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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시간이 없는 게 아닙니다

쫓기는 삶을 멈추고 내 시간을 지배하는 유한함의 기술

by 하레온

달력의 뒷면에서 마주한 불안


책상 위에 놓인 탁상 달력을 봅니다. 두툼했던 종이 뭉치는 어느새 사라지고, 이제 얇은 종이 한 장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12월. 이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차가운 겨울 공기보다 더 서늘한 감정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바로 '불안'입니다.


"올해도 벌써 다 갔구나."


"대체 난 일 년 동안 무엇을 했을까?"


아마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속에도 비슷한 질문이 맴돌고 있을지 모릅니다. 연초에 야심 차게 적어 내려갔던 계획들은 흐릿해졌고, 해낸 일보다는 하지 못한 일들이 더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우리는 마치 숙제를 다 하지 못한 채 방학 개학식을 맞이한 아이처럼, 다가오는 새해 앞에서 작아지곤 합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고백해봅시다. 우리의 불안은 단순히 '시간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일까요? 24시간이 48시간으로 늘어난다면, 우리는 만족했을까요?


이 글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불안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끝'을 외면했기에 불안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유한함을 인정하는 순간, 시간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선명해집니다. 이제 남은 30일, 쫓기듯 허덕이는 대신 삶의 밀도를 채우는 진짜 몰입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1부: 우리는 왜 항상 시간이 부족할까?

Image_fx - 2025-12-05T213047.924.png 갈라진 모래시계에서 녹아내린 시계가 흘러내리는 장면


왜 우리는 항상 시간에 쫓길까요? 열심히 살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심리학은 우리가 시간을 감각하는 방식에 착각이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시간 불안(Time Anxiety)'이라는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바쁜 상태를 넘어, 시간이 흘러가는 것 자체에 대해 막연한 공포를 느끼는 현대인의 심리를 말합니다. 우리는 잠시 멍하니 있는 시간조차 "아깝다"거나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립니다. 쉼 없이 달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셈이지요.


여기에 '파킨슨 법칙(Parkinson’s Law)'이 기름을 붓습니다. "일은 주어진 시간을 모두 채우기 위해 팽창한다"는 이 법칙처럼, 우리는 마감 기한이 명확하지 않은 목표들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내어주곤 합니다. "올해 안에 영어 공부하기"처럼 막연한 목표는 1년이라는 시간을 다 잡아먹고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더 괴로운 것은 뇌의 작동 방식입니다. 심리학자 블루마 자이가르닉은 인간의 뇌가 완결된 일보다 도중에 중단된 일을 더 잘 기억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를 '차이커 효과(Zeigarnik Effect)'라고 합니다. 당신이 올해 성취한 수많은 작은 승리들은 기억의 서랍 깊숙이 들어가고, 마무리하지 못한 몇 가지 아쉬움만이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 뇌의 리소스를 잡아먹습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마세요. 당신이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그저 우리 뇌가 미완성된 과제들에 사로잡혀 "시간이 부족하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을 뿐입니다.




2부: 유한함, 두려움이 아닌 자유의 도구

Image_fx - 2025-12-05T213122.111.png 거친 바다 한가운데 서 있는 문틀 안쪽으로 따뜻하고 평온한 정원이 보이는, 유한함이 주는 안정을 상징하는 이미지


그렇다면 이 불안의 굴레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역설적이게도 답은 '유한함'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시간이 무한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상상해봅시다. 만약 우리에게 천 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오늘 당장 무언가를 선택하고 실행할 간절함이 생길까요? 아마 모든 선택을 내일로, 다음 달로, 내년으로 미룰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보았을 때, 무한함은 선택을 마비시키고 유한함은 선택을 가능하게 합니다. 컵이 있어야 물을 담을 수 있듯, 시간에도 '끝'이라는 테두리가 있어야 삶의 형태가 만들어집니다. 유한함은 삶을 닫는 문이 아니라, 삶에 형태를 부여하는 거푸집인 것입니다.


