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적절한 시 어려움을 겪어야 성장하더라.”
소중한 형이 한 명 있었다. 지금은 너무도 먼 여행을 떠난 사람인지라 다시 만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테지만 나는 그날을 늘 기다리고 기대한다. 대학교 3학년에 나는 전공을 바꿨다. 디자인과에서 서양화과로 넘어온 나는 몇 없는 남자 동기들과 친해지고자 꽤나 부단한 노력을 해야 했다. 그중 한 명이 형이었다. 우리는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진 않았다. 그보다는 음악 이야기나 시시콜콜한 학교생활에 대한 대화가 자주 오고 갔다. 형은 나 못지않게 커피를 즐겼다. 덕분에 우린 빠른 속도로 친분을 쌓을 수 있었고 학교 밖에서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하루는 홍대에서 옷을 사러 옷가게에 들렀다. 형은 민소매를 하나 집어 들고는 내게 권했다. 당시 나는 급격한 체중감량으로 볼품없이 가늘어진 팔이 부끄러웠기에 이런 건 형 같은 근육질의 남자가 어울릴 거라고 옷을 도로 건넸다. 그러자 형은 그런 걸 뭘 신경 쓰냐며 이걸 사면 본인은 더 늘어진 민소매를 입고 같이 다녀주겠다며 옷가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그날 민소매 차림으로 옷가게를 나섰다. 어색하기도 하고 조금 부끄러웠지만 형의 우스꽝스럽게 늘어진 옷을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아직도 나는 민소매를 고를 때 그때 생각에 속으로 피식거리곤 한다. 세상을 마주하는 나의 태도를 송두리째 바꿔놓고 떠나버린 형이 나는 밉다. 우리는 늘 함께 웃었고 함께 울었다. 형이 마지막으로 남긴 선물은 그저 재미 삼아 누른 통화 녹음이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대화였고 술냄새 가득한 그 통화는 여전히 나를 일으킨다.
“자연아! 행복해야 되는 거야 나 없어도. 사람은 행복하려고 살아가는 거야. 너는 존나 독한 새끼니까 어디서든 잘 살아남을 거야 알았어? 설마… 이게 마지막 전화가 되지는 않겠지?”
그리고 형은 이듬해 여름, 여행을 떠났다. 나에게 무리한 강요와 사명을 남긴 채.
아니 형! 같이 하면 더 좋았잖아!
자취방에 샤워기가 고장이 났다. 바이크를 타면서 공구와 친해질수록, 내게 이 ‘고장’이라는 현상은 해결을 위해 고민하고 실행하는 설렘을 가져다주는 일이 됐다. 기계는 단순하며 정직하다. 문제가 발생한 위치를 찾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면 다시 원래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 얼마나 단순한 과정인지. 사람은(나를 포함해서) 불변이란 찾아볼 수 없고 허점투성이이며 예측불허의 메커니즘의 집합체이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원인을 찾기 어려우며 찾더라도 다른 문제와 함께 결합되어 해결하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자꾸만 기계에 눈이 갔는지도 모른다. 한동안은 ‘How to fix’ 혹은 ‘How to replace’로 시작하는 영상을 즐겨보곤 했다. 주로 자동차나 바이크에 관한 영상이었는데 대부분 미케닉이 증상과 발생원인을 설명하고, 새로운 부품을 보여주며 이전의 것과 비교하여 얼마나 낡았는지 손전등으로 비춰준다. 그리고 새것을 장착하며 정상화된 기능을 증명하는 것으로 영상이 끝이 나게 된다. 이 명료하고 통쾌한 마무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사람이 어렵고 조심스럽다. 당연하게도 사람을, 그리고 그 관계를 fix나 replace로 해결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사람이 필요했다. 서투름의 모임에서 오는 오묘한 결속이 존재했다. 어쩌면 인간은 서로의 허점을 엮어가며 촘촘한 그물을 만들어야만 서로를 담을 수 있는 사회를 이루는 것인지도 모른다.
