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삼촌의 PMP는 말이 없었다

어른이 되어서야 보이기 시작한 것

by 이땃쥐

모든 것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기억의 되감기에서부터였다.

이제는 세상에서 사라진 PMP라는 물건.

외삼촌이 형에게 선물했던 그 하얗고 네모난 기기가 문득 생각난 순간,

나는 아주 오래된 기억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 네모난 상자 안에는 형과의 웃음, 외삼촌의 침묵, 그리고 그때는 미처 몰랐던 시간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내 유년 시절, 그 PMP는 형의 보물상자이자 나에게는 선망의 세계로 통하는 창이었다.

그 속은 언제나 ‘무한도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스 원정대’에서 서로의 정곡을 찌르던 롤링페이퍼,

‘정신감정 특집’에서 의사에게 ‘팩트 폭행’을 당하며 무너지던 멤버들,

그리고 '무인도 특집'에서 코코넛과 새장 속 아이스크림을 향한 처절한 쟁탈전까지.

앞의 두 편이 모두가 인정하는 웃음의 레전드였다면,

실패한 특집이라 불리는 ‘무인도 특집’은 유독 형이 사랑했던 그만의 명장면이었다.

당시로서는 혁신이었던 ‘무인코딩’ 기능 덕분에 이 모든 즐거움은 너무나 손쉬웠고,

나는 그 편리함 속에서 기기의 출처나 그것에 담긴 마음을 헤아릴 겨를도 없이

화면 속 세계에만 온전히 몰두했다.

결국 나는 형의 웃음소리 옆에서, 그 기기가 품고 있던 진짜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그저 화면 너머의 세상을 동경하던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그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뚝뚝하고 과묵했던 외삼촌이 무슨 이유로 당시엔 꽤 고가였을 최신 기기를 선뜻 조카에게 안겨주었을까.

그 무심한 표정 뒤에 숨겨진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되기까지는,

소년이 어른이 되는 것만큼이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이제 PMP를 선물하던 그 시절 외삼촌의 나이와 비슷해졌다.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에서야 나는 그 시절의 풍경을 다시 그려본다.

명절날,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조카의 부러움 가득한 눈빛을 마주했을 젊은 외삼촌의 모습.

어른들이 “아 주라, 아 주라” 하며 부추기는 소리 없는 압박과,

자신의 것을 내어주어야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그 세대의 분위기.

오늘날 ‘명절 조카 참교육’이라는 말이 더 익숙한 세상에서,

나는 외삼촌의 선택이 단순한 선물이 아닌,

한 젊은 남자가 ‘어른’의 역할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해 본다.


외삼촌의 마음속에도 분명 갖고 싶은 것을 소유하고픈 욕망과,

자신만의 세계를 즐기고픈 열망이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남자가 누군가의 동생에서, 조카들의 ‘외삼촌’이 되는 과정은

내면의 소년과 잠시 이별해야 하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즐거움에 앞서, 조카의 기쁨을 먼저 헤아려야 했던 그 마음.

그것은 결코 포기가 아니었다.

표현에 서툴렀던 한 남자가 보여줄 수 있었던, 가장 크고 따뜻한 형태의 애정이었다.


그런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기에, 나와 외삼촌 사이에는 여전히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다가가면 받아줄 것을 알면서도, 그 무뚝뚝함이 쌓아 올린 벽 앞에서 늘 망설인다.

PMP는 말이 없었다.

수십 번의 클릭과 재생 속에서도, 자신을 건넨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 침묵의 의미를 알아채는 것은 온전히 남겨진 사람의 몫이었다.


이제 나는 외삼촌의 무뚝뚝함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비록 지금은 서먹한 침묵이 우리 사이에 흐르지만,

그 마음속 어딘가에는 말보다 행동으로 애정을 표현하던 서툰 어른이 살고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 말 없는 애정이 있었기에, 형과 나의 유년 시절이 그토록 풍요로울 수 있었다고.


PMP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그것은 침묵으로 보내온, 한 젊은 남자의 가장 따뜻한 편지였다는 것을.

그 안에는 ‘어른’의 역할을 받아들이기로 한 쑥스러운 다짐과 조카를 향한 서툰 애정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소리 없는 언어를 해독하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유년의 기억이 아닌 한 남자의 청춘이 담긴 그 PMP를 조용히 다시 재생해 본다.

거기엔 내게 건네는, 세상 가장 선명한 문장이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