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늘의 후회는 오늘 찢어버린다

과거의 발목을 끊어내는 감정 종료 노트

by 하레온

후회는 왜 사라지지 않는가?


"그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 메일만 다시 보낼 수 있다면..."


늦은 밤, 불 꺼진 방에서 혼자 이런 생각들을 되감기하고 있진 않나요? 후회는 유독 질깁니다. 우리는 감정을 없애려 하지 말고, 통과시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붙잡지 않아도 멋대로 찾아와, 결국 우리의 ‘지금’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잊으려 애쓸수록, "괜찮은 척"할수록 그 그림자는 더 짙어집니다. 후회라는 감정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과거에 찍힌 선명한 발자국이자, 아직 처리되지 못한 감정의 덩어리입니다.


이 글은 그 지독한 후회의 고리를 끊어내는, 아주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방법을 제안하려 합니다. 더 이상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기 위한 실천적인 기술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입니다.




1부: 후회의 심리 구조: ‘끝나지 않는 재생 버튼’

Image_fx - 2025-11-02T205409.009.jpg 잔잔하지만 명료한 ‘정서적 해방’의 한 장면


후회는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의 특정 장면에 우리의 생각이 '고착(fixation)'된 인지 상태에 가깝습니다. 우리 뇌는 ‘다시’를 외치며 같은 장면을 되감습니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이라는 가정은 뇌 속에서 수없이 반복 재생되며 현재의 에너지를 갉아먹습니다.


우리는 후회가 밀려오면 억누르는 법부터 배웁니다. "이미 지난 일이야", "생각해서 뭐해"라며 애써 외면하죠. 하지만 감정은 누를수록 반발합니다. 물속으로 공을 억지로 누르면 언젠가 더 세게 튀어 오르듯이, 억압된 후회는 무의식 속에 더 단단한 뿌리를 내립니다. '괜찮은 척'하는 가면 뒤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정의 무게에 짓눌리게 됩니다.


그래서 후회는 '병'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호'입니다. 더 정확히는, "아직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감정의 알람"입니다. 내 마음이 "이것 좀 봐줘!"라고 보내는 간절한 신호죠.


우리는 왜 이 신호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까요? 그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우리는 모를 때가 많습니다. '후회'라는 단어 안에는 사실 수치심, 분노, 슬픔, 아쉬움, 자기 비난 등 수많은 감정이 뒤엉켜 있습니다. ‘후회’라는 한 단어 속에는, 누군가는 분노를, 또 다른 누군가는 부끄러움을 품고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감정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이름 붙이는 능력을 '감정 세분화(Emotional Granularity)'라고 부릅니다. 이 능력이 부족하면, 우리는 거대한 '후회'라는 덩어리에 압도당할 뿐, 그것을 해체할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그냥... 기분이 나빠"라고 뭉뚱그리는 것이죠.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이 '아쉬움'인지 '자기혐오'인지 구분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 감정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끝나지 않는 재생 버튼을 멈추는 첫 단계는, 그 재생 버튼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생되는 영상이 무엇인지, 어떤 감정이 얽혀 있는지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괜찮은 척하는 가면을 벗고, 그 알람이 왜 울리고 있는지 들어여 줄 시간입니다.




2부: 감정 기록의 힘: 글로 쓰는 해방

Image_fx - 2025-11-02T205449.484.jpg 왼쪽의 검고 혼란스러운 안개가 오른쪽으로 가면서 깨끗하고 정돈된 선으로 변하는 모습


얽힌 감정을 바라보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글쓰기'입니다.


머릿속으로 하는 '생각'과 손으로 하는 '쓰기'는 완전히 다릅니다. 생각은 파편적이고, 감정적이며, 종종 같은 자리를 맴돕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처럼 말이죠. 머릿속의 후회는 형태가 없는 안개다. 그래서 우리는 더 불안하다.


하지만 글은 다릅니다. 글은 시작과 끝이 있는 논리적 구조를 가집니다. 내 안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밖으로 꺼내어 눈앞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감정의 객관화'입니다.


일단 종이 위에 적힌 감정은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닙니다. 나와 분리된 '텍스트'가 됩니다. 우리는 비로소 한발 물러서서 그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아, 내가 이래서 화가 났구나", "정말 수치스러웠구나."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후회'라는 감정 덩어리를 '수치심', '아쉬움', '분노' 등으로 세분화하게 됩니다.


