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강사
대학 신입생 때,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거기에서는 ‘단골손님’의 어원을 묻는 퀴즈를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옆 친구에게 이야기했다. “우리 시골에서는 무당집을 단골네라고 하는데.” 그 친구는 즉각 반응했다. “설마 단골손님이 무당하고 관련 있겠냐?” 놀랍게도 정답은 단골네의 손님이었다.
한국인들은 자신이 정해 놓고 가는 단골네가 있어서, 그에게 자신 가족의 모든 사주를 알려준다. 그런데 어머니들은 주로 남편이 바람나거나, 딸의 결혼식 날짜를 잡거나, 이사해야 할 때, 단골네를 찾는다. 그는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어머니들의 사정을 헤아려, 위로의 멘트를 날린다. “또 오셨군요, 이번에도 남편의 기운이 뒤숭숭하네요.”
단골네, 그 신비의 공간은 단지 운명을 점치는 곳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마음 깊숙한 곳, 슬픔과 희망, 두려움과 바람이 뒤섞인 감정의 피난처이다. 단골네와 단골손님은 신을 매개로 삶의 방향을 묻고, 마음의 무게를 털어놓는 사이다. 단골네는 그 가족의 사주팔자, 조상의 성정, 집안의 울림까지 꿰뚫고 있으니, 단골네와 이들은 거의 운명을 공모하는 관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단골네와 단골손님은 단지 손님과 주인의 관계를 넘어서, 마음의 결이 닿아 있는 사이인 것이다. 단골네는 그에게는 마음의 기슭을 비춰주는 등불 같고, 때론 울음을 대신 토해줄 입이며, 어쩌면 그 어떤 친구보다 더 오래, 더 깊게 자신을 기억해 주는 존재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말없이도 아는 사이고, 말을 꺼내기 전부터 속마음을 읽는 사이며, 운명을 사이에 두고 오래도록 대화해 온 존재다. 신과 인간 사이를 오가는 길목에서 마음을 마주해 온 오랜 벗인 셈이다.
디지털 문명이 눈부시게 발전해 버린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이 단골네를 찾는 이유는, 결국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를 절실히 갈망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빠르게 돌고, 말은 넘쳐나지만, 정작 내 마음의 진짜 모양을 끝까지 들어주는 귀, 그 떨림을 함께 떨 줄 아는 가슴은 점점 희귀하다.
지금 인간관계는 효율과 역할로 가득 찼지만, 자기 마음을 온전히 꺼낼 곳은 어디에도 없다. 내 말에 무게를 실어줄 이가 있다는 믿음, 내 상처에 신의 말로 위로를 얹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따뜻함 때문에, 자신과 마음이 통할 단골네를 찾아 나선다.
내 삶에서 가장 큰 난관은 아들이 5살 때 벌어졌다. 당시, 외아들인 나는 서울에 살고 있었고, 부모님은 광주에 살고 있었다. 부모님은 나를 가급적 자주 보고 싶어 했으나,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에 내려가는 정도였다.
그래서 그해 5월경에 어머니랑 아버지가 서울집을 방문했다. 지방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중에 핸드폰이 계속해서 울렸다. 전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엄청난 분노가 전달되고 있었다. “다시는 너희 집에 안 오마!” 이 말만을 남기고, 아버지는 전화를 확 끊었다.
나는 너무 불안했다. 무언가 엄청난 사달이 났음을 짐작하고 부랴부랴 서울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 보니, 아들과 아내는 울고 있었다. 아내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나는 일단 누나 집에 머물러 있는 어머니에게 찾아갔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역정을 냈다. “내가 너를 잘못 키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홀로 방에서 잤다.
다음날 회사에 일찍 출근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처형댁으로 가버렸다.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됐다. 분명히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두 여인이 다투고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바보 같았다.
누구를 찾아갈지 막막했다. 스마트폰에서 전화 목록을 스캔했다. 너무 창피해서, 스마트폰을 덮었다. 일단 친하게 지내는 여자 선배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 선배는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줬다. 내가 그 선배에게 뭐라고 말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고, 단지 만났다는 장면만이 흐릿하게 남아 있다. 일주일 후에 어머니랑 아버지는 광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내를 달래서 집으로 데려왔다.
