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 길에서 만난 이혼 - Part8

깨진 조각의 무게

by sarihana

8장. 작은 빛의 틈


경찰서에서 아이를 데려온 날, 집 안의 공기는 시베리아 벌판의 그것처럼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둘째 지훈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닫아버렸고, 혜진은 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심호흡을 하고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이는 책상에 앉아 등을 돌린 채 창밖만 보고 있었다. 그 작은 어깨는 분노와 방어 기제로 갑옷처럼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혜진은 마음속에서 들끓는 화와 원망, 그리고 지난밤 뜬눈으로 지새우며 느꼈던 지옥 같은 공포를 애써 눌렀다. 여기서 소리를 지르는 것은 아이를 더 깊은 동굴 속으로 밀어 넣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침착하게, 그러나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화내지 않아. 그냥... 네 마음이 어떤지, 왜 그랬는지 정말 알고 싶어서 그래." 아이는 대답 없이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혜진은 아이의 책상 옆에 조용히 앉아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 엄마가 이혼해서 그런 거지? 아빠가 보고 싶고, 모든 게 엉망이 된 것 같아서 화가 나는 거지?"


‘아빠’라는 단어에 아이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혜진은 아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되, 가장 중요한 선을 그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고 화가 나도, 이렇게 말없이 집을 나가는 건 정말 안 돼. 엄마는 네가 안전하길 바라. 세상이 다 무너진 것 같아도, 우리가 전처럼 살 수는 없어도, 이혼했어도... 우리는 여전히 가족이니까."


가족. 그 한마디가 아이의 마지막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아이는 갑자기 몸을 돌려 책상 위로 엎드렸다. 그동안 꾹꾹 눌러 참았던 울음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눈물이 아니었다. 지난 몇 달간 쌓아왔던 분노와 슬픔,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깊은 불안과 외로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절규였다. 혜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그저 다가가 가늘게 떨리는 아이의 등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괜찮다고, 울어도 괜찮다고. 그 순간, 혜진은 굳게 닫혀 있던 아이의 마음의 문에 아주 작은 틈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혜진은 아이들의 상처를 덮어두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녀는 며칠 뒤, 두 아이를 거실에 앉히고 솔직하게 제안했다. "우리, 힘들면 이야기해 주는 연습을 해볼까? 꼭 엄마가 아니어도 괜찮아. 상담 선생님이랑 같이 이야기를 나눠봐도 좋고. 혼자만 끙끙 앓다가 폭발하는 건,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어."


이후 혜진과 아이들은 매주 토요일 저녁 9시, 거실에 모여 앉아 함께 영화를 보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 처음 몇 주는 고문에 가까운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세 사람은 소파의 양 끝과 바닥에 각각 떨어져 앉았고, 영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각자의 방으로 사라졌다. 혜진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묵묵히 팝콘을 튀기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료수를 준비하며, 그 시간을 지켜냈다.


변화는 네 번째 토요일에 찾아왔다. 그날 본 영화는 주인공이 역경을 딛고 꿈을 이루는 진부한 성장 영화였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지훈이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무심한 척 한마디를 던졌다.


“저 주인공, 좀 답답하네. 나 같으면 저렇게 안 했을 텐데.”


혜진의 심장이 쿵, 하고 희망으로 울렸다. “어떻게?” 그녀가 묻자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날 밤, 그들은 처음으로 영화에 대해, 그리고 영화 속 인물의 선택에 대해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그것은 단순한 영화 감상평이 아니었다. 서로의 생각과 가치관을 엿보고,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아주 작은 소통의 시작이었다.


그 대화를 방문 틈으로 가만히 듣고 있던 첫째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며칠 뒤, 혜진이 끙끙거리며 의자 위에 올라서서 높은 곳의 전구를 갈아 끼우려 할 때였다. 늘 방에만 있던 현우가 조용히 다가와 말없이 흔들리는 의자를 두 손으로 단단히 받쳐주었다.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지만, 그 무심한 행동 속에는 ‘나도 여기에 있어요. 나도 이 가족의 일부예요.’라는 작은 신호가 분명히 담겨 있었다.


혜진은 아이들에게 이혼이 가족의 끝이 아님을, 오히려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려는 완벽한 엄마가 되려 애쓰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약점과 불안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아이들과 함께 비틀거리며 성장하는 길을 택했다. 그 작은 빛의 틈으로, 새로운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전 08화굽이 길에서 만난 이혼 - Part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