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강사
공부하면서, 그전 단계와 가장 큰 격차를 느꼈던 것은 고딩 1학년 영어 독해 시험이었다. 중딩까지의 영어 독해 시험에서는 반드시 배웠던 내용에서만 출제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중학교 영어 시험은 독해 능력을 테스트하는 게 아니라, 단순한 암기력을 측정하는 셈이다.
그때는 한 학기에 2번 외부 영어 평가를 치렀는데, 50분 내에 6개 정도의 영어 독해 지문을 풀었다. 그 당시에 처음으로 영어 독해 지문을 접하면, 일단 아는 단어가 몇 개 정도 있는지를 일별 했다. 그러고 나서 그 단어들을 연결하여, 나만의 스토리를 창작했다. 나중에 정답 해설집을 보고 나서야, 독해 스토리가 별개의 단편 소설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딩 1학년 첫 외부 평가에서 압도적으로 1등을 차지한 친구에 대해서 엄청난 소문이 돌았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이고, 고딩 입학 전에 ‘성문종합영어’를 마스터했다고. 나는 그 친구와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어, 직접 이야기를 해보지 못했지만, 이미 그 친구는 나에게는 아이돌 같은 존재로 자리 잡았다. 그 후, 그는 3년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았고, 결국 S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며,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지금도 외교관으로 일하고 있다.
고딩 1학년부터 영어는 우리들의 전교 등수를 결정하는 게이트키퍼였다. 나도 영어 실력을 키워보기 위해서 나름 용을 썼다. ‘맨투맨 종합영어’와 ‘성문 종합영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영어 회화 서클에도 가입했다. 그 서클은 동일한 이름으로 서울, 대구, 부산, 광주에서 미문화원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창립됐지만, 내가 고딩에 입학했을 때는 대구와 광주에만 존속했다.
고딩 1학년과 2학년 동안, 학교 밖 생활의 대부분을 그 서클에서 활동하면서 보냈다. 그리고 친구의 대부분은 서클 멤버들이었다. 우리들은 매주 영어로 토의하고, 영어 게임도 진행했으며, 목이 터져라, 팝송도 불렀다. 그렇지만, 영어 성적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나는 엄청 불안했다. 서울로 대학을 진학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다행히, 2학년 2학기 마지막 외부 평가를 치를 때가 되어서야, 겨우 영어 독해 지문의 2/3 정도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도 우리 학년에서는 영어 주류에 편입됐다.
3학년이 되어서는 학력고사 9개 과목 위주로 공부했다. 경쟁자 친구는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부했다. 그 친구는 8개 과목에서 나를 능가했다. 내가 유일하게 능가했던 과목은 영어 단 한 과목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영어 단 한 과목만으로 가끔 그 친구를 앞설 수 있었다. 이제는 영어의 위력이 더 커진 것이다. 이때만이 유일하게 영어가 나에게 긍정적인 게이트키퍼로 작동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영어 특시가 공지됐다. 그 특시에 합격하면, 영어 관련 과목 6학점을 A+로 받을 수 있었다. 우리 과 동기들은 50명이 응시했다. 이 중에서 32명이 합격했다. 나는 18명에 속했고, 영어는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영어라는 게이트키퍼의 위력을 실감했다.
내가 미국인과 직접 대화를 해본 것도 대학에 입학해서였다. 신입생 시절에 나는 언제나 당당했다. 어찌 보면 살짝 우쭐댔다. 이화여대 역에서 2호선을 기다리고 있는데, 키 큰 백인의 미국인이 무언가를 물어보기 위해서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 미국인이 다가오니, 모세의 홍해가 열리는 듯 근방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피했다.
나만 피하지 않으니, 그가 나를 향해서 다가오더니 전형적인 미국식 발음의 영어로 질문을 쏟아냈다. 순간 내 머리는 하얗게 되었다. 다시 한번 그가 전보다 더 천천히 질문을 반복했다. 그때 명확하게 들리는 단어가 있었다. “Seoul National University”.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더 또박또박 질문을 반복했다. 이번에도 “Seoul National University”는 들렸으나, 나머지는 들리지 않았다.
