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7월 - 실례가 가득한 세상을 꿈꾸며

톱니의 이빨은 무뎌지고

by 한자연

고모는 일본국적을 취득한 이후 하와이에 정착한 지 30년이 지났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어색한 사이었으나 고모는 신년과 크리스마스에는 빼놓지 않고 메일을 보내왔고, 마침내 성인이 되어 고모와 고모부를 처음 뵀다. 고모부는 미국 본토에서 나고 자란 백인으로 나는 그곳에서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대화해야 했고 약간의 일어는 고모와의 소통에서 필수적이었다. 당시 나는 오랜 친구였던 A와 함께 여행을 갔는데 그 녀석의 막힘없는 영어를 보고서 회화공부를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면허가 있었지만 운전에 익숙지 않았고 버스를 타고 투어를 다니기로 했다. 모든 것이 느린 이곳에서의 버스여행은 기다림의 연속이었지만 그러한 늘어짐이 나는 좋았다. 사람들은 오후 3,4시경이면 일과를 마치고 각자의 취미를 향해 떠났다. 해는 끊임없이 뜨거웠고 따스했다. 해가 살갗에 닿으면 느껴지는 감각을 그제야 깊이 이해하게 된 나는 그 뒤로 여름이면 물과 태양을 찾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오로지 해의 열기를 몸으로 받는 감각을 좋아하게 됐다.

유럽여행에서도 느꼈지만 이곳 또한 사람들의 인사에 대한 감회가 새로웠다. 그들은 "Excuse me"를 항상 내뱉으며 'Sorry'와 'Please' 같은 말에 예의를 묻혀둔다. 물론 그들의 이 관습은 그다지 진정성이 없는, 단순히 습관적인 것에서 비롯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감사와 사과를 지나치는 것보다야 스쳐가는 짤막한 대화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하루 틈틈이 녹아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마음을 풍요롭게 했다. 역설적이게도 '실례'가 자주 등장하는 곳일수록 여유와 평화가 가득했다.

함께 간 A와 쇼핑을 갔다. 우리는 쇼핑센터를 둘러보면서 GAP매장에 들렀다. 당시 학생이었던 우리는 재고 정리 할인코너를 보자마자 황급히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교롭게도 A와 나는 같은 가방 앞에 멈춰 섰다. 하나 남은 가방이었기에 직원에게 재고가 있는지 물어보았지만 아쉽게도 걸려있는 것이 전부라고 직원은 답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양보하며 한참 실랑이를 벌였고 결국 가방은 A의 손에 쥐어졌다. 여행은 사람의 마음을 늘어뜨린다. 화덕에서 갓 나온 피자의 치즈처럼 이리저리 흐르며 제자리가 없다. 나는 그런 늘어짐이 좋아 여행을 종종 떠난다. 모든 것이 갖춰지고 계획에 갇힌 일상으로부터 잠깐의 흘러내림을 만끽하기 위해서.

역시 나는 또 재고 정리 할인코너에서 멈췄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디자인의 에어포스는 운명적이게도 나의 발에 꼭 맞았다. 이 신발을 한 7,8년 정도 신었던 것 같다. 다시 구할 수 없는 신발이기도 했고 물건을 오래 쓰는 걸 좋아하는 나는 밑창에 구멍이 나고도 비가 오지 않는 날에만 신어가며 마찰력이 거의 없어질 쯤에야 이 신발을 보내줄 수 있었다. 점점 사람들은 물건을 자주 바꾼다. 대부분의 물건들은 제자리를 찾아갈 때 즈음이면 교체되고 잊힌다. 손때 묻은 시간의 흔적은 초라함의 표상으로 치부되며 그에 담긴 가치를 보려는 사람들은 찾기 어려워졌다.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라 여기는 오래된 물건들의 수명은 생각보다 길다. 모든 것이 격변하는 시대에, 나의 주변은 조금 천천히 변화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하와의 버스는 티켓에 시간표가 적혀있으나 A와 나는 몇 번의 배신을 당하고 나서야 이 시간표가 그다지 의미 없는 숫자의 나열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적혀있는 시간에 온 버스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한 두 차례는 건너뛰기 일수였다. 우리는 늘어나는 대기 시간에 그다지 불만은 없었다. 버스가 오지 않으면 않는 대로 사진을 찍었고 대화를 나누었으며 담배를 태웠다. 너무나도 바쁘게 흘러가는, 하니 흐른다기보다 수많은 톱니들의 이빨처럼 맞물리며 회전하는 한국의 하루와 달리 이곳에서만큼은 시간이 말 그대로 흘렀다. 굴곡진 해안가의 물길처럼 돌과 모래와 바람과 들풀에 드나들며 그 속도의 높낮이를 고스란히 감각한다. 나의 톱니는 이제 날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서울대입구역에는 작은 피자가게가 있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창 미국의 문화에 빠져있던 내게 이곳은 일탈의 시간으로 다가왔다. 유리병에 담긴 코카 골라와 토핑이라고는 토마토소스와 치즈, 그리고 약간의 페퍼로니가 전부인 피자다. 특별할 것 없는 이 식사는 당시 서울대입구역 주변에서 제일 저렴했던 콩나물 국밥과 비슷한 가격으로 나는 허기진 날이 아니면 탄산과 치즈의 포만감으로 배를 채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종의 겉멋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미국에서 살았던 적도 없고 출생지로 따지자면 일본에 가까운 가정환경이었다. 당시 나는 연고 없는 미국에서 편안함과 특별함을 찾는, 아이러니한 노스탤지어를 꿈꿨다.

작은 50cc 바이크를 하나 샀다. 혼다의 96년식 바이크로 당시 바이크에 대한 기계적인 지식이 거의 없었음에도 이 낡은 캬브레이터 방식의 바이크를 겁도 없이 데려오고 말았다. 최신의 연료분사 방식과는 달랐기에 관리법이 꽤나 까다로웠지만 운이 좋게도 큰 탈 없이 잘 타고 다녔다. 답답함이 꽤나 자주 찾아오던 시기에 나는 이 숨이 ‘쉬어지는’ 감각에서 자유를 찾았다. 바람을 오롯이 맞으며 다리를 건널 때면 몸 안에 공기가 들어차면서 느껴지는 삶의 감각이 있다. 지하철과 버스등의 탈 것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동한다. 게다가 여럿이 엉겨 붙기 십상인 그곳을 견디기 어려웠던 나는 종종 같은 노선을 내렸다 타기를 반복하며 이동을 해야만 했다. 그런 내게 있어 이 이동의 자유라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값진 행복이었다. 비록 빠르지도 않고 최신 장비는 갖추지 못한 낡은 바이크였을지라도 그저 엔진의 회전을 느끼며 목적지로 향하는 짧은 여정들은 점차 나의 그늘을 걷어냈다. 수동기어의 조작이 익숙해질 때쯤 나는 내비게이션 어플을 설치했다. 그리고는 몇 번의 환승이 필요했기에, 쉽게 용기를 내지 못했던 서점으로 첫 여정을 떠났다. 수많은 여정은 단순하고 평평했던 일상을 여행의 연속으로 바꿔놓았고 휴대전화 스크린타임의 맨 윗줄은 지금까지도 늘 내비게이션 어플이 차지하고 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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