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비례해 제주는 더욱 익숙한 곳이 되어간다. 처음 제주를 찾았을 때는 푸른 바다, 다소 이국적인 풍경과 식물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름만 들어도 풍경이 그려지는 장소들이 여러 곳 생겼다.
여행의 방식도 바뀌었다. 처음에는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 여행을 다녔다. 다음엔 한라산과 오름을 올랐다. 며칠간 시간을 내어 올레길을 걸어보기도 했다. 자동차가 없으면 못 다닐 것 같았는데, 이제 제주도에서 버스를 타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다.
제주도에서 뭘 해야 새로울까?
나는 한 곳에서 오래 머무는 여행을 계획했고, 그 첫 장소가 협재해수욕장이 되었다.
9월 초, 올해는 여름이 유난히 길다.
협재에 도착한 첫날, 해 질 녘에도 바닷가에는 수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노을이 질 시간이 가까워지자, 해수욕장 끝자락에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의 약속이나 한 듯,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앉는다. 우연히 그 행렬에 동참했다.
낮에 온 비 때문인지 수평선에는 아직도 흰구름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해가 구름 사이로 스며들면서 하늘은 점점 붉은빛으로 물들어간다. 구름 뒤편에서 파란 하늘로 노란 햇살이 새어 나오고, 바다 위로 비치는 은빛 햇살은 반짝인다.
시간이 지나자 노을은 더욱 붉어졌다. 해를 머금었기 때문인지 흰구름이 검푸른 빛으로 변했다. 붉은 노을과 검은 구름이 만들어내는 대비가 인상적이다.
수평선에 다다른 해가 구름을 벗어나고 모습을 드러내자 노을극장은 절정에 다다른다. 수영을 즐기는 몇몇 사람들의 그림자까지 한 장면이다.
이윽고 해가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며 영화가 막을 내린다. 사람들이 한두 명씩 자리를 뜨지만, 마치 영화의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를 보는 것처럼 여운을 즐기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매일 해 질 녘 해수욕장을 찾았다. 따로 할 일이 없는 것이 여행의 콘셉트이기도 했지만, 매일 다른 색다른 느낌의 노을 지는 풍경이 좋았다.
늘 그 자리에 있는 수평선과 시간을 정해두고 지는 해는 배경일뿐이다. 매일 모습을 달리하는 구름, 수평선을 지나는 배들, 바닷가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바다풍경은 좋았지만, 너무 더웠다. 9월에도 이렇게 덥다니, 정말 지구가 멸망하는 게 아닌지 걱정되는 날씨다. 하루 이틀 올레길을 따라 걸어볼 만도 하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허약한 나에게 산책을 허락하는 시간은 이른 아침 시간과 해 질 녘뿐이다. 더군다나 해가 지고 나면 협재는 금방 어두워진다.
집에서는 일어나지도 않을 시간인 새벽 6시가 되면 눈이 떠진다. 옷만 갈아입고 숙소를 나선다. 조깅으로 시작했지만, 20여 분이 지나고 나면 이내 산책으로 바뀐다. 걷다 보면 협재를 지나 금능해수욕장으로 넘어간다.
협재의 아침시간, 인적이 드문 모래사장은 걷기에 좋다. 산책의 마무리는 백사장에서의 맨발 걷기다. 물을 찰방거리며 바닷가를 거닌다.
비양도는 물이 빠지면 길이 생겨 걸어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멀리 보이는 풍력발전기들까지 그림 같다.
바닷가에서는 나와 같은 부지런한 관광객들과 마주친다. 조깅을 하고, 산책을 하고, 바다 사진을 찍는다. 연인인가? 해수욕장을 통째로 전세 내고 수영하는 사람도 눈에 띈다. 난 왜 저렇게 살지 못했을까? 저런 용기가 부럽다.
해가 뜨지도 않았는데 아침 일찍부터 낚시를 하는 어르신, 가게 오픈을 준비하는 사장님까지. 협재의 아침을 고스란히 함께 한다.
여름휴가를 즐기기에는 늦었고 선선한 초가을 날씨를 즐기기에는 이른 때다. 협재는 한산했다.
한적한 평일이 지나고 금요일이 되면 협재에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화, 수, 목 문을 열지 않던 가게들도 주말엔 문을 열었다. 해수욕장 주차장이 북적인다. 주차할 곳이 부족하다. 연인들, 친구들은 해변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다. 식당에도 사람들이 늘었다. 평이 좋은 집들은 대기줄이 길다. 저녁에는 술집마다 제법 시끄러웠다.
혼자 온 여행객인 나는 주말엔 괜히 민망해진다. 카페에 혼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기엔 뭔가 사연이 있는 사람 같다. 북적이는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하려면 좀 더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아직 혼자 여행이 익숙하지 않나 보다.
나는 해수욕장에서 좀 떨어진 한적한 커피숍을 찾아본다. 토요일엔 숙소 마당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낸다. 음식을 사 와서 숙소에서 식사를 한다. 어차피 더워서 나다니기도 힘들다.
렌터카도 없이 협재 구석구석을 다니다 보니, 이곳에 생각보다 나의 추억이 많이 묻어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림공원은 내가 신혼여행 때 부인과 들렀던 곳이었음이 기억났다. 삼거리에 있던 과일집은 가족여행 때 부인이 과일을 샀던 곳이다. 그때 그 옆 칼국수집에서 식사를 했었지. 아침에 갈치조림을 먹었던 집은 이제 문을 닫았다. 어쩐지 그때도 가격에 비해 맛이 없었던 기억이다. 해수욕장에서 아이들은 물놀이를 했던가? 어렴풋한 기억들을 하나둘 추억해 본다.
협재가 너무 익숙해졌을 때, 새로운 도전을 해본다. 아침산책하며 괜히 바닷물에 뛰어들기, 버스를 타고 옆 동네로 진출하기. 렌터카가 있었다면 아마 이런 지루함을 느끼진 못했을 것이다.
일주일이 다 되어간다. 사실, 이제 푸른 바다를 봐도 처음의 그 감정이 일지 않는다. 협의 풍경도 익숙해졌다.
그렇게 일주일 만에 집에 가고 싶어 졌다. 또 그렇게 일상을 살아갈 힘이 생긴 건가? 일주일간 잊고 지냈지만, 나는 또 다음 주 병원으로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