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조각의 무게
혜진은 결혼이라는 성이 이렇게 한순간에, 소리소문없이 무너져 내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중년의 삶은 비바람이 쳐도 잔잔함을 잃지 않는 깊은 호수와 같을 것이라 믿었지만, 그 믿음은 발밑부터 균열이 일어나 산산조각 났다. 이혼 서류에 마지막 도장을 찍고, 남편의 짐이 모두 빠져나간 집으로 돌아온 첫날. 현관문을 열자 낯선 적막이 그녀를 맞았다.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는 듯한 공허함 속에서, 그녀의 구두굽 소리만이 유난히 크고 서럽게 울렸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사 후 텅 빈 벽에 덩그러니 남은, 낡은 가족사진 한 장이었다. 몇 년 전 여름휴가 때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 사진 속 남편의 팔은 아이들을 듬직하게 감싸고 있었고, 혜진은 그 옆에서 눈이 부신 듯 살짝 찡그리면서도 세상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이들의 무릎엔 모래를 잔뜩 묻힌 채 넘어져 생긴 상처가 선명했다. 그때 그녀의 삶에는 어떤 굴곡도 보이지 않았다. 주말 아침, 네 식구가 거실 바닥에 뒹굴며 간지럼을 태우다 함께 웃던 그 순간들이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평화는 서서히, 조용히 찾아온 변화에 의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결혼이라는 성은 거대한 태풍 한 방에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성벽 곳곳에 물이 스며들어 기반이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한 방에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난 것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밤늦도록 이어지던 대화가 어느새 끊기고, 함께 마주 보고 웃던 순간들은 점차 사라졌다. 일 년 전쯤의 어느 저녁 식탁이 떠올랐다. 그녀는 정성껏 저녁을 차렸지만, 남편과 아이들은 식탁에 앉자마자 각자의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혜진은 그 어색하고 긴 침묵을 견디기 위해 애써 TV 소리를 키웠다. “오늘 회사에서 힘든 일 있었어요?” 그녀가 용기를 내 물었지만, 남편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어, 그냥” 하고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 순간, 식탁 위 음식들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처럼, 그들의 관계도 온기를 잃어가고 있음을 혜진은 홀로 깨달아야 했다. 그 미세한 균열들이, 마치 종이에 물이 스며들듯 결혼의 단단한 기반을 조금씩 허물고 있었다.
결국 그 균열 위로 들이닥친 것은, 법정이라는 차갑고 무거운 공간이었다. 이혼 소송의 첫 변론기일, 오래된 서류 냄새와 먼지, 그리고 사람들의 낮게 깔린 불안감으로 가득한 가정법원의 분위기는 혜진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숨 막혔다. 변호사가 기계적인 목소리로 낭독하는 '준비 서면'에는 그녀가 남편과 함께 쌓았던 모든 추억이 차갑고 건조한 활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사랑의 약속은 온데간데없고, 한 푼이라도 더 가져가기 위한 첨예한 논쟁만이 오갔다.
“2018년 7월, 제주도 가족 여행에서 지출된 경비는 부부 공동 재산 형성에 대한 기여도를…”
변호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혜진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때의 여행은 아이들이 졸라서, 수개월간 생활비를 아껴 겨우 떠났던 소중한 추억이었다. 타는 듯한 햇살 아래서 아이들과 물장구를 치고, 서툰 솜씨로 끓인 해물 라면을 나눠 먹으며 행복해했던 그 순간이, 고작 ‘공동 재산’이라는 단어로 박제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소리치고 싶었다. ‘그건 돈이 아니에요, 내 인생의 한 조각이란 말이에요!’ 하지만 목구멍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는 결혼 전 남편과 함께 썼던 '버킷리스트'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낡은 노트 한 귀퉁이에 삐뚤빼뚤하게 적어 내려갔던 그들의 꿈. '나란히 앉아 함께 늙어가기',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걷기', '손주들의 재롱을 함께 보기'. 그때 그들의 눈은 미래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차가운 법정에서는 그 모든 꿈들이 한낱 허상으로 변질된 것처럼 느껴졌다. 버킷리스트는 이제 서로의 소유물 목록이 되어, 법정의 날카로운 단어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은 그녀의 삶이, 그녀의 영혼이 완전히 해체되는 고통스러운 현장이었다. 혜진은 이혼이라는 태풍이 끝난 줄 알았지만, 그것은 잔해 위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전쟁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