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봉과 일타강사

1990년대 초반에 거로 출판사의 ‘VOCABULARY WORKSHOP’은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 당시에는 영어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주변 선후배들이나 친구들 십중팔구는 VOCABULARY WORKSHOP을 공부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VOCABULARY WORKSHOP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때 가장 재미있는 단어는 ‘Anonymous’였다. ‘익명’이라는 뜻인데, 익명이라는 말 자체에 대한 개념을 몰랐다. 익명은 글자 그대로 해석해 보면, 이름을 은닉하는 것이다. 결국 익명성을 이해하려면, 정체성을 먼저 이해해야만 하지만, 놀기 바빴던 그때는 정체성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사회는 1970년대 후반 ‘과학입국’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고, 초딩 4학년 무렵에는 원자력을 ‘제3의 불’이라 지칭하며, 마치 우리의 미래가 제3의 불 원자력에 달린 것처럼 나발을 불어 댔다. 그리고 과학 글짓기 대회, 포스터 대회 등을 개최하며, 온갖 사탕발림을 내 손에 쥐어 줬다.

이러한 펌프질에 홀라당 넘어가서는, 나는 초딩 6학년 때부터 반드시 과학자가 되어, 노벨상을 타겠다는 가당치 않은 꿈을 꾸었다. 고딩 1학년 말에 문과와 이과를 선택할 때도 1초도 주저하지 않고, 이과를 선택했다.

고딩 3학년 때 전공 학과를 선택해야 될 무렵에는, 오로지 다른 사람들에게 우쭐하면서도 재수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에, 적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모의고사 점수에 맞춰서 전자공학을 골랐다. 대학을 합격해서는 단지 3개월까지만 기뻤다. 신입생 첫 시험은 물리였고, 첫 물리 시험은 완전히 개 망했다. 그 점수를 보고서야 ‘전자공학’이라는 꽝을 뽑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후 대학 시절은 유흥의 탄알을 대기 위한 개인 과외와, 개인 과외로 벌어들인 탄알을 소진하는 진탕의 세월로 채워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990년대 중반에는 전자공학과를 졸업하면, 대기업 3 사중 어느 하나에 입사할 수 있었으므로, 정체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그럭저럭 시험을 방어하며, 학부와 석사를 졸업했다. 그러다가 삶의 궤적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IMF 사태에 직면하고 나고서야 ‘이제는 뭘 해 먹고살지’라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엔지니어에서 변리사로 전직했고, 그 이후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다가, 인생 4학년에 진입하니,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저만치 훅 가버렸다. 정보도, 변화도, 영상도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의 파도처럼 우리를 덮쳤다. 이러한 파도 속으로 떠내려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5미터 앞을 내다보기 힘든 안갯속에 갇힌 것처럼 막막하기만 했다.

대학 시절에 술독에 빠져 흘려보냈던 허송세월을 만회하기 위해서, 인문학 3대 주제 중 역사 관한 책을 미친 듯이 읽어 댔다. 특히, 대한민국이 한 번도 쥐어보지 못한 헤게모니를 움켜쥐고 세계를 호령했던 서양 역사에 관한 책을 집중적으로 읽었다.

문득, 40대 중반에 들어서자, ‘한국’이라는 안 이쁜 엄마를 버리고, 이뻐 보이는 ‘미국’이라는 엄마를 아무리 눈이 빠져라 쳐다본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철학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철학은 ‘시대의 아들’의 이라고 불리며, 그 시대의 모순을 지적하고,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철학자 자신만의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었다. 다만, 현재 우리 사회의 모순을 깔끔하게 지적하는 철학책은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을 발견했다. 임어당은 이 책에서 1930년대의 중국 사회와 중국인에 대해서 당당하고 유머러스하게 서술하고 있다. ‘생활의 발견’를 다 읽고 나서, 나도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책을 써보고 싶었다. 하지만 의욕만 앞설 뿐, 구체적인 목차는 잡지 못했다.

이후에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책을 쓸 거라는 이야기를 많은 친구들에게 했지만, 반응은 시큰둥했다. 한 친구는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제호는 너무 추상적이어서,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어렵다고 충고했다. “그냥 포기할까?” 생각하다가 내 마음을 끄는 두 가지 사건을 알게 됐다.


하나는 1964년에 발생한 “무즙 엿 먹어보라” 사건이다. 1964년 서울시 중학교 입시 문제에서 엿기름 대신 넣을 수 있는 것을 묻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답은 ‘디아스타제’였지만, 보기에는 ‘무즙’도 제시됐다. 무즙을 선택한 학생들 중 한 문제 차이로 떨어진 학생은 38명이었다. 우리 어머니들은 서울시 교육청 앞에서 기어코 무즙으로 엿을 만들었다. 그리고 서울시 교육청 정문에 무즙 엿을 걸고는, “무즙 엿 먹어보라!”라고 외쳤다.

