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낯
우리는 대부분 낮에는 직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밤에는 가정에서 시간을 보낸다. 스마트폰을 사용한다면, 구글 지도 어플에 들어가 보라. 구글 지도 위에 두 개의 지점이 별도로 표시된다. 하나는 파란 원 안에 오각형 오두막 모양의 옆에 ‘집’이라고 표기된 기호이고, 나머지는 파란 원 안에 사각형 가방 모양의 옆에 ‘직장’이라고 표기된 기호이다.
우리는 살짝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집과 가정을 오가면서 자신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나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일과 결혼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신중하게 선택해야 될지 이야기한다. 대부분은 일을 선택하지만, 나는 결혼을 더 신중하게 선택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대면하고 싶지 않은 상사가 있다고 치자. 직장 생활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나면, 어떡해서든 그 상사와 최소한의 시간 동안만 마주칠 수 있다.
반면에, 결혼은 직장과 달리 배우자와 나 단둘이 가정에서 밤시간 대부분을 같이 보낸다. 배우자를 가정 내에서 긴 밤 내내, 직장의 부담스러운 상사처럼 최소한의 시간 동안만 마주치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아무리 어렵더라도 절대로 결혼 생활을 원룸에서 시작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눈에 콩깍지가 써져 있을 때는 긴 밤시간을 밀착된 원룸 공간에서 같이 보내는 것이 힘들지 않지만, 콩깍지가 벗겨지고 나면 그 밀착된 원룸이 버거울 것이다.
나는 10여 년 동안 연애한 후에 결혼했다. 그런데 결혼하고 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아내는 나에게 충격적인 멘트를 날린다. “오빠, 나 완전히 속아서 결혼한 것 같아.”
내가 축구도 잘하고, 기타도 잘 치며, 다정다감한 ‘교회 오빠’는 되지 못했지만, 뻐꾸기 날리며 여자들에 치근덕거리는 ‘양아치 오빠’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나는 ‘의리 있고 따뜻한 오빠’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는데, 사기 쳐서 결혼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엄청난 멘붕이 밀려온다.
나는 왜 사기 결혼이라는 소리를 들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러다가 “연애는 하이라이트 영상이고, 결혼은 생중계 영상이다.”라는 경구를 유튜브 영상에 듣는다. 연애 시절에는 대부분 쌩쌩할 때 만나서 가장 좋은 모습으로 편집할 수 있지만, 결혼 생활은 편집이 불가능한 라이브 중계를 서로 보는 것이다.
결혼은 구성원이 나와 배우자 둘 뿐이어서, 도망갈 곳도 없다. 콩나물시루 같은 집에서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더라도 결국 이런 배우자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면, 최소한 둘 중 한 명은 일을 해서 일용할 양식을 벌어야만 한다.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서 파괴적인 일보다는 건설적인 일을 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서 건설적으로 탁월하게 성공한 예술가로 셰익스피어를 꼽는다. 러셀은 불행할 때 셰익스피어의 시를 읽으면서 위안을 얻었던 것 같다. 셰익스피어가 4대 비극을 썼다는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예술가가 시를 썼다는 것은 영문학을 전공하지 않고는 알기 어렵다.
셰익스피어는 154편의 소네트를 썼다. 소네트는 14세기에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에 의해서 정립된 14행의 정형시이다. 셰익스피어 전까지는 페트라르카에 의해서 정립된 형식의 소네트만이 유행했다.
그런데 신조어의 마술사 셰익스피어는 영국 문학사의 창시자답게 기존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파격적인 형식의 소네트를 썼다. 앞의 12줄은 변증법의 정과 반이 서로 대화하듯, 다른 라임을 주고받으면서, 마지막 2줄에서 합으로 결론을 맺는다.
러셀은 셰익스피어에 대해 “인간들의 허파가 호흡을 멈추지 않는 한, 인간들의 눈이 시력을 잃지 않는 한, 이 시는 영원히 살아 있으리라.”고 감탄한다. 나는 버트런드 러셀의 조언대로 건설적인 일로 독서와 글쓰기를 선택한다.
한편,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러셀의 의견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설명한다. 인생을 삼차원 직교 좌표계라고 상정해 보자. x축은 일에서 벌 수 있는 돈이라고 설정한다. y축은 일에서 얻을 수 있는 의미라고 설정한다. z 축은 인생을 전체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위치라고 설정한다.
x축-y축에 의해서 설정되는 2차원은, 돈도 잘 벌리고 의미도 넘쳐나는 1 사분면, 돈은 잘 벌리지 않지만 의미만 존재하는 2 사분면, 돈도 벌리지 않고 의미도 없는 3 사분면 및 의미는 없지만 돈은 잘 벌리는 4 사분면으로 구성된다.
높은 지점의 z 축에서 x축-y축에 의해서 설정되는 2차원을 내려다보면, 우리의 인생이 1 사분면을 지나, 2 사분면, 3 사분면 및 4 사분면으로 진행될지라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현자의 말처럼, 가장 힘든 3 사분면도 하나의 과정으로 여길 수 있다.
x축-y축에 의해서 설정되는 2차원을 효과적으로 관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2차원이 그리는 넓은 영역을 내려다볼 수 있는 z축의 높은 지점에 올라야만 한다. 그래야만 자기 자신을 타자적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지하 주차장이 비좁다. 특히, 내가 거주하고 있는 동의 지하 주차장은 더욱 심각하다. 그래서 주차 라인이 그어져 있지 않는 사이사이에 차를 주차해 놓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렇게 주차되어 있는 차가 눈에 띌 때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몰상식한 행위라고 비난을 퍼붓는다.
문제는 내가 밤늦게 귀가하는 경우인데, 지하 3층까지 다 돌아보지만, 주차 공간이 보이지 않을 때는, 내가 그렇게 눈살을 찌푸리며 비난했던 그 행동을 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그때마다 남의 눈의 티끌은 잘 보이지만, 내 눈의 들보는 보기 힘들다는 경구를 되뇌며, 주차 충동을 억제한다. “When they go low, we go high.” 남들은 저급하게 주차해도, 나는 품위 있게 주차하자!
행복의 정복:버트런드 러셀 지음/이순희 옮김/사회평론/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