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빛 속에서 다시 태어나다
어두운 밤, 나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시는 불빛으로 가득했고 그 빛이 스며들 듯 방 안을 물들였다. 그러다 문득, 창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낯선 이의 얼굴. 그러나 어딘가 깊은 곳에서 익숙한 듯한 얼굴. 그 낯선 얼굴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뭔지 모를 섬뜩함과 불안을 동시에 전해왔다. 마치 내 안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존재가 깨어나는 듯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그 순간, 창밖에서 흘러들던 빛이 갑자기 더 강해졌다. 은은하던 빛은 서서히 번져나가더니 마침내 방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눈부신 빛. 모든 그림자가 사라지고 세상의 형체마저 지워져 갔다. 빛은 파도처럼 나를 삼키며 의식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마치 꿈이라도 꾼 듯...
정신이 천천히 돌아오며 숨을 들이켰다. 공기부터가 달랐다. 맑고 깨끗했다. 그동안 폐 속에 쌓여 있던 먼지가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빛이 스며들며 눈꺼풀이 무겁게 떨렸다. 눈부심에 본능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다가 조심스럽게 조금씩 눈을 떴다. 시야가 서서히 또렷해지자 하얀 천장이 보였다. 균열 하나 없는 매끈한 표면과 환하게 확산되는 하얀 조명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몸을 조금 움직이자 시트가 스르르 내려앉으며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조정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개인병실처럼 보이는 곳이 보였다. 유리 파티션 너머로 보이는 통로에서는 드론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제야 기억이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떨어지던 순간. 몸이 공중에 붕 뜬 감각. 그리고 모든 것이 끊기듯 가라앉았던 어둠.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들리던 드론의 소리까지.
[이든 맥스웰, 도시 보안본부... 기억 백업 시작.]
그 기억이 다시 이어지며 내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불길한 예감이 서서히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움직이는 순간, 곧바로 이상함을 느꼈다. 몸이 지나치게 가벼웠다. 익숙해야 할 무게가 사라진 듯했고 손끝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바라보았다. 흠집 하나 없는 손가락. 굳은살도, 상처의 흔적도 없는 피부였다. 분명 내 손이어야 했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누군가의 것이었다. 그 낯선 감각은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건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건지 분간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흰색 로브를 입은 의사처럼 보이는 자가 들어왔다. 그는 나의 몸상태를 확인하는 듯 살펴보며 말했다.
"환영합니다. 이든 맥스웰님. 새롭게 로그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가 내 이름을 말했지만 성이 달랐다.
"이든.. 맥스웰? 제 이름은 이든 카터인데요?"
그는 자신이 들고 있던 투명한 패드와 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지금의 당신은 이든 맥스웰입니다. 도시 보안본부 본부장, 공식적으로는 백업 승인 번호 SSS-920504. 기억은 정상적으로 이전되었고 신체도 최신 사양으로 복원되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친절했지만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떨어졌을때 다친곳이 있는지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에 전신 거울이 보였다. 나는 . 거울 속에는 분명 나와 닮은 얼굴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나의 얼굴은 아니었다. 이목구비는 비슷했지만 원래의 내얼굴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이 분명했다.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혼란이 밀려왔지만 그 감정이 완전히 올라오기 전에 의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로그인했을 때는 누구나 약간의 혼란을 겪습니다. 새로운 신체의 감각에 적응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필요해요.”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잠시 적응하신 뒤에는 밖으로 나가셔도 됩니다.”
나는 다시 거울 속의 얼굴을 보았다. 그것이 나인지, 내가 그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창밖을 보았다. 마침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내게는 처음 마주하는 광경이었다. 하층민 구역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푸른 하늘과 구름 사이로 황금빛 태양이 쏟아지고 있었다. 매일 해가 지는 것만 보다가 처음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니 완전히 다른 세계에 왔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 그동안 그림자 속에서 살아온 세월이 떠올랐다. 정오에 잠깐 스며들던 빛을 위해 살아왔는데 이곳은 아침부터 태양빛이 내려앉았다.
