢰하고 모든 정치적 견해들이 각각 상대적 진리성과 합리성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다원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대등한 동료시민들 간의 존중과 박애에 기초한 자율적이고 협력적인 공적 의사결정을 본질로 한다.”이다.
나는 이 선언 중에서 우리 사회의 주권자를 ‘대등한 동료시민들’로 설정한 점이 너무 신선하다. ‘대등한 동료시민들’은 서구 사회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이 선언으로 우리들 자신이 우리 사회의 주권자이며, 대등한 동료시민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음으로는 “민주주의는 자정 장치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그에 관한 제도적 신뢰가 존재하는 한, 갈등과 긴장을 극복하고 최선의 대응책을 발견하는 데 뛰어난 적응력을 갖춘 정치체제이다.”라고 선언한 문장이다.
여기에는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주어 ‘민주주의’ 앞에는 ‘대한민국’이 생략되어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러 차례 헌정 질서 안에서 갈등과 긴장을 극복하고 최선의 대응책을 발견한 적응력을 발휘하여, 현시점의 극도 혼돈에 대해서도 최선의 대응책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대통령의 잘못을 명확하게 설시하고 있다. “우리의 헌정사적 맥락에서 이 사건 계엄 선포 및 그에 수반하는 조치들이 국민들에게 준 충격과 국가긴급권의 남용이 국내외적으로 미치는 파장을 고려할 때, 피청구인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하고 국정을 성실하게 수행하리라는 믿음이 상실되어 더 이상 그에게 국정을 맡길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고 볼 수밖에 없다.”
“피청구인이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다시금 행사하게 된다면, 국민으로서는 피청구인이 헌법상 권한을 행사할 때마다 헌법이 규정한 것과는 다른 숨은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것은 아닌지 등을 끊임없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음 문장을, 우리의 후손들이 역사적인 평가를 충실히 해 주길 기원한다. “피청구인의 국회 통제 등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해제요구 결의안을 가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다.”
이번 혼돈의 해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주역으로 ‘국회 앞에서 온몸을 던져 저항했던 시민들’과 ‘그런 시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자신에게 주어졌던 임무를 소극적으로 수행했던 군경‘을 꼽은 것으로 나 스스로 충분히 위로받는다.
나는 이 대목에서 한강 작가 던진 화두가 떠오른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할 수 있는가?” ‘국회 앞에서 온몸을 던져 저항했던 시민들’과 ‘그런 시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자신에게 주어졌던 임무를 소극적으로 수행했던 군경’ 각각의 기억 속에 편재된 1980년 5.18 민주화 항쟁과 1987년 6.10 민주화 항쟁이 그들을 불러일으킨 원동력이다.
나는 이번 탄핵 심판의 선고일 이전에 짜라시를 통해서 전달되는 가짜 뉴스를 믿지 않았다. 우리 대등한 동료시민들의 뇌리에 이미 박혀 있는 12.3 계엄령의 기억을 완전히 다 지우기 전까지는, 탄핵 기각은 불가능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도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를 읽으면, 짜릿하기만 하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듯, 우리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이제는 우리의 문제를 영웅적 1인이 해결하기보다는 우리의 ‘대등한 동료시민들’이 토론을 통해서 결론을 도출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