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짓바람

일타강사

바짓바람으로 만땅 충전된 아버지 덕분에, 나는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에도 1월이나 2월에 태어나면 7살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나는 7월에 태어났음에도,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의 든든한 빽으로, 무탈하게 입학할 수 있었다.

아버지 바짓바람의 위력은 고딩 1학년 때, 확실하게 나타났다. 평소 나의 성적이나 공부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는, 고딩 연합고사가 끝나자마자, 3년 선배인 손위 누나에게 고딩 수학과 영어 과외를 주문했다. 나는 마지못해서 수학 과외를 받았다. 2달간 ‘정석 수학 Ⅰ’을 다 풀었다.

고딩 1학년이 되어서, 3월에 첫 시험을 치렀다. 나는 전교 49등으로 입학했지만, 3월 시험에서는 전교 7등의 성적을 받았다. 이후 나는 그 근처의 성적에는 단 한 번도 근접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바짓바람 약발은 3월까지만 미쳤나 보다. 그래도 수학 과목은 별 어려움 없이 공부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대학에 가서도 유지됐다.

다만, 나는 내 수학 실력이 엄청나다고 착각했다. ‘정석 수학 Ⅰ’의 앞부분은 대수이고, 뒷부분은 기하여서, 용두사미처럼 대수는 열심히 공부했지만, 기하는 흐지부지했다. 나는 대체로 대수 관련 내용일 경우에는 수학 성적이 좋았지만, 기하 관련 내용일 경우에는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이러한 기조는 전공과목을 공부할 때도, 신기할 정도로 비슷했다. 나는 대수랑 제일 유사한 ‘회로이론’을 가장 잘했다. 그 덕분에 변리사 시험에서도 ‘회로이론’을 선택했고, 선택과목의 점수는 언제나 최상위를 유지했다. 결국, 아버지의 바짓바람 덕분에 변리사 시험까지 무탈하게 합격할 수 있었다.

내가 학창 시절일 때는, 바짓바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어머니들의 교육열, 헌신, 집요함을 풍자하는 치맛바람의 전성기였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밤 10시까지 자율학습을 운영하고 있어서, 치맛바람은 주로 저녁 도시락에서 강력하게 작동됐다. 치맛바람의 척도는 국의 존재로 증명되었다. 우리 반에서 가장 강력한 치맛바람을 가진 친구는 매일 저녁을 먹을 때마다, 따끈한 국물을 들이켰다.

다행히 나는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친구가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이것도 여우가 높이 있는 포도를 따지 못하자, 정신 승리하며 “저 포도는 신맛일 거야”라고 평가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일까?


아버지는 고딩 3년 내내 내 성적에 관심이 많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고딩 2학년 이후로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나는 서울로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본가에 드문드문 방문했으므로, 19살 이후에는 1년에 20일 정도 같이 지냈다.

우리 시대의 어르신들이 그러하듯이, 아버지는 당신의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는 드물게 웃었다. 47년간 같이 살면서, 아버지의 환한 웃음은 3번 정도 봤다. 첫 번째는 19살에 대학 합격했을 때. 두 번째는 32살에 변리사 시험에 합격했을 때. 마지막은 38살에 아들 낳았을 때. 물론 아버지는 내가 아들을 낳았을 때, 가장 환하게 웃었다. 내 평생, 딱 세 번 효도한 셈이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네 번째 효도는 아들에게 대리로 시켰을 것이다.

예전에는 아버지가 그늘처럼 자녀들 곁에 있었다면, 요즘 아버지들은 그늘을 걷고, 자녀들 전면에 나서기도 한다. 바짓바람은 치맛바람과는 결이 다르다. 치맛바람이 정서적 헌신에서 비롯된 사랑이라면, 바짓바람은 자녀의 삶을 미세 조정하려 들며, 실패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제거하려 한다.


아버지 바짓바람의 위력을 톡톡히 누린 나는, 아들에게도 바짓바람을 불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권력의 언어로서 영어의 게이트키핑 능력을 너무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의 영어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아들을 6살 가을 학기부터 영어 유치원에 입학시켰다. 아들은 처음에는 힘들어했지만, 곧 적응하며 즐겁게 영어 유치원을 졸업했다. 4학년 때부터는 대치동 영어 학원에 보냈다. 그 학원에서는 영어, 과학, 사회, 3과목을 미국 교과서로 가르쳤다. 이 중에서 과학이 가장 어려웠다.