"샤이닝 시티의 하루는 언제나 빛으로 시작합니다. 당신의 새로운 삶도 오늘부터 시작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 그는 나에게 인사를 하고나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다시 한번 거울을 바라보았다. 피로에 빠진 얼굴은 사라지고 체격은 전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운동으로 단련된 단단한 근육이 피부 아래서 매끄럽게 윤곽을 드러냈다. 익숙했던 내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고 마치 완전히 새로운 인간이 된 듯한 기묘한 감각이 스며들었다. 나는 마침내 이 낯선 몸이 내 몸이라는 사실을 천천히, 그리고 분명하게 실감했다. 새 몸을 확인하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로그인되었다는 말을 떠올리며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해 보았다.
로그인이라고? 그렇다면 지금 나는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바뀌었다는 말이겠지? 그런데 도대체 왜지.. 그런데 왜 모습이 원래와 다르지? 로그인은 기본적으로 본인의 신체를 기반으로 생성되니까, 얼굴은 거의 비슷하게 나타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상황에 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침대 곁에 놓인 컴퓨터로 보이는 PC를 발견했다. 작동해 보니 투명한 홀로그램이 떴고 화면에는 샤이닝 시티의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곧장 검색창을 열었다.
[검색어: 이든 맥스웰]
순간 수많은 기사와 프로필이 떠올랐다. 뉴스 속 인터뷰와 정부의 공식 기록들.
[이든 맥스웰, 샤이닝 시티 보안 본부 본부장]
- 도시 보안 및 치안 통합 관리 부서 본부장.
- 이터널 플레임 프로젝트 총책임자.
나의 눈은 점점 커졌다. 화면 속 이든 맥스웰은 단순한 상류층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하고 동시에 위험한 사람이었다. 각종 기사와 영상 속 그는 내가 지원하려 했던 보안본부를 지휘하는 최고 계급인 본부장이었고 이터널 플레임 프로젝트에도 관여하는 권력자였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무장 경호원과 고급 차량들이 따라붙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기사에 따르면 지금 이든 맥스웰은 비즈니스 일정으로 한강 시티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이곳에 돌아올 일이 없다는 의미다. 나는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앞으로가 걱정이 되었다. 그가 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전에 들키게 된다면?
여러 걱정을 하며 화면을 스크롤하던 나의 손이 멈춘 건, 이든 맥스웰의 옆에 같이 있는 한 여자를 보았을 때였다. 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수정처럼 맑은 눈동자가 카메라를 향해 살짝 웃고 있었다. 빛나는 피부에는 잡티 하나 없었고 건강하게 탄력 있는 몸매에 고급스러운 드레스가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이름이.. 아리아나 아스테네스?'
기사에 언급된 이름을 읽으며 한동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섀도우 시티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였다. 그곳의 여성들은 화장을 할 시간도, 헤어를 고를 선택권도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거친 일에 손과 피부가 상해 있었고 먼지에 그을린 얼굴로 살아갔다. 깨끗한 물로 매일 샤워를 하고 향수를 뿌리며 원하는 옷을 입는 삶은 그저 먼 이야기였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그녀는 모든 게 달랐다. 화면 속 그녀는 스스로 빛나는 듯 보였다. 그러자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부러움, 동경, 그리고.. 이상한 허무함.
나는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은 저들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저 여자의 미소 하나만으로도 이든 맥스웰의 삶이 얼마나 완벽하게 보이는지를. 이제 충분히 그에 대한 검색을 마쳤다. 수십 개의 기사, 방송 클립, 소셜 네트워크 기록까지 확인하고 나니 머릿속이 묘하게 복잡해졌다. 그리고 문득 가장 중요한 의문이 떠올랐다.
"왜 나를 이든 카터가 아니라 이든 맥스웰로 알고 있는 걸까?"
