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전염에서 벗어나 관계의 주도권을 잡는 인지 훈련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분명 사랑해서 곁에 두었고,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던 이의 입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 터져 나올 때, 우리는 깊은 당혹감에 빠집니다. 사실 우리는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그를 내 방식대로 정의하려 애씁니다. 내가 아는 그는 이래야만 하고, 이 상황에서는 당연히 이렇게 반응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기대가 어긋나는 순간, 공감은 고통이 되고 관계는 피로한 의무가 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감이란 무엇일까요? 혹시 상대의 슬픔에 똑같이 젖어 들고, 상대의 분노를 내 것처럼 껴안는 감정적 전염을 공감이라 믿고 있지는 않나요.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공감은 머지않아 고갈될 수밖에 없습니다. 타인의 감정을 온전히 내 몸으로 받아내는 일은 숭고하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위태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공감을 도덕적 의무나 타고난 성품이 아닌, 후천적으로 단련할 수 있는 인지적 근육으로 재정의하고자 합니다. 억지로 이해하려 애쓰다 상처받는 대신, 타인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그 안으로 입장하는 기술을 익힐 때 우리는 비로소 관계의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공감은 상대를 위한 선행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가장 지적인 방어 기제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타인의 삶이 내 안으로 무례하게 침범하게 두는 대신, 정교하게 설계된 공감의 근육을 통해 그들의 세계를 마주해 보려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타인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다름을 내 세계의 확장으로 받아들이는 여정을 시작해보겠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창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그 창은 우리가 살아온 세월, 겪어온 상처, 그리고 간직해온 욕망으로 겹겹이 코팅되어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대로 그려낸 타인의 얼굴을 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투사라고 부릅니다. 내 안의 해결되지 않은 불안이나 열등감을 상대방에게 덧씌워, 그가 나를 공격하거나 무시한다고 믿어버리는 것이지요. 상대의 무심한 표정 하나에 내가 그토록 예민하게 반응했던 이유는, 사실 내 안에 숨겨진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거절당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이런 투사는 확증 편향과 만나 더욱 견고한 감옥을 만듭니다. 저 사람은 원래 이기적이야라는 전제를 세우면, 그가 보여주는 수많은 배려보다 아주 가끔 보여주는 소홀함에만 시선이 머뭅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라며 스스로 오해를 확신으로 바꾸는 과정 속에서, 상대방이라는 복잡하고 입체적인 존재는 나의 편견 속에 갇힌 평면적인 죄수가 됩니다. 사실 우리가 관계에서 느끼는 대부분의 답답함은 상대가 변해서가 아니라, 내가 만든 감옥 안에서 상대를 바라보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라는 질문은 관계를 푸는 열쇠가 아니라, 종종 상대를 비난하기 위한 명분이 됩니다. 이 질문의 뒤편에는 나는 옳고 저 사람은 틀렸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타인의 행동에는 반드시 그 사람만의 논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보편적이지 않더라도, 그가 살아온 맥락 안에서는 그것이 최선의 생존 전략이었을 수 있습니다. 내 눈이라는 감옥에서 잠시 걸어 나와, 상대의 논리가 만들어진 배경을 응시하는 것. 그것이 공감 근육을 키우기 위한 첫 번째 스트레칭입니다.
많은 이들이 공감을 타고난 감수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공감은 정교한 인지적 훈련의 결과물입니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먼저 들어가 보라는 말은 공감의 핵심을 꿰뚫습니다. 상대의 감정에 동기화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처한 상황과 그가 가진 정보, 그리고 그가 느끼는 결핍의 지도로 입장해 보는 것입니다. 마치 낯선 도시의 지도를 들고 길을 찾는 여행자처럼, 상대의 세계관이라는 지형지물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감정 전염에서 벗어나 건강한 거리를 두는 기술입니다. 상대가 슬프다고 해서 나까지 슬픔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리면, 정작 상대에게 필요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없습니다. 공감 근육이 튼튼한 사람은 상대의 감정을 관찰하되 그것이 자신의 자아를 잠식하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차분한 시선으로 저 사람이 지금 느끼는 감정은 저 사람의 것이고, 내가 느끼는 감정은 나의 것이라고 경계를 명확히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명료한 인지적 공감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일상의 장면들을 떠올려 봅시다. 회의실에서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팀장을 보며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잠시 공감 근육을 가동해 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저 무리한 추진력 뒤에는 실패에 대한 극심한 불안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거실에서 사소한 말투로 짜증을 내는 배우자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짜증은 나를 향한 공격이 아니라, 오늘 하루 밖에서 소진된 에너지를 회복하지 못한 자기방어의 신호일지 모릅니다. 이렇게 맥락을 읽어내기 시작하면, 분노는 차츰 호기심과 관찰로 변합니다.
