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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기생충

일타강사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만삭의 지영은 여전히 직장에 나가고 있으며, 주어진 권리를 다 누리면 ‘날로 먹는다’는 시선을 부담스러워한다. 반대로 그런 시선을 의식해 악착같이 일하면 비슷한 처치에 놓인 동료들에게 부담이 되어, 또 다른 갈등을 유발한다. 작가 조남주는 이 장면에서 맘충이란 표현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사회적 조건을 비판적으로 노출시키고 있다.

맘충이라는 말은 2000년대 후반부터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진 신조어다. 엄마(mom)와 벌레충(蟲)의 조합으로, 자기 아이만 생각하며,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엄마를 비하하는 말이다.

예를 들면, 지하철에서 유모차를 끌고 다니며 넓은 공간을 차지하거나, 카페에서 아이를 통제하지 않은 채 시끄럽게 방치하는 특정 상황들을 전체 엄마의 표상처럼 확대화며 ‘개념 없는 엄마’라는 낙인을 찍은 것이다. 이 말이 불편한 이유는, 비슷한 비매너를 저지르는 아빠나 할아버지에게는 이런 낙인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은 맘충은 육아는 여성의 책임이라는 뿌리 깊은 인식에서 아이 문제는 곧 엄마의 문제로 귀결되고, 우리 사회의 공공장소에서 여성과 아이의 존재를 환영하지 않는 정서로 인해서 아이의 소음은 무례, 엄마는 방임, 그리고 곧 맘충이 돼버린다.

맘충이라는 말의 기저엔 엄마를 기생충으로 여기는 시선이 도사리고 있다. 사랑으로 한 생명을 품고, 고통으로 생명을 낳았건만, 그 삶은 민폐로, 폐단으로, 심지어는 기생으로 전락한 것이다.

맘충은 비인간화의 언어이며, 사회적 지위나 인격을 제거한 채, 단지 불편함을 유발하는 존재로 타락시키는 표현이다. 즉, 공공서비스나 배려를 날로 먹는 복지를 받아먹는 존재로 기생한다는 왜곡된 등식을 보여준다. 이는 네가 낳은 아이니까, 사회에 짐을 지우지 말라는 경고이다.

엄마들은 가장 고된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을 혼자 떠안고, 국가가 떠맡아야 할 돌봄을 개인적으로 감내하는 숨은 주체들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그들의 돌봄의 인한 희생은 당연한 일로 간주되며, 그들의 고통은 징징거림으로 폄하되고 있다.

우리 모두는 한때 누군가의 아이였고, 우리들의 엄마 덕분으로 자라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엄마를 냉담하게 대한다. “그들이 너무 많아졌어.”, “애 엄마들은 왜 저 모양이야.”, “자기 자식이니까 자기가 책임져야지.”

그래서 맘충이라는 말은 기생충의 메타포를 통해 엄마를 타자화하고, 공동체부터 밀어내며, 정당한 권리를 특권으로 왜곡한다. 그것은 모성에 대한 조롱이자, 돌봄에 대한 무시이며, 결국은 한국 사회가 스스로의 미래를 혐오하는 방식이다.

한국 사회는 왜 엄마마저도 맘충이라 부르며 혐오할까? 그것은 우리 사회가 엄마를 신성화하는 동시에 경멸하는 이중의 시선을 품고 있기 때문 아닐까? 찬란한 희생을 요구하되, 조금이라도 권리를 주장하면 그 순간 그녀는 민폐가 되고, 맘충이 된다. 그것은 모성과 여성성을 향한 구조적 모순의 폭력이자, 공동체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집단적 자기혐오의 반영이다.

맘충이라는 혐오의 본질은 두려움이다. 아이의 울음이 불편한 건, 그것이 삶의 지속을 요구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권리 주장이 거슬리는 건, 그녀의 존재가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맘충이라는 단어는 공포와 죄책감을 외면하려는 비열한 외침이다.

그렇다면 맘충은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됐을까? 가장 빈번하게 들리는 말은 “나는 참았는데 너는 왜?”이다. 이 말은 배려를 가장한 억압이고, 공정을 가장한 질투다. “나는 아이 낳고도 회사에 피해 안 줬는데.”, “나는 남에게 폐 안 끼치려고 애를 업고 뛰었는데.”, “나는 아예 결혼도 포기했는데, 너는 육아휴직까지 쓰니?”

시기와 질투는 자신이 누리지 못한 것을, 타인이 갖고 있을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하지만 이 감정은 진정한 억울함의 이름이 아니라, 구조에 대한 분노를 가장 약한 자에게 돌리는 방식의 표현이다. 그리하여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는 공적 책임을 떠맡은 이들을 가장 먼저 공격하는 것이다.

과연 엄마를 맘충이라고 불러서 누가 제일 이득을 볼까? 맘충이라는 낙인은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자들, 비용을 부담하고 싶지 않은 자들, 그리고 자기 불행의 원인을 타인에게 전가하려는 자들의 가장 간편한 도구다.

아이를 키우는 여성, 경력 단절 여성, 시간 제약이 있는 여성은 사회 경쟁자로서의 위협에서 제외된다. “출산한 동료는 일에 집중 못 하겠지.”, “맘충 소리 들을까 봐 자기가 더 조심하겠지.”, “우리 팀엔 여자 많으면 불편하잖아.” 결국 엄마들은 자발적 탈락자로 밀려나며, 기득권은 위협 없이 유지된다.

맘충은 불만을 투사하기 좋은 대상이다. 우리 삶이 팍팍할 때, 카페에서 아이 울음이 거슬릴 때, 우리가 못 받은 배려를 누군가 받을 때, 그 불쾌감의 방향을 사회 구조나 정부가 아니라,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엄마에게 돌리는 것이 가장 쉽다.

맘충이라는 단어는 단지 엄마를 조롱한 말이 아니라, 여성 전체에게 던진 경고가 됐다. “너도 엄마가 되면, 사회는 너를 벌레처럼 볼 것이다.”, “출산은 네 삶의 끝이고, 타인의 눈총은 네 삶의 시작이다.” 이런 협박은 한국 사회에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들의 마음속에 출산 공포와 회피의 정서를 뿌리 깊게 심었다.

그 결과, 한국은 세계 최저 출산국이 되었다. 맘충이라는 말은 ‘육아에 대한 사회적 지원 부족’, ‘경력 단절과 소득 감소 우려’, ‘사회적 시선과 심리적 부담’과 같은 이유들을 상징적으로 응축한 혐오의 레토릭이다.

맘충이라는 언어가 남긴 상처는, 단지 엄마들만의 고통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자기 미래를 부정한 결과이기에, 그 치유 또한 사적 위로를 넘어선 공적 회복의 길어야 한다.

맘충이라 부르던 날들, 우리 모두는 혐오의 그림자 아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그림자를 걷어 내고, 아이 울음조차 미래의 음악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엄마는 민폐가 아니며, 엄마는 우리 사회를 가장 조용히 지탱하는 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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