세 번째 질문에는 대답해야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No, I’m not a Seoul National University student.” 그는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 나에게 멀어졌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가 궁금했던 사항은 내가 서울대 학생인지가 아니라, 서울대입구역을 가려면 오른쪽 방향의 열차를 타야 되는지, 왼쪽 방향의 열차를 타야 되는지, 이지 않았을까? 지금도 손발이 오그라든다. 그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대학 다니는 내내, 영어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이나 선배들은 미친 듯이 영어를 공부했다. 특히, Vocabulary 책을 고시 공부하듯 반복해서 암기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3학년 겨울 방학이 되어서, Vocabulary를 공부했다.
4학년이 되니, 슬슬 나의 미래가 걱정됐다. 그렇다고 심각하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미 3학년 2학기 즈음, S 전자에 입도선매되었다. 그래도 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취직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다수의 과 동기들이 그러하듯이, 나도 대학원 석사 과정 시험에 응시했다. 석사 시험에서도 영어는 게이트키퍼로 작동했다. 나는 첫 번째 석사 시험에서 영어를 가볍게 여긴 대가를 치렀다.
살짝 창피한 마음에 그냥 S 전자에 입사했다. 4주의 S 그룹 연수는 내가 복무했던 6개월 방위 훈련보다 더 빡쌨다. 나는 군대에 재입대한 줄 알았다. 일단 회사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서는 5:40 출근 버스를 타야만 했다. 집에서 회사까지의 거리는 30km 정도에 불과했지만, 출근 버스를 놓치면, 회사 출근은 오디세우스의 여정만큼 힘들었다. 이런 와중에 두 번째 석사 시험을 치렀다. 이번에도 영어의 게이트키퍼가 내 발목을 강력하게 잡아당겼다. 저번보다 더 쪽팔렸다. 그래서 미련 없이 6개월 만에 S 전자를 그만뒀다.
뭘 해야 될지 막막했다. 그냥 학교에 다시 나갔다. 10월이 되자, 변경된 석사 입시 요강이 공지됐다. 이번에는 구두시험만으로 절반을 선발했다. 나는 겨우 그 석사 시험에 통과됐다. 만약에 영어 시험을 치렀다면, 합격을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석사 과정 2년은 학부 2년보다 훨씬 더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번에도 졸업 후는 별걱정이 없었다. 석사 1학기 때, H 전자에 팔려 갔기 때문이다. 석사를 졸업할 때가 되어,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선배와 친해졌다. 그전에는 미국 유학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 선배는 나에게 상세하게 유학 시험과 유학 절차를 설명해 주었다. 팔랑귀를 가진 나는 미국 유학에 홀라당 넘어갔다.
회사에 다니면서, 주말에는 유학 시험공부를 했다. 일단 GRE를 대비하기 위해서 ‘Vocabulary 33000’을 구매했다. 이 책의 머리말에는 이걸 다 암기하고 나면, 33,000개의 Vocabulary 유추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설명하고 있는 Vocabulary의 개수를 세기 시작했다. 3,100개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살짝 대충 Vocabulary를 공부했다. 이번에도 영어의 게이트키퍼는 부정적으로 동작했다.
지지부진하던 차에, 엄청난 난관이 나에게 닥쳐왔다. IMF 사태였다. GRE 응시 비용은 120달러로 동일했지만, 사태 전에는 환율이 750원이어서, 채 100,000원이 되지 않았다. 사태 이후에는 환율이 2,200원으로 급등해서, 250,000원을 훌쩍 넘었다. 나는 부담 없이 유학 준비를 포기했다.
IMF 사태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나는 명예퇴직 명단에 올랐고, 미련 없이 명예퇴직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나는 다짐했다. 다시는 엔지니어를 하지 않겠다고. 나는 버려졌다는 생각에, 한동안 ‘이수역’이나 ‘이촌역’ 근방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나는 별 고민 없이, 1998년 7월부터 변리사 시험을 준비했다. 변리사 1차 시험에도 영어가 있었다. 이번에도 영어라는 게이트키퍼는 나를 막아섰다. 이듬해 나는 영어 대신에 일본어를 선택했다. 일본어 게이트키퍼는 가볍게 통과했다. 우여곡절 끝에 4년 4개월을 공부하여, 겨우 변리사가 됐다.