눈을 떴을 때부터 처음 보는 그는 나를 이든 맥스웰이라고 불렀다. 신분 스캔 결과, 내 신분은 상류층 내에서도 꽤 높은 권력을 지닌 인물로 인식했었다. 차분히 생각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아마도 드론의 인식 시스템에 오류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테스트 구역에서 만났던 드론 중에도 이상한 개체들이 몇 있었다. 그중 하나는 분명 나를 보고도 공격하지 않고 방향을 틀어 돌아가 버렸다. 그때는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오류가 가끔씩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를 보고도 공격하지 않고 지나친 것 같았고 내 정보를 스캔할 때도 어딘가에서 오류가 발생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적인 설명은 이것뿐이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이든 카터였던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동명이인이자 상류층 최고 권력자 중 하나인 이든 맥스웰로 인식되어 세상에 돌아왔다. 이 깨달음은 나에게 이상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한편으로는 엄청난 행운 같았고 한편으로는 불길한 그림자 같았다. 행운인 이유는 단순하다. 이제 나는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샤이닝 시티의 불사 권한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만큼 위험하기도 했다. 진짜 이든 맥스웰이 돌아오는 순간, 이 오류가 발각되면 나는 과연 어떻게 될까?
더 이상 이곳에만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안 시스템은 내가 일어난 순간을 감지하자마자 움직였다. 내 체형, 신체 스펙, 피부 온도, 심지어 보폭까지 실시간으로 스캔하더니 어느새 자동으로 준비된 정장이 나타났다. 준비된 옷을 입고 마지막으로 거울 속에서 나를 본 순간, 내가 진짜 이든 맥스웰처럼 보였다. 더 이상 그림자 도시에서 허름한 작업복을 입던 이든 카터의 흔적은 없었다.
거울 앞에서 한동안 나를 관찰하다가 밖으로 나서려하자 나를 스캔하는 듯한 붉은 빛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그리자 곧 AI 음성이 공간에 울렸다.
“현재 심박수 정상. 호흡 안정. 체온 유지 양호. 신체 이상 없음. 외출은 가능하지만 오늘 하루 정도는 무리한 활동을 피하고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권장됩니다.”
나가도 괜찮다는 확인을 받은 뒤, 문을 열고 통로로 나서자 조용한 복도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발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 앞에 섰고 문이 열리자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의 벽면이 서서히 투명해졌다. 마치 장막이 걷히듯 시야가 열리며,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샤이닝 시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빛나는 도시. 끝없는 빌딩과 정원, 유유히 떠다니는 드론들. 그리고 태양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강줄기까지. 모든 것이 너무 깨끗하고 너무 완벽해서 잠시 숨이 막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엘리베이터는 마치 하늘을 유영하듯 빠르게 내려갔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이제 진짜 그들의 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샤이닝 시티는 마치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하늘은 섀도우 시티에서 보던 탁한 회색빛이 아닌, 끝없이 맑고 깊은 푸른색으로 펼쳐져 있었다. 반짝이는 고층 빌딩들은 햇빛을 받아 유리처럼 빛났고 그 사이사이에는 드론들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도로 위에는 자율 주행 차량들이 바닥에서 살짝 떠서 부드럽게 흘러가듯 움직였고 차들이 내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거리 곳곳에는 고급 상점과 갤러리처럼 꾸며진 예술품 전시들이 이어져 있었고 정원과 분수가 반짝이며 도시를 장식하고 있었다. 내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의 모든 시스템이 반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센서들이 내 존재를 인식하며 도시는 나를 주인처럼 맞이했다. 공중을 떠다니던 무인 드론 하나가 다가와 내 앞에서 멈추며 말했다.
[신원 확인 완료, 이든 맥스웰님. 최상위 서비스 권한 발동]
[현재 상태에서는 휴식과 에너지 회복이 권장됩니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로 가고 싶다. 가장 좋은 곳으로."
드론의 눈처럼 보이는 렌즈가 잠시 빛나더니 안내를 시작했다.
