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실조

by 소피

우울이 소진된 예술가의 말로는 비참하다. 이제야말로 망하지 않은 사랑으로부터 영감을 얻을 수 없음을, 질척하지 않은 키스로부터 낱말을 지을 수 없음을, 유난스럽지 않은 이별로부터 미련을 가질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할 때였다.


쥴은 내가 입술을 빨았던 사람들 중 가장 거룩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덧그려진 모든 종류의 우울을 구마하고는, 마침내 이별을 고했다. 쥴의 입술에서 빚어지는 주술과도 같은 사랑에 세상의 모든 번뇌를 잊는 동안 공평하게도, 세상 또한 나를 잊었다. 오 년의 연애 끝에 남은 건 낯선 모양으로 앞자리를 갈아 끼운 나이와 가느다란 굵기로 겨우 이어오던 경력의 단절이었다. 그러니까, 무언가 대단한 포부로 신작을 쓰기로 다짐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때마침 헤어졌고, 때마침 잊혀졌고, 때마침 우울해서 이 글을 쓴다.


우울의 이유에는 이별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개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집에 대한 문제였다. 인간은 꽤 자주, 감정이라는 추상을 지나치게 신뢰하곤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수록 변화를 알아차리기가 어려우므로, 더욱 주기적으로, 면밀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도 간과하면서. 쥴과 함께 지내면서 시나브로 불어난 살림살이를 내 몸보다 큰 비닐봉지에 욱여넣으며, 매달 오만 원씩 부어 왔던 적금 통장을 떠올렸다. 천오백. 하루 아침에 하나도 둘도 아니게 된 쩜오의 나에게 퍽 어울리는 금액이었다. 이십대를 벗어나며 맛을 들인 부르주아 놀음 때문일까, 옥탑이나 고시원에는 죽어도 가기 싫었다. 생라면 한 봉지를 삼 일에 나눠 먹어야 한대도 좋으니 쾌적한 곳에서 살고 싶었다. 사천만 땡겨 주세요오. 어디선가 들었던 음계를 흥얼거리자 방안에서 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세라,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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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