나는 중견 특허 법인에 취직했다. 거기에서 S 전자의 국내 특허를 담당했다. 내 업무에는 한국 특허 출원을 완료한 후에, 미국 특허 출원을 준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한국 특허 명세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 특허 대리인에게 전송하고, 미국 특허 대리인이 영어 번역문을 수정하는 것을 검토해야 했다.
처음에는 미국 대리인의 영어 번역문 수정을 그대로 컴펌하다가, 우연히, 미국 대리인이 영어 번역문을 수정하는 양에 비례해서, 비용을 청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유독 내 건을 담당하는 미국 대리인은 비용을 과다 청구하기 위해서, 형식적인 수정을 늘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가 수정한 내용의 3/4을 지워버렸다. 그는 바로 전화했다. 나는 관련 내용을 메일로 보낼 것을 요청했다. 그는 내가 자신의 수정을 지운 것에 대해서 장문이 항의 내용을 담은 메일을 매일 보냈다. 내가 답장을 보내지 않자, 그는 메일의 맨 아래에, 진한 빨간색으로 경고를 날렸다. “자신의 수정을 지운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를 조속히 보내세요!” 나는 결국 항복했다. 변리사가 된 이후에도, 영어는 부정적인 게이트키퍼가 되었다.
5년이 흘러, 그렇게 바라던 아들을 만났고, 나는 개업했다. 미국 특허 법인과 제휴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나의 영어는 짧기만 해서, 지지부진했다. 나는 업무에 도움 되기를 바라면서, 2009년부터 2012년까지 4년간 방통대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래도 영어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2013년에 방통대 영문학과에 2학년으로 편입했다. 그 당시에는 영문학을 열심히 공부하면, 영어 실력이 늘 것이라 기대했다.
방통대 영문학과의 커리큘럼은 어학보다는 문학에 집중되었다. 그전까지는 영시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Alliteration(두운)에서 Rhyme(각운)으로 전환되는 영시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영시를 조금 맛볼 수 있게 되었다. 핼러윈 축제 때, 애들이 외치는 “Trick or Treat”에서 Alliteration(두운)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배웠던 것이 제일 좋았다. 특히 ‘소네트 18번’은 지금도 나의 문학 상위 리스트에 위치해 있다. “So long as men can breathe or eyes can see,/So long lives this, and this gives life to thee.” “이 시가 살아 있는 한, 너도 영원히 살아 있으리.”
내가 편입할 당시에는 방통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이수 학점을 다 완료하고, 시, 소설, 희곡, 평론 중 어느 하나의 주제로 논문을 써야만 했다. 그리고 공인된 시험에서 소정의 점수 이상을 받으면, 졸업 논문을 면제해 줬다.
내 눈에는 ‘TOEIC 800점 이상’의 항목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4학년 2학기를 앞둔 2015년 8월 어느 날, TOEIC에 응시했다. 시험장에 들어서니, 이미 와있던 대학생들이 싸늘한 시선을 나에게 날렸다.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쏘곤대고 있었다. “공기업 꼰대 부장인가?”
40명의 수험생과 2명의 감독관을 포함해서, 내가 최고령이었다. 나는 순간 완전한 이방인이 되었다. 시험이 끝난 후에 다짐했다. “다시는 이런 시험을 보지 말아야겠다!” 나는 당연히 내 점수는 800점 이상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영어는 나에게 철저한 게이트키퍼였다.
내 점수는 ‘745점’이었다. 나는 4학년 2학기 이수 수업을 완료했다. 그렇지만, 졸업 논문을 쓰지 않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방통대 영문학과에 미련이 남지 않았다. 3년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문자 한 통이 전달됐다. “방통대 영문학과 학칙 개정으로 졸업이 확정되었습니다. 방통대에 방문하여 졸업증을 수령하세요.”