[샤이닝 시티 내 최고급 호텔로 이동 준비하겠습니다. 무인 최고급 택시를 호출 중입니다.]
몇 초 후, 근처 도로에서 한 차량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곧이어 문이 동문으로 열렸고 내가 들어서는 순간 택시는 천천히 떠올라 도시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안은 넓고 여유로웠다. 가는 길에 보이는 차창 너머의 도시의 풍경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빛나는 도시 사이로 떠다니는 무인 셔틀, 공중 산책로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곳곳에 있는 홀로그램 광고와 예술 영상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호텔에 도착하자 택시는 부드럽게 착륙하며 문을 열었다. 내가 발을 내딛자마자 정장을 입은 안내원이 환하게 웃으며 달려와 말했다.
"어서 오세요, 이든 맥스웰님. VIP 스위트룸으로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객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호텔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곳은 객실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간이었다. 최상층 VIP룸은 하나의 집처럼 넓게 펼쳐져 있었고 중앙에는 탁 트인 거실과 천장까지 이어진 거대한 유리창이 자리하고 있었다.
창가로 다가가자 시야가 한순간에 열렸다. 유리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샤이닝 시티는 말 그대로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100층 높이의 건물들이 정교하게 정렬된 채 끝없이 이어졌고 저녁의 햇빛이 그 표면을 스치며 도시 전체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빛은 건물과 도로 사이를 반사하며 흐르듯 번졌고 도시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빛나며 움직이고 있었다.
섀도우 시티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그곳에서는 해가 지면 어둠이 먼저 내려앉았지만, 이곳의 태양빛은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이렇게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섀도우 시티에서 늘 올려다보며 저 높은 곳에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만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그곳에 직접 서 있었다. 심장이 묘하게 두근거렸다. 눈앞의 풍경은 나에게 새로운 세계의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했다. 나는 잠시 말없이 그 장면을 바라보며 내가 정말 이 도시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다른 창쪽으로 옮기자 저 멀리 두 도시를 가르는 거대한 담장인 섀도우 월이 보였다. 섀도우 시티와 샤이닝 시티를 나누는 경계선. 높고 두꺼운 그 벽은 반대편에서 보니 한층 더 단단하고 외부의 어떤 위협도 차단할 수 있을 것처럼 믿음직스러웠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섀도우 시티의 모습은 흐릿했다. 낮고 어둡고 빛을 잃은 건물들이 조밀하게 모여 있을 뿐이었다. 멀리서 보니 그 건물들은 장난감처럼 작아 보였고 그곳에서의 자신의 지난 삶이 한없이 왜소하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반대로 지금 서 있는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나는 유리창에 손을 대고 한참이나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이제야 진짜 인생이 시작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차갑고 완벽한 도시의 한가운데서, 나는 처음으로 진짜 상류층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까지 받아본 적 없는 최상의 서비스들도 만끽했다. 호텔에서 주문한 음식은 그야말로 최고급이었다. 은빛 뚜껑을 열자 향긋한 소스 냄새가 퍼졌다. 최고급 스테이크와 갈비는 지금까지 먹어본 최고의 고기였다. 한입 베어 물자 입안 가득 부드러운 육즙이 번졌다. 배가 고팠던 탓인지, 처음에는 그저 허겁지겁 먹어치웠지만 곧 천천히 씹으며 그 맛을 음미하게 됐다.
메인 요리를 모두 비우자, 달콤한 디저트가 차례로 나왔다. 꿀 향이 가득 밴 허니버터 브레드와 시원한 망고 빙수. 입안이 상큼하게 정리되며 완벽한 식사의 마무리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천천히 마시며 잠시 여유를 즐겼다.