시계를 한번 바라보세요. 초침은 둥근 원을 그리며 끊임없이 돕니다. 그 반복되는 원운동 때문에 우리는 시간이 무한히 리필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간은 원이 아니라 직선입니다. 시작점이 있고 반드시 끝점이 존재합니다.


끝이 없으면 방향도 없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를 조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묻게 만듭니다. 덜 중요한 것들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용기, 그것은 오직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때만 얻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관리하는 관리자가 아니라, 시간의 의미를 해석하는 해석자가 되어야 합니다.




3부: 마지막 한 장을 채우는 기술

Image_fx - 2025-12-05T213154.299.png 수많은 풍선을 가위로 잘라내고 오직 하나의 빛나는 풍선만을 남기는, 선택과 집중을 상징하는 미니멀한 이미지.


이제 관점을 바꾸었으니, 구체적으로 행동할 차례입니다. 남은 한 달, 아니 단 하루라도 밀도 있게 보내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무언가를 더 하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비워내는 과정(Cleanse)'이 필요합니다.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은 자신의 전용기 조종사에게 목표 달성법에 대해 이렇게 조언했다고 합니다. "자네가 인생에서 가장 원하는 25가지를 적어보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5가지만 골라 동그라미를 치게." 조종사가 5가지를 고르자 버핏은 묻습니다. "그럼 남은 20가지는 어떻게 할 건가?" 조종사는 "5가지에 집중하되, 남은 20가지도 틈틈이 해보겠습니다"라고 답했지요. 하지만 버핏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틀렸네. 그 5가지를 다 이룰 때까지, 남은 20가지는 쳐다보지도 말아야 할 '회피 목록(Avoid at all cost list)'일세."


이것이 바로 5/25 법칙입니다. 우리의 집중력을 갉아먹는 것은 혐오하는 일들이 아닙니다. '하면 좋을 것 같은' 적당히 중요한 일들이 우리의 진짜 몰입을 방해합니다. 남은 연말, 당신의 리스트에서 '적당히 중요한' 것들을 지우세요. 그것이 진짜 몰입의 시작입니다.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루틴도 제안합니다. 거창할 필요 없습니다. '연말 30분 정리 의식'이면 충분합니다. 조용한 카페나 책상 앞에 앉아, 물리적으로 눈에 거슬리는 서류 더미나 스마트폰의 알림을 정리하세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올해 내가 끝내지 못한 일 중, 내년으로 가져가지 않고 여기서 쿨하게 포기할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 하나가 차이커 효과로 과열된 당신의 뇌를 식혀줄 것입니다. 포기할 것을 명확히 하고 마침표를 찍는 순간, 새로운 시작을 위한 공간이 생겨납니다.


마지막으로 '미래 회고(Future Retrospection)'를 권합니다. 12월 31일 밤의 당신이 되어, 지금의 당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때 그 일을 참 잘 마무리했지"라고 말하며 웃고 있는 당신을 상상해보세요. 그 31일의 내가 흐뭇해할 단 한 가지 행동, 그것이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맺는 글: 시간을 의미 있게 쓰는 사람


우리는 종종 '시간을 잘 쓰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고 꽉 채워 사는 효율적인 사람 말이지요. 하지만 저는 당신이 '시간을 의미 있게 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한함을 인정한다는 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내 삶의 그릇이 어디까지인지 알고, 그 안에 담길 가장 소중한 것들을 고르는 지혜입니다. 당신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아직 끝까지 가보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끝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방향을 조금 조정하라는 신호가 왔을 뿐입니다.


달력의 마지막 장은 얇습니다. 하지만 그 얇은 종이 한 장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지난 11개월의 후회를 덮고, 다가올 새해의 설렘을 받쳐주는 단단한 디딤돌이 될 수 있으니까요.


시계의 초침 소리에 쫓기지 마세요. 대신 당신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세요. 유한한 시간 속에서, 당신이 진정으로 몰입할 그 하나를 만나는 순간, 시간은 비로소 당신의 편이 되어 흐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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