나처럼, 이수 수업은 완료했으나, 졸업 논문을 쓰지 않고 버텼던 학생들이 많았나 보다. 나는 바로 방통대로 찾아갔다. 학생증을 제시하니, 졸업증 이외에 ‘성적 우수자’ 상장도 같이 주었다. 4년 전에 ‘745점’ 받고, 좌절했던 순간이 떠오르며, 내가 영문학을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을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위로를 받았다.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 영어는 단순한 외국어를 넘어, 출세와 계층 상승의 문턱인 게이트키퍼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높은 성벽 위에 설치된 출입구의 열쇠처럼, 열쇠를 가진 자만이 그 안으로 들어가 출세의 기회를 얻는다.
그렇다면, 영어는 왜 게이트키퍼가 되었을까? 영어는 한국 사회에서 식민성과 세계화의 이중 굴레다. 미국 중심의 세계 체제,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 이후 산업화를 외래로부터 배운 한국 사회의 태생적 한계가 존재한다. 영어는 미군정 이후 권력의 언어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때부터 공무원 시험, 대기업 취업, 심지어 대학 입학까지 영어 점수는 문지방이 되었다. TOEIC, TEPS, TOEFL 등 이들 시험은 수많은 청년들에게 입장권을 부여하거나 박탈하고 있다.
해외 유학파, 원어민 수준의 발음을 구사하는 이들은 취업 시장에서 우대를 받으며, 때로는 실력 이상의 신뢰를 받는다. 반대로 국내파, 영어 발음이 서툰 이들은 “글로벌 감각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며, 불이익을 받고 있다.
한국인들은 유독 백인 미국인들에게 관대하다. 이는 식민성과 냉전의 조건 속에 뿌리내린 구조적 심리의 반영이다. 주한 미군과 미군정의 통치, 그리고 그 속에서 형성된 주종적 구조로 인해, 백인의 미국인은 단지 이방인이 아닌, 지시하는 존재, 심사하고 평가하는 존재가 되었다.
실제 백인 개인이 아닌, 그들을 둘러싼 이미지와 환상, 선진국, 자유, 정의가 덧입혀진 존재로 백인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 환상은 광고, 드라마, 로맨틱 코미디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관대함은 선의라기보다, 역사의 지배가 남긴 어두운 그림자일 것이다.
이 삐뚤어진 시각으로 우리의 재미교포는 1992년 LA 폭동을 겪었다. 한국인의 왜곡된 백인 중심의 시각과 소수자에 대한 외면이 어떤 비극적 결과를 낳는지를 잔혹하게 드러낸 사건이 바로 1992년 LA 폭동이었다.
로드니 킹이라는 흑인 청년에게 집단 구타를 가한 사람들은 백인 경찰들이었지만, 왜 한국인들이 피해자가 되었을까? 당시 LA 경찰들은 백인 거주 지역에는 신속히 개입했지만, 한인 타운은 방치되었고, 흑인 시위대는 한인 상점들을 집중적으로 약탈했다.
당시 한인들은 미국 사회에서 스스로를 ‘성공적인 소수자’라 자처하며, 백인 사회에 편입되기를 꿈꾸었으나, 정작 흑인 커뮤니티의 고통과 분노에는 공감하거나 연대하지 못했다. 백인 중심 세계에서 성실하고 조용한 이웃으로 인정받으려 했지만, 백인의 체계가 무너졌을 때, 한인들은 방패가 아니라 표적이 되었다. 흑인들의 눈에는 한인들은 단지 또 하나의 지배자였던 것이다.
