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 길에서 만난 이혼 - Part9

깨진 조각의 무게

by sarihana

9장. 나를 빚어내는 시간


혜진은 늦은 밤, 거실의 불을 끈 채 소파에 홀로 앉아 창밖의 짙은 어둠을 바라보았다. 어떤 슬픔은 태풍처럼 모든 것을 부수며 한순간에 몰아치고, 어떤 슬픔은 장마철의 눅눅한 공기처럼 서서히 스며들어 존재의 모든 것을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녀는 이제 온몸으로 알았다. 이혼은 분명 그 둘 모두였다.


태풍이 지나간 후, 뼛속까지 스며드는 끈질긴 비를 견디기 위해, 그녀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친구 지연의 조심스러운 권유로, 동네의 작은 여성 등산 동호회에 가입한 것이다. 처음 산에 오르던 날, 그녀는 등산로 입구의 계단을 오르면서부터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심장은 터질 것 같았고 허벅지는 천근만근 무거웠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포기하고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수십 번도 더 들었다. 그때, 동호회 회장이라는 햇볕에 건강하게 그을린 중년의 여자가 그녀에게 말없이 오이 하나를 건넸다.


“처음엔 다 그래요. 남들 보지 말고, 자기 호흡만 보고, 딱 한 걸음만 더 가보는 거예요.”


그녀는 오이를 받아 한입 베어 물었다. 시원하고 아삭한 맛이 온몸의 세포를 깨우는 듯했다. 메마른 입안에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다시 흙길에 등산화를 올리고, 정말 딱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또 한 걸음을.


그렇게 수백, 수천 번의 한 걸음이 모여 마침내 정상에 섰을 때, 혜진은 눈앞에 펼쳐진 풍경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그녀를 괴롭히던 모든 문제가 있는 복잡한 도시가 발아래 장난감처럼 펼쳐져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땀을 비 오듯 흘리는 동안,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무거운 생각들이 정상의 시원한 바람에 씻겨 허공으로 흩어지는 듯했다. 산을 오르는 행위는, 무너진 그녀의 삶을 다시 한 층 한 층 세워나가는 과정과도 같았다. 길가 바위틈에 핀 이름 모를 들꽃을 발견하고 한참을 들여다보는 작은 여유도 생겼다.


그녀의 회복은 거창한 곳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느 주말 오후, 그녀는 10년 넘게 집 안의 분위기를 지배하던, 남편의 취향이 묻어 있던 칙칙한 갈색 가죽 소파 커버를 벗겨냈다. 먼지를 털어내고, 자신이 늘 원했던, 햇살을 머금은 듯 환한 아이보리색 천으로 된 새 커버를 씌웠다. 그것만으로 집 안의 공기가 한결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기세를 몰아 그녀는 남편이 시끄럽다며 싫어했던, 젊은 시절 즐겨 듣던 록 음악 CD를 찾아 틀었다. 쿵쿵거리는 드럼 비트가 잠자던 심장을 울렸다. 청소기를 돌리는 그녀의 발걸음이 경쾌하게 리듬을 탔다. 사소하지만 온전한,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는 그녀만의 선택이었다.


마르지 않을 것 같던 슬픔의 늪 속에서 그녀의 정신적, 신체적 상태도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이유 없는 심장의 두근거림으로 잠 못 이루던 밤 대신, 산행 후의 기분 좋은 피로감과 함께 깊은 잠을 자게 되었다. 모래를 씹는 듯했던 식사는 다시 맛을 되찾았다. 혼자 차린 소박한 밥상이었지만, 밥이 달게 느껴졌다. 텅 비었던 위장에는 음식이 채워지기 시작했고, 핏기 없던 얼굴에는 서서히 혈색이 돌았다. 늘 움츠렸던 어깨가 펴지고, 거울 속 자신의 눈빛에 희미하게나마 힘이 돌아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더 이상 무기력하게 앉아 있지 않았다. 주말이면 산에 올랐고, 평일 저녁에는 흙을 만지며 자신의 손으로 새로운 형태를 빚어냈다.


슬픔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비 온 뒤의 흙냄새처럼 그녀의 삶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슬픔은 그녀를 짓누르는 고통이 아니라, 그녀를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준 삶의 일부이자 자양분이었다. 태풍을 피하기만 했다면 몰랐을, 온몸으로 비에 젖고 땀 흘리며 얻게 된 용기였다. 혜진은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며, 이제는 그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오히려 그 비가 갠 뒤에 찾아올 눈부신 무지개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전 09화굽이 길에서 만난 이혼 - Part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