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즐거운 차, 맛있는 이야기

오늘의 차 : '석귀숙전'

by 호진 Hojin

'부르르-' '부르르-'


오랜만에 일찍 집으로 돌아온 날.

어젯밤에 먹고 남은 설거지 거리를 사부작사부작 치우는 사이, 내 방에선 포트가 조용히 혼자 끓고 잇다. 물기 묻은 손을 털고 방으로 들어서자, 약간의 진동과 함께 수증기를 내뿜던 포트는 이미 물을 100도씨로 완전히 데워놓고 내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리고 있다.


'방 온도 27도에, 습도 54%...'

힐끗 온도계를 보고 온습도를 체크한다. 차 보관을 위해 가능한 한 일정하게 온습도 환경을 유지하려고 하는 편이다. 물론 향이 있는 물건이나 향수는 방에서는 금물이다.


아직 여름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인지, 덥고 습한 날들이 계속되니 차 마시기도 쉽지 않은 요즈음이다. 방에는 늘 에어컨과 제습기가 돌아가고 있어, 나는 땡볕에서 자외선에 타들어가고 습기로 땀범벅이 되어도, 차만큼은 지킬 수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래도 한 번씩 머릿속을 지나가는 차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제부터 마시고 싶어서 벼르던 그 차, '석귀숙전'이 머릿속을 하루 종일 차지하고 있었다. 사실 어제 마시려고 했지만, 미리 소분봉투에 담아둔 석귀 숙전차를 꺼내보니, '아차-' 다른 차를 넣어놓고 석귀 숙전이라고 적어놓았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오늘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집에 가면 석귀숙전차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던 참에, 마침 날씨도 은근히 시원한 듯, 습도도 약간 높은 것이 딱 숙차를 마시기 좋은 날씨인 것 같아, '그래, 오늘은 꼭 마셔야지'하고 결심했었다.


'석귀 숙전'이란 중국의 석귀 지역의 차나무(보통은 보이차로 가공된다) 잎을 채엽하여 숙차(보이차의 일종, 특정한 공정을 거쳐 독특한 향미가 있다)로 만들었다는 뜻으로, 압병(프레스로 눌러 모양을 다지는 것)할 때 '벽돌모양'으로 누른다 하여 '전'을 붙여 '석귀숙전'이다.


사실 산지와 가공방식, 모양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세상엔 정말 다양한 석귀 숙전이 있겠지만, 오늘 마실 석귀 숙전은 그 안에서도 나름의 상등품이기 때문에 기대가 되는 편이다. 요즘 트렌드에서는 차나무의 수령이 높을수록 좋은 평가를 받는데, 보통의 숙전은 그런 비싼 원료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석귀숙전은 고수차(수령이 높은 나무) 잎으로만 만들었다 하여, 그 특유의 수령미가 깊고 진한 향미를 더해준다.

<노단니 수평호 자사호와 석귀숙차>

숙전이라는 이름처럼 벽돌처럼 단단하게 압축된 차를 차칼로 톡톡 떼어낸다. 자사호(차를 우리는 주전자, 자사니료라는 흙으로 만들었다 하여 자사호라고 한다)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방 안에 서서히 퍼지는 향기.

비에 젖은 숲 내음, 대추향, 한약재, 오래된 목재향. 복잡하지만 어쩐지 익숙한, 구수하고 따뜻한 향기가 내 마음을 먼저 감싼다. 차를 한잔 마시자,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둔해졌던 오감이 다시 스르르 하고 깨어나 차를 음미하기 시작한다.


첫 잔.

입 안을 두껍게 가득 채우는 향기들, 시원하고 달짝지근한 산지 특유의 향미와 높은 해상도.

거슬리는 잡미 없이 깔끔하게 느껴지는 섬세한 노트 하나하나로부터, 이 차가 참 신경을 써서 만들어진 물건이구나 싶은 감상이 든다.


한 모금, 또 한 모금, 혀 위에 몽글몽글하고 찻물이 굴러간다.

마치 젤리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고, 고소한 양갱 하나를 덥석 베어문 것 같은 감상이다. 오늘의 찻잔은 중국 덕화요의 옛 커피잔, 사이즈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잔을 다 비우자, 목구멍 뒤에서부터 아까의 잔향과 더불어 보다 시트러스 하면서도 새콤달콤한 향이 올라와 코 뒤쪽을 간지럽힌다.


중국차의 매력은 여러 번 반복해서 마실 때마다, 맛과 향이 달라진다는 것에도 있다. 특히 이런 숙차는 더욱이나. 몇 번을 더 반복해서 마시자, 마치 향과 맛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처럼 잔향들이 배가되어 농밀해진 향과 맛이 더욱 맛있게 느껴진다.


다회(차를 마시는 모임)를 나가면 나는 이야기꾼이 천성인지, 차를 우리며 모임을 진행하는 '팽주'역을 담당하곤 한다.


이야기하면서 차를 우리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듣고.


'즐거운 차, 맛있는 이야기가 좋아요'라는 이야기를 때때로 하곤 하는데, 차 이야기를 듣다 보면 군침이 돌아 차가 마셔보고 싶어지고, 차와 함께하는 시간, 맛있는 차로 사람들과 함께할 때의 즐거움이 좋으니까 말이다. 차를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차에 담는 순간이 너무 즐겁다.


문득 내가 마시는 차들에 대한 감상이나 차생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내 취향을 공유하는 계기가 되어도 좋을 것 같고, 혼자 조용히 차 생활을 하는 분들이 잠깐 만난 차 친구의 이야기처럼, 다식처럼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글을 써보면 어떨까.


8번 정도 찻잔을 비웠을까, 양으로 하면 약 700ml 정도는 되었겠지.

잠깐 잔을 내려놓고, 오늘의 차와 짧은 이야기를 글로 적어볼까 싶어졌다.


자유롭게, 어떤 내용으로 시작해 볼까, 턱을 톡톡 치며 몇 초 즈음 짧게 고민해 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말을 제목으로 시작해 보자. 하고 타다닥 제목을 적어본다.


'#1. 즐거운 차, 맛있는 이야기'


* 오늘의 차

21년 석귀숙전


* 총평 : 6.5 / 10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