1992년 LA 폭동은 한인들에게 “우리는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우리가 외면한 고통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뼈아픈 질문을 남겼다. 이 사건은 식민성과 계급성, 타자화에 물든 한국인의 자화상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내에서 서울을 바라보며 편입되기를 바라는 한국인들의 속성과도 일맥상통한다. 서울을 향한 갈망과 백인을 향한 동경, 이 둘의 모양은 다르지만 뿌리는 같다. 모두 ‘중심에 편입되고 싶은 열망’이 만들어낸 내면화된 위계 구조의 또 다른 얼굴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서울을 욕하면서도, 서울말을 배우려 하고, 백인을 경계하면서도 그들의 시선에 맞추어 웃는 이중적인 태도 안에는, 중심이 되지 못한 자의 슬픔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이것은 단지 개인의 문제도, 단순한 열등감도 아니다. 구조화된 위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체화된 생존 방식이며, 타인의 기준을 내면화한 자의 불가피한 자기 검열이다.
지리적으로는 반도지만, 역사적으로는 섬처럼 고립된 나라, 그것은 1945년 이후 대한민국의 진실된 자화상이다. 육지로 연결되어 있지만, 걸어서 나갈 수 없는 나라의 서쪽, 남쪽, 동쪽은 바다이고, 북쪽은 닫힌 경계다. 그리하여 한국은 물리적으로는 대륙의 일부이지만, 정신과 문명의 구조는 섬의 정서 속에 갇혀 있다.
바로 이 고립된 반도의 출구를 찾기 위해 한국인들은 바다를 건넜고, 그 바다 너머에서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한 이들은 귀국 후, 한국 사회의 주류가 되었다. 그들은 단지 학문을 배운 자가 아니라, 새 질서, 새 언어, 새 규범을 들여온 자들이었고, 한국 산업화의 권력 설계자로 자리 잡았다.
특히 IMF 사태 이후에는 미국물을 먹은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들은 지식의 소유자가 아니라, 질서의 번역자였기 때문에, ‘이들이 본 세계’, ‘이들이 들은 규범’을 한국에 이식할 수 있었다. 세계화 속에서 영어로 말하고, 서구 이론을 인용하고, 미국 네트워크에 연결된 사람이 한국 안의 보증된 현대인이 되었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영어는 단순한 외국어가 아니라, 삶의 중심부에 편입된 절대적인 스펙이다. 이는 단지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기술이나 자격증을 넘어, 문화적 권력의 언어로 작동하고 있다. 어떤 이에게 영어는 말이고, 어떤 이에게 영어는 계급이다.
심지어는 삶의 경로를 바꾸는 좌표이자, 사회적 인증 도장이 되었다. 우리는 그 도장을 가지려 애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 도장은 시험을 잘 본다고 해서 자동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시험은 단지 입구일 뿐, 그 너머에는 계급에서 문화 자본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체계가 존재한다.
한때는 나도 그 도장을 받고 싶어서 유학을 준비했다. 지금은 유학 없이도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시대에 도래했으며, 그 연결이 얼마나 깊고 진정성이 있는가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유학은 하나의 경로일 뿐, 세계와 연결된 삶은 이제 다층적이다. 스스로의 언어로 세계를 말할 수 있다면, 그 도장은 이미 내 안에서 조용히 새겨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영국 소설이나 미국 소설이 조금 이해되지만, 원어로 소설을 읽을 정도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존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이시구로의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나는 고딩 이후로 영어라는 타자의 언어를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 고딩 1학년 때 영어 회화 서클에서 에릭 시걸의 ‘Love Story’를 연극으로 공연했다. 나는 주인공 올리버를 연기했다. 지금도 그의 명대사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는 잊을 수가 없다. 이 대사를 대부분은 “사랑이란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대사의 맥락을 살펴보자. 올리버는 자신의 연인인 제니퍼가 백혈병으로 유명을 달리한 후에, 병원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는 제니퍼와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제니퍼가 유명을 달리하자, 올리버에게 “I’m sorry.”라고 위로를 건넨다. 그러자 올리버가 이 명대사로 답한다. 따라서 나는 올리버의 명대사를 “사랑이란 결말이 좋지 않더라도, ‘안 됐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로 번역하고 싶다.
영어는 대부분의 경우, 나에게 부정적인 게이트키퍼로 작동했지만, 지금은 한국어 다음으로 익숙한 언어로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나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아닐 수 있어도, 영어라는 타자의 언어를 충심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나는 지금, 언어 너머의 세계에 도달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