심리학자 제임스 페네베이커(James W. Pennebaker)는 '표현적 글쓰기'의 힘을 증명했습니다. 트라우마나 깊은 감정을 글로 꾸준히 쏟아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완화되고 면역 체계가 강화된다는 것을 발견했죠.


이것은 마법이 아닙니다. 감정을 밖으로 꺼내어 구조화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뇌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안개 같던 감정이 명확한 언어가 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다룰 힘을 얻습니다. 글쓰기는 내 안의 폭풍을 종이 위로 옮기는 행위입니다. 그 순간, 머릿속의 소음이 잦아들기 시작합니다. 그저 쏟아내는 것만으로도, 놀랍게도 우리는 이미 절반쯤 자유로워집니다.




3부: 후회 노트 작성법: 적고, 찢고, 비워내는 의식

Image_fx - 2025-11-02T205518.804.jpg 한 손이 어두운 휴지통을 향해 구겨진 종이 한 장을 막 떨어뜨리는 모습


이 글이 제안하는 핵심 솔루션은 '후회 노트'입니다. 이것은 거창한 일기 쓰기나 아름다운 문장 만들기가 아닙니다. 감정을 배출하고 '종료'하기 위한 강력한 '의식(Ritual)'입니다.


우리의 뇌는 상징적인 행위에 강하게 반응합니다. 매일 같은 방식으로 '적고, 찢는' 행위는 "이 감정은 이제 끝났다"는 명확한 마침표를 뇌에 전달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분 전환이 아닌, 심리적 매듭을 짓는 행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건 용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강박은 오히려 또 다른 죄책감과 후회를 낳습니다. 우리는 용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이 감정의 생명주기를 여기서 '종료(Termination)'시키려는 것입니다. 감정을 통과시키는 것이죠.



'후회 노트'는 4가지 원칙만 기억하면 됩니다.


1. 즉시성 (Immediacy)


후회가 밀려올 때 바로 적습니다. 감정이 가장 날것일 때가 가장 좋습니다. 거창한 노트가 아니어도 됩니다. 책상 위 이면지, 작은 메모지, 영수증 뒷면이라도 좋습니다.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2. 비형식성 (Informality)


문장을 다듬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문법이나 맞춤법도 무시하세요. 단어, 낙서, 심지어 욕설이라도 괜찮습니다. 아무에게도 보여줄 글이 아닙니다. 검열하지 않고 떠오르는 그대로를 배출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곳은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당신만의 안전한 감정 쓰레기통입니다.


3. 의식성 (Ritualism)


반드시 '찢는 행위'로 마무리해야 합니다. 글에 담긴 감정을 실어, 있는 힘껏 종이를 찢어버리세요. (만약 안전한 환경이 허락된다면, 태우는 것도 강력한 상징적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물리적 파괴 행위가 감정의 종료를 뇌에 각인시킵니다.


4. 비보관성 (Non-storage)


찢은 종이는 즉시 버립니다. 절대 다시 읽지 마세요. 이것은 기록이 아니라 배설의 과정입니다. 찢고 버림으로써, 그 감정이 더 이상 현재의 당신에게 머무를 자리가 없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 감정은 기록이 아니라, 지나가야 할 파도입니다.




에필로그: “후회는 이제 지나가도 좋습니다.”


후회는 우리를 과거에 묶어 두는 닻입니다. 우리는 그 닻을 끊어내려 애쓰는 대신, 닻을 들어 올리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후회 노트'는 그 닻을 들어 올리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후회는 용서의 문제가 아니라, 흘려보내야 할 감정의 '흐름'입니다. 그 흐름을 멈추게 한 건 언제나 ‘내가 나를 붙잡을 때’였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완벽하게 후회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후회가 밀려올 때, 그것에 잠식당하지 않고 처리할 수 있는 '나만의 도구'가 생겼다는 사실입니다.


더 이상 "괜찮은 척"하며 감정을 쌓아두지 마세요. 오늘, 당신을 괴롭히는 그 감정을 작은 종이에 적어보세요. 그리고, 망설임 없이 찢어버리세요.


후회는 오늘로 충분합니다. 이 문장을 다 읽은 지금, 당신의 첫 번째 후회를 하나 떠올려보세요.


이제 그 감정은 지나가도 좋습니다.

keyword
이전 11화AI 시대, 속도가 격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