식사를 마치고 발코니 문을 열자, 저 멀리서 해가 기울며 도시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유리 난간 아래로 보이는 샤이닝 시티의 풍경은 언제 봐도 장관이었다. 고층 빌딩들의 유리창이 붉은 노을을 받아 반짝였고 모든 도로와 구조물들은 주황빛에 물들어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나는 더 이상 이든 카터가 아니다. 이 세계는 나를 이든 맥스웰로 받아들이고 있다. 불안과 설렘, 그리고 묘한 해방감이 뒤섞였다. 노을이 서서히 붉은빛에서 회색빛으로 바뀌고 도시 곳곳에 조명이 켜지기 시작하자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봐야겠다."
호텔을 나서자 이미 해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어둠이 도시를 삼키지는 않았다. 태양이 남긴 자리를 건물 외벽에서 흘러나오는 조명과 공중을 가르는 가로등의 빛이 거리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며 밤을 밝혀냈다.
섀도우 시티에서는 해가 지는 순간 세상이 닫혔다. 가로등이 켜져 있어도 빛은 바닥에 닿지 못했고 골목은 언제나 어둠에 잠겼다. 밤의 거리는 조심스럽게 걸어야 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밤이 되었음에도 도시는 또 하나의 낮처럼 숨 쉬고 있었다. 빛은 사람을 숨기지 않았고 어둠은 위협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활발하게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나란히 걷는 연인들, 친구들과 어울려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상점과 바에서는 음악과 불빛이 거리로 흘러나왔고 유리 너머의 실내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은 밤이 되면 잠드는 도시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도 계속 숨 쉬고 움직이고 살아 있는 도시였다. 나는 그 풍경 한가운데 서서 왜 이곳이 밤에도 빛나는 도시라 불리는지 비로소 실감했다.
나는 걸음을 늦추고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대부분은 몸에 잘 맞는 정장이나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모던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모두 옷차림이 깨끗하고 단정했다. 누구 하나 서두르거나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삶에 쫓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서두를 이유도, 눈치를 볼 필요도 없는 얼굴들이었다. 마치 이 도시는 사람들에게 시간이 충분하다는 확신을 미리 나눠준 것 같았다.
거리를 구경하면서 걷다보니 근처에 보이는 세련된 바가 눈에 띄었다. 음악 소리가 살짝 흘러나오고 창가에는 환하게 웃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곳으로 향했다. 마치 원래 이곳의 사람이었던 것처럼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고급스러운 바틀과 잔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바텐더 앞에 앉았다.
바텐더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것을 준비해 드릴까요, 이든 맥스웰님?"
잠시 고민하다 눈앞의 술들이 익숙하지 않아 그냥 가장 클래식한 칵테일을 주문했다. 투명한 잔 속에서 천천히 얼음이 굴러가며 맑은 소리를 냈다. 그 한 모금을 입에 머금자 상쾌하고도 은은한 달콤함이 퍼졌다. 모든 게 현실 같지 않았다. 잔을 비우며 창밖의 야경을 다시 바라보던 순간, 조용히 내 곁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리고 누군가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이든? 이든 맞지?"
차분하지만 묘하게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긴ㅍ 머리카락과 유리처럼 맑은 눈동자를 가진 여성이 서 있었다. 빛을 머금은 듯한 머리카락이 천천히 흔들리며 그녀의 존재 자체가 이 도시의 화려함과 완벽하게 어울렸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처음 눈을 뜬 곳에서 이든 맥스웰을 검색하며 봤던 기사 속 사진, 그의 곁에 있던 바로 그 여자의 얼굴이었다.
"어.. 아리아나?"
여기 오기 전에 기사에서 봤던 이름인 아리아나 아스테네스를 간신히 기억해 냈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다가와 내 팔에 살짝 손을 얹었다. 촉감은 따뜻하고 무척 자연스러웠다.
"왔다는 소식을 못 들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네. 잘 돌아와서 다행이야."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아리아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를 이든 맥스웰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 따뜻한 시선이 묘하게 안도감을 주었다. 바에 나란히 앉은 후에 그녀가 말했다.
"여행은 어땠어?"
"그냥.. 그랬지. 특별히 즐거운 여행은 아니었어.”