fix : 고치다 / replace : 대체하다
내게는 은사님이 여럿 계신다. 사실 대부분의 선생님들에게 나는 꽤나 귀찮은 학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많은 서류를 작성해야 했으며 각종 질문이 가득한 메일과 편지들을 쉴 새 없이 보냈으니 늘 미소를 띤 메일로 답변해 주신 그분들께 늦게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이 날은 그중 한 분과 학교에서 식사를 한 날이었다. 선생님은 작가와 강사 생활을 오래 병행하신 분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한 벽을 벽화로 채운 선생님의 작업 보고 나는 나의 불투명한 미래를 잠시나마 꿈꿔보기도 했다. 선생님의 삶은 화려하지 않았으나 안전하고 온화했다. 내가 한창 온전하지 않았던 20대 초반, 집안이 기울면서 어떻게든 좋은 대학에 진학해야 했던 나날과 그곳에서 내가 마주한 혼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나는 빠짐없이 들려드렸다. 나의 치부를 듣고는 선생님께서 잘 해내왔다고 말씀해 주셨다. “사람은 적절한 시 어려움을 겪어야 성장하더라.”라는 말씀과 함께. 나는 당시에 그 적절한 시라는 것이 참 얄미웠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에 작업을 하지 못해 아쉬웠다. 그림을 그리다가도 매일의 지출을 계산해야 하는 나에게 환멸을 느끼기도 했다. 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그다지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를 살아내고자 매일의 몸부림이 거셌던 그때의 나는 그것을 최선이라 생각했고 나의 혼란을 견디기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 다행히 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지금은 한편으론 한심하기도 했던, 그 청년을 이해하지 못하는 조금은 현실에 이성을 두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선생님의 ’적절한 시‘가 와닿는다. 모든 것이 엉망으로 뒤틀리던 시기에 찾아온 어려움은 나를 절벽으로 내몰았다. 한 순간의 실수로 나는 떨어질 운명이었으나 선생님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내민 손으로 오늘을 만났다. 그것을 ‘성장‘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날이 올진 모르겠다. 나의 성장은 그들의 도움이 전부였던, 꽤나 부끄러운 이야기다.
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친구들은 막 군대에 다녀와 작업이라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계에 의문을 안고 발을 들이던 중이었다. 당시 나는 운이 좋게 작은 개인전과 단체전을 여러 번 갖게 되었고 그런 나를 친구들은 늘 치켜세우며 자연이 콩고물이라도 주워야 한다며 농담을 던졌다. 물론 당시도 지금도 나는 작업으로 이렇다 할 결과물을 이루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작은 전시들에 감사한 마음으로 응해오는 중인 나를 친구들은 과대평가중일 것이다. 우리는 2018년 팀을 하나 결성했다. 하지만 회의만 이어가던 우리는 결국 전시라는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나도 친구들도 그저 치기 어린 모험심에 만든 팀이었기에 당연한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안지겸과 노경민 작가가 그 팀원 중에 있었다. 이제는 주변 동료들에게 그들의 이름 끝에서 ‘작가’라는 단어가 붙는 경우를 종종 듣는다. 나는 감히 뿌듯함과 대견함을 느껴본다. 그리고 함께 여전히 작업을 향해 살아가는 그들에게 많은 힘을 얻는다.
처음으로 그림을 팔았던 날. 실은 물물 교환에 가까웠던 판매였다. 당시 일하던 미술학원 원장선생님 중 한 분은 필름 카메라를 모으셨다. 칼자이스 렌즈가 끼워진 콘탁스의 명작 ST가 그중 내 눈에 들어왔고 내가 관심을 보이자 선생님께서는 영수증 그림 3점과 바꾸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영수증 작업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을 드리자 선생님은 프린팅을 원하셨고 나는 스캔본을 두 점을 더 인쇄해서 액자에 담아드렸다. 그렇게 손에 들어온 ST는 차갑고도 무거운 카메라였다. 대부분의 필름 카메라가 주는 인상과는 다르게 촬영할 때 차가운 칼날과도 같은 셔터음이 좋았다. 그것은 마치 빛의 연속을 단칼에 베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한 장마다의 무게가 무거웠다. 단순리 빛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덩어리째로 썰어내는 감각을 주었다. 잔보다 비싸진 필름값도 한몫했지만 나는 이 감각으로 인해 필름의 장수가 전보다 현저히 줄었다. 함부로 자를 수 있는 풍경은 없다. 디지털 촬영의 보급화로 우리는 그 무게감을 잃었다. 사진마다의 무게는 0으로 수렴했고 선명한 화질에 담기는 정보는 훨씬 방대해졌으나 이전에 잠겼던 셔터를 누를 때의 감각이나 사진을 통한 회상의 무게가 줄었다. 이 아쉬운 마음은 결국 작업에까지 옮겨갔고 지금의 목탄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