살짝 무섭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했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한국인들의 높은 성취동기로 인한 경쟁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놀라운 점은 1960년대는 먹고살기도 어려웠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어머니들은 뜨거운 치맛바람을 보여준 것이다. 이 치맛바람의 전통은 요즘에는 ‘일타강사’로 면면히 이어졌다. 이 진화는 한국 사회가 아직도 모두의 교육이 아닌 내 자식만의 교육 속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다.


다른 하나는 2002년 월드컵 당시에 붉은 물결이 시청 광장을 뒤덮고, 태극 문양이 서울 도심의 심장을 뛰게 했던 거리 응원이었다. 그전에도 한국인이 노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2002년 거리 응원 장면엔 언제나 공감과 연대가 흘러넘쳤다. 이 거리 응원은 노는 민족의 열정적 해방구이자, 공동체의 울림에 응답한 외침이었다. 이 외침은 단지 축구만을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의 축제였다. 나는 그 멋진 역사의 현장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내 뇌리에는 2002년 시청 광장을 빼곡히 뒤덮었던 붉은 물결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2002년의 붉은 물결은 2024년 12월 어느 저녁에 여의도 광장에서 응원봉을 든 우리의 후배들이 지드래곤의 ‘삐딱하게’를 다 같이 열창하며, “여신이여 노래하소서, 민중의 분노를”을 외치는 장면에서, 바로 겹쳐졌다. 응원봉은 원래 아이돌 공연장에서 흔들던 열광과 사랑의 도구였지만, 우리의 후배들은 자신들이 가장 아끼는 응원봉을 들고 나와, 여의도 광장 공간을 공동체로 바꾸는 마법을 이어갔다.

2002년 시청 광장은 희망을 향한 축제 무대였다. 우리는 놀고 싶었고, 기뻐하고 싶었고, 같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2024년 여의도 광장은 분노를 딛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무대였다. 나는 우리 후배들이 사적 열정을 공적 분노로 연결시키기 위해서 응원봉을 흔드는 광경에 흠뻑 빠져들었다.


한국인은 응원봉을 들고 광장에 모이기도 하고, 일타강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밤새 공부하기도 한다. 이 두 장면은 얼핏 전혀 다른 풍경처럼 보이지만, 열정적인 존재로서의 한국인은 집단적 몰입과 개인적 출세를 동시에 좇고 있다.

응원봉은 단순한 플라스틱 조명봉이 아니라, 공동체적 리듬에 동참하고 있다는 증표이다. 그리고 나 또한 이 열정 속에서 반짝이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갈망이다. 우리는 나 혼자 빛나기보다는, 함께 빛날 때 존재감을 느낀다.

또한, 응원봉은 한국인의 놀고 싶은 욕망의 표상이다. 이것은 놀이를 향한 갈망이 마침내 손에 쥐어질 수 있는 구체적인 도구가 되었을 때, 금기 너머의 해방을 눈부시게 흔드는 가이드다. 한국이 1960년대~1980년대의 고도 성장기일 때, 우리 사회는 나라 전체가 ‘공장에서 나라를 일으키는 병사’처럼 움직였다. 특히 이때는 노는 것을 죄악시하기까지 했다.

노는 자는 게으른 자이자 실패자라는 등식이 사회 전체에 퍼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노는 시간은 곧 뒤처지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노는 것이 죄가 아니라 존엄을 회복하는 행위임을 배워가고 있다. 응원봉 하나, 이것을 쥔 우리 후배의 웃음 하나가 그 회복의 증거일지 모른다.


한편, 일타강사의 세계는 고립된 승리의 전장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광장의 동지이기보다는, 실내의 적이다. “우리 모두 잘 되자!”는 덕담은 잠시 접어두고, “내 자식만큼은 살아남아야 한다!" 는 개인적인 절박함이 지배하는 세계다.

그렇다면, 일타강사는 과연 한국 사회에서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그는 분명히 학생들이 가장 열심히 듣는 목소리이며,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존재다. 하지만 그는 가르침의 본질을 나누기보다는, 성취의 지름길을 파는 기술자에 더 가깝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그를 선생으로 추대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에게 요구하는 교육이란 신분 이동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응원봉과 일타강사는 서로 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 열매다. 그 뿌리는 바로 한국인의 정서 속 깊이 깔린, 한 번 마음을 빼앗기면 끝까지 가고야 마는 기질, 공감과 경쟁을 동시에 껴안고 싶은 아이러니한 욕망이다. 어쩌면 나도 이 ‘뜨거운 얼음’ 같은 딜레마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 모순적인 두 가지 주제, 응원봉과 일타강사에 대한 이중주를 다양하게 그려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