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조각의 무게
혜진은 문득 깨달았다. 세상에는 작은 균열에도 맥없이 깨져버리는 사람이 있고, 굳건히 깨진 조각을 붙여 나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혼이라는 고통은 결코 작은 굴곡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생의 모든 지도를 찢어버리고,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거대한 재앙과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깨져버린 채 무너져 내리는 쪽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남은 힘을 다해 깨진 조각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시도는 십여 년간 창고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낡은 수채화 물감을 꺼내 드는 것이었다. 먼지 쌓인 이젤을 펼치고 새하얀 캔버스를 올렸을 때, 그녀는 깊은 무력감에 휩싸였다. ‘무엇을 그려야 하지? 내 안에는 잿빛 절망밖에 없는데.’ 붓을 든 손이 떨렸고, 짜낸 물감들은 뒤섞여 캔버스 위에서 흙탕물처럼 번져나갔다. 검은색, 붉은색, 탁한 보라색. 그녀는 캔버스를 찢어버리는 대신, 그 위에 마른 붓으로 할퀴듯 긁어내고, 물을 뿌려 얼룩을 만들며 자신의 감정을 토해냈다. 한참을 몰두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캔버스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혼돈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조금 가벼워져 있었다. 그 모든 것은 거창한 '치유'가 아니라, 삶이 완전히 멈추는 것을 막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 시절 그림 동아리를 함께 했던 친구, 지연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혼 소식을 듣고도 한동안 연락을 망설였다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혜진아, 혹시… 시간 되면 우리 동네 작은 화실에 한번 놀러 올래? 그냥 멍하니 앉아 흙냄새라도 맡고 가.”
망설임 끝에 찾아간 화실은 흙과 나무, 유약 냄새로 가득했다. 그곳에서 혜진은 캔버스가 아닌, 차갑고 단단한 흙덩이를 마주했다. 지연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녀의 손에 흙을 쥐여주었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정답은 없어.”
혜진은 무심코 흙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먹하고 차갑던 흙이, 그녀의 손길에 점차 온기를 품고 부드러워졌다. 짓이기고, 두드리고, 쌓아 올리는 동안, 단단하게 뭉쳐 있던 그녀의 마음속 응어리가 조금씩 풀어지는 듯했다. 물레 앞에 앉아 흙을 올리고 페달을 밟자, 흙덩이가 맹렬하게 돌기 시작했다. 중심을 잡으려는 흙과 그것을 다스리려는 그녀의 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몇 번이고 흙덩이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하지만 혜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의 손안에서 흙이 조용히 길을 내주며 솟아오르는 순간, 그녀는 희미한 희열을 느꼈다.
그날 그녀는 입구가 살짝 비뚤어진 찻잔 하나를 만들었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오롯이 그녀의 손으로 빚어낸 첫 번째 형태였다. 그녀는 완성된 찻잔을 보며, 그 불완전함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모습 같아 애틋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난 굴곡을 외면하는 대신, 그 굴곡을 통해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고 흙을 만지며 그녀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나'를 만났다. 엄마도, 아내도 아닌 그냥 '혜진'으로서의 시간. 그녀는 깨진 조각들을 대충 이어 붙이는 대신, 그 틈 사이로 새로운 빛을 스며들게 했다. 그 빛은 그녀의 삶에 난 굴곡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 굴곡을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채워가는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