3년이 흐른 뒤에 아내가 술자리에서 내게 물었다. “오빠 그때 왜 바로 안 데리러 왔어?” 나는 머뭇머뭇하다가 솔직히 대답했다. “나는 너무 두려워서 산으로 도망가고 싶었어.” 그러자 다시 물었다. “그럼, 아들과 나는 어떡하라고?” 나는 다시 답했다. “나는 네가 다 해결하고, ’오빠 다 해결 됐으니, 집으로 돌아오세요 ‘라고 신문에 광고해 주기를 바랐지.” 그러자 아내는 틈도 주지 않고, “이런 비겁한 새끼”라고 화를 냈다.
나에게 인생 난관이 닥쳤을 때도, 당시 나는 독서 목록을 보며, 책에서 솔루션을 찾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선배는 나에게 단골네였다. 어떠한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나 자신의 흔들림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나를 위로하며 일상으로 회복할 수 있는 기운을 줬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무수히 많은 선생님을 만났지만, 그 선생님들과는 마음을 통하지 못했다. 수많은 선생님을 만나도 마음이 외롭고, 수많은 지식을 배워도 마음이 메마른 까닭은 우리 사회의 교육이 ’가르침‘보다는 ’측정‘을 우선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나는 공자가 말한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를 마음에 새기고 있다. “학이불사즉망”은 ’배우기만 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로 해석되고, “사이불학즉태”는 ’고민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로 해석된다.
외부로부터 지식만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삶 속에서 되씹고 체화하지 않으면, 결국은 늘 남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이는 마치 지도만 들고 여행을 떠났으나, 길을 묻지도 않고, 풍광을 느끼지도 않은 채, 방향을 잃은 자와 같다.
한편, 스스로 고민하되, 기초가 되는 지식과 통찰을 배우지 않으면, 그 고민은 허공에 떠 있는 탑이나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흘러간다. 배우지 않고 고민하면, 세상을 온전히 알지 못한 채 오해하며, 자기 확신 속에 갇혀 타인을 오독하게 된다.
신기하게도, 공자가 이 멋진 경구를 남긴 2,200여 년 후에, 칸트도 인간 인식의 균형과 상호 보완을 중시하는 깊은 울림을 주는 문장을 이야기했다.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단골네는 감정의 지도자이고, 선생님은 이성의 지도자다. 단골네는 눈물이 머무는 곳, 가슴의 혼잣말이 울려 퍼지는 곳을 알아본다. 그는 삶의 느낌과 정서, 슬픔과 분노, 억울함과 기쁨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존재다. 그는 이론이 아닌 감각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해석이 아닌 공감으로 삶을 풀어준다. 단골네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리해 주는 정서의 길잡이다.
반면에, 선생님은 개념과 원리, 구조와 논리로 세상의 법칙을 가르치는 존재다. 그는 감정보다는 사유의 정확성, 위로보다는 논리의 정합성을 추구한다. 선생님은 흐릿한 생각을 정리해 주는 이성의 길잡이다.
다만, 인간은 감정과 이성이 분리될 수 있는 존재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때로는 단골네에게도 논리의 눈이 필요하고, 선생님에게도 마음을 쓰다듬는 손길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나는 단골네에 가까울까, 선생님에 가까울까? 아버지는 초딩 선생님이었다.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살아왔지만, 아들과 이야기하는 와중에, 내 말투에서 문득 아버지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이기적인 유전자의 위력일까?
지금 나는 단골네처럼 사람들의 정서를 읽고, 말 뒤의 말, 침묵 속의 울림까지 감지하고 싶다. 사람들의 슬픔과 정체성을 읽어 내고, 감정의 피난처나 무형의 위로도 공감하고 싶다.
동시에, 선생님처럼, 개념을 구조화하고, 비교하며, 비판하고 싶다. 이념과 사상의 줄기를 정리하며, 한 문장에 담긴 사유의 궤적을 따져 묻고 싶다. 아들에게 ’공자의 말씀과 칸트의 사유는 어디에서 만날까‘를 설명해 주고 싶다.
나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애쓰며, 정서와 이성이 만나는 경계에 선 안내자이고 싶다. 내가 쓰는 문장이 위로와 논리의 다리이며, 시와 개념을 서로 끌어안을 수 있기를! 내 안에서 말보다 그윽한 것을 들을 수 있고, 침묵보다 간절한 것을 노래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