사실 이해했으니, 이제 선택한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놀라운 자유를 줍니다. 상대의 세계관을 데이터로 수집하여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했다면, 그다음 단계는 나의 선택입니다. 이 사람의 상황을 고려하여 내가 한 걸음 물러설 것인지, 아니면 이해는 하지만 내 기준을 명확히 전달할 것인지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것이지요. 공감은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라, 상황을 입체적으로 파악한 후 내릴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판단의 근거가 됩니다.
우리는 흔히 공감을 상대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라 오해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공감은 상대의 눈으로 보되, 내 발은 나의 땅에 굳건히 딛고 서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상대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주거나 그의 잘못까지 감싸는 것이 공감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세계가 돌아가는 원리를 파악했기에, 내가 어디까지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더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공감하지 않을 권리이며, 나를 지키는 공감의 한계선입니다.
글쎄요,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모든 감정에 공감해야 한다는 강박은 우리를 더 빨리 지치게 만듭니다. 어떤 관계에서는 공감의 스위치를 의도적으로 꺼야 할 때도 있습니다. 상대의 감정이 너무나 파괴적이거나, 나의 호의를 이용해 경계를 침범하려 할 때 우리는 인지적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공감을 끄는 것은 냉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관계와 나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 나를 보호하는 필수적인 선택입니다. 내가 온전해야 타인의 세계를 들여다볼 여유도 생기는 법이니까요.
상대의 편이 되지 않고도 상대의 눈으로 보는 법을 익히면,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 타인과도 공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고, 당신의 가치관을 따를 생각도 없지만, 당신의 세계에서는 그런 선택이 합리적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라는 태도. 이것이 바로 경계적 존중입니다. 억지로 마음을 맞추려 애쓰지 않아도, 서로의 세계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관계의 날 선 긴장은 상당 부분 해소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행성에서 온 여행자들이며, 각자의 궤도를 존중하면서도 얼마든지 평화롭게 스쳐 지나갈 수 있습니다.
공감 근육을 키운다는 것은 결국 내 세계의 지평을 넓히는 일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내 눈에 비친 세상만이 유일한 진실인 줄 알았지만, 훈련을 거듭할수록 우리는 타인이라는 수만 개의 평행 우주를 목격하게 됩니다. 이제 당신은 누군가의 행동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감정을 소모하는 대신, 그 이면의 맥락을 살피는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비록 모든 이를 사랑하거나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타인의 다름 때문에 나 자신의 평온을 깨뜨리는 일은 줄어들 것입니다.
이 글은 당신에게 성인군자가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의 편향을 발견하고, 더 세련된 방식으로 세상을 대하는 기술을 제안할 뿐입니다. 공감 근육이 단단해질수록 당신의 인간관계는 훨씬 가벼워지고, 당신의 내면은 더 깊어질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해도 존중할 수 있는 성숙함, 그리고 공감할지 말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단단한 주체성. 그 힘이 이제 당신의 손에 쥐어졌습니다.
어쩌면 내일 당신은 또다시 누군가에게 실망하고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든 다시 가동할 수 있는 공감의 근육이 있으니까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한번 상대의 세계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보십시오. 그곳에서 당신은 이전과는 다른 풍경을 보게 될 것이고, 당신의 세계는 아주 조금 더 넓어질 것입니다. 이제 당신의 삶은 타인의 삶과 뒤엉키는 전쟁터가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우아하게 관찰하는 평화로운 대지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