나는 말을 흐리며 대답했다.
아리아나는 잔을 살짝 기울이며 내 눈을 바라봤다.
"한강 시티에서 미팅을 한다고 했잖아. 결과가.. 생각만큼 좋지 않았던 거야?"
나는 잠시 멈칫했다.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긴장감이 온몸을 타고 흘렀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지. 결과가 마음에 들진 않았어. 결국 시간만 낭비한 셈이지. 그래도.. 돌아오니 훨씬 낫네."
아리아나는 내 말을 조용히 듣고는 마치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부드럽게 내 팔을 만지며 말했다.
"괜찮아. 당신은 항상 길을 찾아내잖아."
그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안도감과 동시에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아리아나가 물었다.
"한강 시티는 어떤 곳이었어?"
한강 시티라..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섀도우 시티에 있을 때 동료들과 부유한 도시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곤 했다. 어렸을때는 아버지도 몇 번 이야기해준 도시였다. 그래서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조심스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샤이닝 시티처럼 부유한 도시 중 하나야. 옛날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던 곳인데 그곳에 있던 강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고 해. 무엇보다도, 유일하게 다른 도시나 마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기술력과 수출만으로 성장한 도시라고 들었어."
"대단하네.."
아리아나는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도시는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산이 도시를 둘러싸고 그 사이로 넓은 강이 흐르지. 마치 자연 속에 도시가 자리 잡은 것 같은 느낌이야."
아리아나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정말 한번 꼭 가보고 싶다. 다음에 갈 일 있으면 혼자 가지 말고 나도 데려가줘."
나도 한강 시티가 어떤 곳인지 한번 보고 싶었다. 화면 속 사진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그 도시의 공기와 빛을 느껴보고 싶었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그 풍경 속에서 사람들은 어떤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다음 미팅은 어떨거 같아? 그들은 우리가 가진 영생을 원하잖아.”
아리아나의 질문에 나는 잠시 멈칫하며 어떤 사업인지를 짐작했다.
“맞아. 영원히 산다는 건 무엇을 내놓아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지. 그러니 다음 미팅에서는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거야.”
아리아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않아? 그렇게 발전한 도시에서 왜 다른 곳보다 인구감소가 더 심각할까?"
"그러게.."
한강이라는 도시의 저출산 문제... 이 주제로도 전에 동료들과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옛날에 아직 나라라는 개념이 존재하던 시절. 지금의 한강 시티, 즉 한국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발전된 곳이었지만 한때 심각한 저출산으로 인구 소멸 위기까지 갔던 시기가 있었다. 다행히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고 긴 시간 끝에 지금의 도시의 체계를 유지하며 버텨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다시 그 문제가 또 다시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듯했다.
"결국은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영생이라는 기술이 꼭 필요한 거잖아. 인구가 줄어들면 도시도 무너질 테니까. 그러니까.. 이건 어쩔 수 없이 좋은 비즈니스 관계가 될 수밖에 없을 거야.”
나는 대답하면서도 이 거래에 대해 잠시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샤이닝 시티만큼 강력한 도시는 몇 곳 더 있었다. 그러나 영생 기술만큼은 오직 이곳에서만 개발된 것이었다. 그 단 하나의 기술 덕분에, 다른 모든 도시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였다. 이 도시는 그 기술을 무기로 언제나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영생을 얻는 대가로 우리는 무엇을 받는 거야? 기사에도 나오지 않고 공식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아. 마치 비밀인것처럼.”
“아마 그만큼 중요한 것이겠지. 그래서 철저히 숨긴 채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걸지도 몰라.”
나 역시 그 거래 조건의 자세한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말을 맺으며 잔을 비우고 나가기 위해 일어섰다. 같이 나가려 하자 그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우리, 이제 당신 집으로 가자."
순간 나는 당황했다. 이곳에서 나의 집이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 근데 좀 술이 올라서 그런지, 집 가는 길이 가물가물하네..."
