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한 하루를 통찰의 시간으로 바꾸는 기술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혹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흰 옷을 입은 사람과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농구공을 패스하는 영상을 보여주고, 흰 옷 팀의 패스 횟수만 세어달라고 요청하는 유명한 심리학 실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스 횟수를 정확히 맞힙니다. 하지만 영상을 다 본 후, 혹시 ‘고릴라를 보았냐’는 질문을 받으면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영상 중간에 고릴라 탈을 쓴 사람이 등장해 가슴을 치며 돌아다니는데도, 오직 패스 횟수에만 집중했던 사람들의 눈에는 그 고릴라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음, 이게 단지 실험실 속 이야기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은 ‘보이지 않는 고릴라’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늘 스마트폰 액정에 시선을 빼앗겨, 길모퉁이에서 만개한 벚꽃이 봄바람에 하염없이 지는 그 찰나의 순간조차 놓쳐버립니다. 매일 아침 잠을 깨기 위해 마시는 커피의 첫 모금에서 느껴지는 그 풍부한 향과 따뜻한 온기를, 우리는 과연 몇 번이나 제대로 음미했을까요?
하루하루가 왠지 모르게 무력하고, 어제와 오늘이 똑같이 느껴진다면, 어쩌면 우리는 삶의 너무나 많은 것들을 그저 ‘보고만’ 있을 뿐, 진정으로 ‘관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들어야 할 것만 들으며, 삶이 우리에게 보내는 수많은 신호들을 무심히 지나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바로 그 ‘놓침’에 대한 이야기이자, 잃어버린 일상의 감각을 되찾는 ‘관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사라진 고릴라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우리 뇌에는 ‘기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름은 좀 어렵지만, 쉽게 말해 ‘멍 때릴 때’ 활성화되는 뇌의 영역입니다. 가만히 있을 때조차 우리의 뇌는 쉬지 않고 과거의 어떤 일을 곱씹거나,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끝없는 생각의 컨베이어 벨트를 돌립니다. 정말 신기하죠. 이게 바로 우리가 ‘지금, 여기’에 온전히 머무르기 어려운 과학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뇌는 기본 설정 자체가 현재를 떠나 과거와 미래로 시간 여행을 떠나도록 맞춰져 있는 셈입니다.
이런 뇌의 작용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그저 ‘보기만(Seeing)’ 합니다. 눈은 뜨고 있지만 초점은 흐릿하고, 풍경은 스쳐 지나갈 뿐 마음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합니다. 법정 스님은 “우리가 소유한 것은 없으며, 다만 경험할 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경험의 첫 단추조차 끼우지 못한 채, 수많은 순간들을 소유도 경험도 하지 못하고 흘려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보기(Seeing)’와 ‘관찰(Observing)’의 차이를 비유로 설명해 볼까요? 단순한 ‘보기’가 CCTV가 24시간 무심하게 녹화하는 영상이라면, ‘관찰’은 화가가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빛과 그림자, 인물의 미세한 표정 떨림까지 담아내는 스케치의 순간과 같습니다. 전자는 그저 존재하는 데이터의 기록에 불과하지만, 후자는 의미와 해석, 그리고 새로운 발견이 담긴 창조적인 행위입니다. 우리가 삶의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걸음은 바로 이 CCTV의 렌즈를 끄고, 화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즉 ‘관찰’에서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뇌의 기본 설정을 바꾸고, 관찰의 스위치를 켤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뇌과학은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의식적으로 집중하고 관찰을 시작하는 순간, 끝없이 공상에 빠져있던 DMN의 활동은 줄어들고, 대신 현재의 과제에 집중하는 ‘작업 긍정 네트워크(Task-Positive Network, TPN)’가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마치 전등 스위치를 켜듯,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이 뇌의 작동 모드를 바꿀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철학자 에크하르트 톨레는 그의 저서에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의 힘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현재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관찰은 바로 이 생각의 감옥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가장 강력하고 즉각적인 도구입니다.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관찰하는 그 순간, 우리는 과거와 미래라는 시공간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라는 유일한 현실에 발을 딛게 됩니다.