미국 4학년 과학 교과서의 내용은 화학이었다. 그 학원은 예습을 요구했고, 과학은 내가 직접 가르쳤다. solute는 용질, solvent는 용매, solution은 용액이었지만, 4학년 아들은 한국 용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번역하지 않고, 예시적으로 설명했다. “solute는 소금, solvent는 물, solution은 소금물.” 아들은 다시 물었다. “용해가 뭐야?” 나는 답했다. “melt는 일반적으로 녹이는 것이고, dissolve는 가루를 물에 녹이는 것이야. 즉 용해는 소금을 물에 녹이는 것이야.”

이런 생활이 1년 6개월 동안 계속 이어졌다. 나는 고민했다. “왜 이 삽질을 해야 할까?” 혹시 ‘아들이 다니는 학원은 미국 중학교 입학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닐까’라는 회의가 들었다. 우리는 이 영어 학원은 더 이상 다니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제는 목표가 특목고로 바뀌었다. 나는 아들에게 ‘중등 하이탑 과학’을 가르쳤다. 심지어는 아들과 절친, 두 명을 매주 가르쳤다. 가르치는 내용에는 물리 화학, 회로 이론, 반도체 이론 같은 어려운 내용이 포함됐다. 특히 회로 이론을 제일 열심히 가르쳤다.

나는 회로 이론을 가르칠 때마다, 아재 개그를 날렸다. “회로 이론 잘하면, 회로 술 마실 수 있다.”, “회로 이론 열심히 공부하면, ‘백년해로’한다!” 아들과 절친은 내 개그를 잘 받아줬지만, 아내는 아재 개그를 날리면,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아들은 대치동 특목고 준비반에 합류했고, 결국은 특목고에 합격했다. 아들은 내가 대학 입학해서 첫 중간고사 볼 때까지만 기뻤던 것처럼, 중간고사 이후에는 좌절의 늪에 빠져 있다. 내가 아들에게 내가 이루지 못했던 로망을 이식시켰던 것일까?


아버지랑 나는 19살 이후에 데면데면 지냈다. 나는 아버지가 경험을 통해서 체득한 지혜를 거의 듣지 못했다. 내가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했던 기로마다, 나는 그냥 선무당이 사람 잡듯, 막연하게 선택했다. 아버지랑 대화할 수 없는 시점이 되어서야, 경험으로 체득한 지혜는 서가에 꽂혀 있는 책처럼 잘 정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꼭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보다, 진정한 지혜는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해줬다면!

나는 장자의 수레바퀴 장인 이야기를 마음속에 새기고 있다. “수레바퀴를 깎는 일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너무 느슨하게 깎으면 헐겁고, 너무 꽉 깎으면 바퀴가 맞지 않아 쓸 수 없습니다. 적당히 깎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제 손끝의 감각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수레바퀴 장인은 자신의 기술이 말이나 글로 도무지 전해지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오직 몸과 시간 속에서 체득되는 것이라. 수레바퀴 깎기는 단순한 손재주가 아니라 전체 구조의 균형과 긴장감을 파악하는 직관의 기술이다. 이는 오랜 시행착오 속에서 손과 눈, 마음속에 새겨진 지혜다.

결국 장자는 이렇게 속삭이고 있다. “진짜 지혜는 소음처럼 요란한 말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침묵처럼 잦아든 손끝의 떨림 속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가르치려 하기보다 살아내는 자 옆에 머무는 자에게 비로소 전해진다.” 아들에게 이 느낌을 시로 전한다.


깎는 자의 손끝


나는 한 생을 깎아

바퀴 하나를 만들었다

너무 느슨하면

삶이 헛돌고

너무 조이면

숨이 막히지


나는 바람이 지나갈 틈을

말로 전하지 못한다

그러나 손끝은 안다


너는 묻는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나는 칼을 놓고 웃는다

직접 깎아 보렴

그러다 보면 너만의 감각이 깃들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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