일단 나는 핑계를 대보았다.
아리아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아. 드론에게 택시를 부르게 할게."
아차, 그 방법이 있었지.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내 집.. 과연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까?'
우선 나가기 위해 계산을 하려고 주머니를 뒤지다가 순간 멈췄다. 손끝에 아무런 감촉이 없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여기서는 어떻게 하지. 계산을 하나? 아니, 돈이라는 걸 사용하나?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나?
아리아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자연스러울지조차 몰랐다.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맴돌았다.
"아.. 그, 뭐라 해야 할지..."
그때 바텐더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리아나 양과 좋은 시간 보내시죠, 이든 맥스웰님.”
그리고는 내가 마신 잔을 조용히 치우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 뒤돌아섰다. 그의 말과 동작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뉘앙스가 스며 있었다. 마치 내가 왜 당황했는지를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더 이상 확인할 것도 없다는 암시를 남기며.
"이든, 이제 나가자."
아리아나의 말투는 밝고 가벼웠다. 그제서야 여기서는 계산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걸 어렴풋이 기억해 냈다.
이곳에서 돈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류층은 결제나 계산 없이도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들의 편의를 위해 일하는 직업군과 서비스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류층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 받는 보상은 단 하나, 불멸의 삶이었다. 그것이 바로 이 도시가 유지되는 방식이었다.
아리아나는 바텐더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나는 알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내 곧 그녀와 함께 바를 나섰다. 문이 닫히자 실내의 조명이 잠시 흔들렸다. 카운터 뒤에 남은 바텐더는 잔을 닦으며 두 사람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엔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바에서 나온 우리는 무인 택시를 타고 나의 집.. 아니, 정확히 말해 이든 맥스웰의 저택에 도착했다. 저택은 거대한 요새 같았다. 넓은 마당과 양쪽에는 조경된 나무와 크고 작은 분수들이 늘어서 있었고 중앙 정원에는 무장 경비 드론이 공중에서 부유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정문 앞에는 방탄복을 입은 경비병들이 있었다. 내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들은 일제히 경례를 붙였다.
"이든 본부장님! 예상보다 일찍 귀환하셨군요!"
그 한마디와 동시에, 저택을 둘러싼 보안이 순식간에 해제되었다. 내 심장은 두근거렸지만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천천히 걸었다. 저택 안에 들어서자 거대한 홀과 대리석 계단, 그리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곳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샤이닝 시티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상징하는 건물 중 하나였다. 여기서는 누가 봐도 내가 세상을 가진 남자였다.
아리아나는 자연스럽게 내 팔을 잡아끌며 2층으로 안내했다. 복도는 조용했고 발걸음마다 자동으로 조명이 켜졌다. 마치 집 자체가 살아 있는 듯 내 움직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여기가 당신의 방이야."
그녀가 미소 지으며 문을 열었다. 방은 호텔 스위트룸을 훌쩍 뛰어넘는 규모였다. 벽면 한쪽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샤이닝 시티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유리 옆에는 큰 침대가 있었다.
아리아나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부드럽지만 강하게 나를 침대 위로 밀쳤다. 순간, 포근한 침대와 함께 부유하는 듯한 감각이 스며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졌고 머리카락이 내 시야를 스치며 은은한 향이 퍼졌다. 그녀의 몸이 천천히 다가와 내게 안겼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며 서로의 숨결이 맞닿았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멀어지고 남은 것은 서로의 심장박동뿐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나를 끌어안았다. 숨결이 가까워지더니, 어느새 입술이 맞닿았다. 그 품 안에서 잠시 현실감이 흐려졌다. 마치 이 도시의 빛과 소음이 모두 사라지고 우리 둘만이 남은 듯한 기분이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드론들이 순찰하고 방 안에는 조용한 숨소리만이 남았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되었다. 죽을 날만 기다리던 과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나는 이제 샤이닝 시티의 권력자이자, 모든 것을 손에 넣은 이든 맥스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