‘의식의 스위치를 켠다’는 것이 너무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간단한 훈련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마이크로 프랙티스(Micro-Practice)’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숨은 소리 찾기 (1분): 지금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눈을 감아보세요. 그리고 오직 ‘소리’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합니다. 아마 처음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곧 시계 초침 소리, 냉장고의 낮은 모터 소리, 창문 너머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심지어 내 심장이 뛰는 소리까지… 평소에 배경 소음으로 치부했던 수많은 소리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할 겁니다.
창밖 풍경 스캔 (10초):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멍하니 보는 대신, 딱 10초만 시간을 내어 의식적으로 관찰해 보세요. 어제와 미묘하게 달라진 구름의 모양,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방향, 출근길을 서두르는 사람의 옷차림 같은 것들을요. 이 짧은 10초의 관찰만으로도 무의식적으로 시작했던 하루에 의식적인 첫 쉼표를 찍을 수 있습니다.
이런 작은 시도들이 바로 흐릿했던 세상에 초점을 맞추고, 의식의 스위치를 켜는 첫 번째 기술입니다.
관찰이 단순히 정신을 깨우는 것을 넘어, 우리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를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긍정 심리학의 연구에 따르면, 매일 자신이 관찰한 세 가지 긍정적인 것을 기록하는 ‘관찰 일기’를 쓴 그룹은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해 행복감과 감사 지수가 월등히 높아졌다고 합니다. 관찰이 우리로 하여금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늘 똑같이 느껴지던 출근길을 한번 관찰의 대상으로 삼아볼까요? 이어폰을 빼고,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매일 지나치던 길가의 이름 모를 들꽃이 사실은 얼마나 끈질기게 콘크리트 틈을 비집고 피어났는지, 계절마다 햇살이 건물을 비추는 각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같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이 얼마나 다채로운지를 발견하는 순간, 지겹기만 하던 출근길은 ‘소모되는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탐험의 시간’으로 변모합니다.
관찰의 힘은 사물을 넘어 관계와 감정의 영역으로 확장될 때 더욱 깊어집니다. 한번은 회의 때마다 제 의견에 사사건건 반대하던 동료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가 정말 밉고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회의에서는 그의 말을 듣기보다, 그의 행동을 조용히 관찰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불안한 듯 펜을 계속 만지작거리는 손, 무언가 더 말하려다 이내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미세한 표정 변화, 다른 사람의 강한 주장에 살짝 위축되는 어깨… 그를 온전히 관찰하면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아, 그는 내 의견이 싫었던 게 아니라, 자신의 의견이 또다시 묵살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구나. 그가 강한 주장을 펼쳤던 것은 사실 방어기제에 가까웠구나. 그 순간, 제 마음속에 있던 해묵은 미움과 오해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처럼 관찰은 우리를 피상적인 이해를 넘어 사람의 마음에 담긴 진심을 발견하는 통찰로 이끌어줍니다.
우리는 변화를 위해 너무 거창한 것들을 꿈꾸곤 합니다.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대단한 계획을 짜고,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만 삶이 바뀔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모든 위대한 변화의 시작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제대로 보는 것’에서 말입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에 의식의 돋보기를 들이대는 순간, 우리는 반복되는 하루 속에 숨겨진 무수한 경이로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관찰은 우리를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으로부터 해방시켜, ‘지금, 여기’라는 삶의 유일한 무대 위로 올려줍니다. 그것은 내 주변의 세상을, 곁에 있는 사람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완전히 새롭게 발견하는 여정의 시작입니다.
이 글은 당신에게 어떤 대단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이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삶을 바꿀 힘은 이미 당신 안에 있다는 것을요. 그 힘을 깨우는 스위치가 바로 ‘관찰’입니다.
거창한 계획은 잠시 접어두어도 좋습니다. 오늘 단 한 번만이라도, 무심히 지나쳤던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관찰’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당신의 변화가 시작되는 첫 장면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