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빛을 향한 도약
며칠 후, 아침 일찍부터 눈이 떠졌다. 하지만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상류층 사회의 초고층들이 가려놓은 하늘 아래에서는 태양이 떠도 그 빛이 쉽게 내려오지 않았다. 섀도우 시티는 일출이라는 개념이 의미가 없었다. 태양은 언제나 한참 뜬 후에 기울어지기 시작할 때 얼굴을 내밀었고, 그나마도 짧은 시간 후엔 노을이 되어 저물었다. 우리들이 볼 수 있는 해는 그 짧은 황혼뿐이었다.
오늘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였다. 이터널 플레임 프로젝트에 지원했던 사람들이 테스트를 시작하는 날이다. 내가 지원한 직업은 도시 보안 본부였다. 상류층 사회에서 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자, 하층민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합격하게 되면 나의 생체 데이터가 정식으로 샤이닝 시티 서버에 백업된다. 얼굴, 키, 체중, DNA와 세포 상태 등을 저장하고 그 중에서 결점은 빼고 완벽한 DNA가 채워진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기억 백업이 진행된다.
직업군은 상류층보다 기회가 더 제한적이긴 하지만 내가 본 풍경, 내가 느낀 감정, 내가 한 모든 선택과 대화가 모두 저장된다. 마치 게임의 세이브 파일처럼 내 존재가 언제든 되돌릴 수 있는 데이터로 남는다. 그 권리를 얻으면 예상치 못한 사고로 목숨을 잃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심한 상처를 입을 경우 치료보다는 기존의 육체를 폐기하고 새로운 신체를 생성한다. 그러면 회복 기간이나 사고 후유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손상된 신체를 복구하는 대신 완전히 새롭게 교체하기 때문에 육체적 통증이나 정신적 충격이 최소화된다.
무엇보다 어머니처럼 불치병에 걸려도 병에 걸리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아니, 이제는 처음부터 그런 병에 걸리지 않는 DNA를 갖게 될 테니 불치병이라는 단어조차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육신이 늙어가도 내 의식과 기억은 새로운 신체에서 다시 깨어난다. 더 강하고 더 젊고 더 완벽한 형태로 재구성된다. 그 과정은 마치 게임에 접속하듯 아무 일 아닌 것처럼 가볍게 이어진다. 죽음은 단지 잠시 로그아웃일 뿐, 영원한 삶이 약속된 세계. 바로 그것이 내가 이 프로젝트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유였다. 우리에게는 대부분은 평생 한 번도 가지지 못한 권리였다.
길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붐볐다. 시험장으로 향하는 수만 명의 지원자들, 그들의 얼굴에는 기대와 절박함이 뒤섞여 있었다. 각자 낡은 운동화와 회색빛의 동일한 옷차림이었지만 눈빛만큼은 날카로웠다. 시험장은 샤이닝 시티에 위치해 있었고 이동을 위한 차량이 준비되있었다. 군인들은 각자가 지원한 직군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된 구역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나는 지원자들을 따라 걸으면서 군인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모든 군인들은 검은 헬멧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마치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려주지 않으려는 듯 했다.
나는 보안본부 지원 접수처 적힌 장소를 향해 줄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며 신분 확인을 받았다. 손목에 내장된 ID칩을 스캐너에 대자 기계음이 차갑게 울렸다.
“신원 확인 완료. 이든 카터, 시험 응시 승인.”
안내 로봇이 신분확인과 함께 팔에 금속 팔찌를 채워주었다. 시험용 식별 팔찌였다. 이 팔찌에는 심박수, 체온, 위치가 실시간으로 전송되며 탈락하거나 사망하면 곧바로 데이터가 기록된다. 보안 본부에 지원한 자들의 테스트가 진행될 장소는 섀도우 시티와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게이트 근처에서 큰 차량들이 사람들을 하나씩 태웠다. 매우 크고 단단한 차량이었다. 겉모습은 버스처럼 보였지만 바퀴는 없이 도로 위를 부유하고 있었다. 지원자들을 태운 차량은 곧 섀도우 월에 있는 게이트를 통과한 뒤, 곧바로 시험장으로 향했다.
샤이닝 시티는 입구부터 낯설 만큼 깔끔했다. 도로는 티 하나 없이 매끄럽게 포장되어 있었고 길가의 구조물들은 정교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칙칙했던 내 도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바람마저 따뜻하고 깨끗하게 느껴졌다. 이어서 초고층 건물들이 시야를 압도했다. 구름을 찌를 듯 솟아 있는 건물들은 마치 거대한 유리 기둥 같았다. 하늘을 가르는 그 모습에 마치 다른 세계에 발을 들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원자들을 태운 차량들은 얼마 안 있어 도착지에 멈춰 섰다. 시험 장소를 보는 건물은 높이 솟은 담장과 철문, 그리고 곳곳에 설치된 감시 드론들과 군인들이 지원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아무도 도망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 같았다. 나는 군인들의 안내대로 거대한 시험장으로 들어섰다. 이곳 내부는 반듯하고 깨끗했다. 흰색 바닥과 벽, 높은 벽은 그 자체로 이미 다른 세상이었다. 그리고 한쪽에 거대한 전광판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광판에는 광고 영상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당신도 불멸을 원합니까? 샤이닝 시티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노력하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마치 희망을 팔면서도 동시에 절망을 확인시키는 듯한 영상이었다. 지원자들 중 몇몇은 그 화면을 올려다보며 숨을 고르고, 다른 이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을 살펴보니 각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두 손을 꼭 모은 채 입술을 깨물며 불안을 감추려 했고 다른 사람은 자신 있다는 듯이 몸을 가볍게 풀고 있었다. 나이대도 다양했다. 이제 성인이 된 것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부터 쉰을 훌쩍 넘은 듯한 사람들까지, 그리고 그 사이에는 많은 여성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과는 달리 눈에 띄게 건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누구보다 크고 체격이 거대한 이들이었으며 강한 인상을 풍겼다. 팔과 어깨 근육이 단단히 뻗어 있었고 마치 몸 전체가 프로젝트에 합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했다. 그들은 긴장보다는 오히려 미묘한 여유를 띠고 있었고 주변을 훑어보며 조용히 경쟁자들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실제로 저런 사람들이 프로젝트에 합격할 확률이 높았다. 건장한 체격과 훈련된 몸은 이곳에서 곧 능력의 증명이었으니까. 그에 비해 나는 조금 왜소한 편이었다. 거울로 보면 평범한 몸이지만 이 거대한 체육관 속에서는 유난히 작고 가벼워 보였다. 그래서일까, 아직 테스트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어깨가 묵직하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체육관 정면의 문이 열리며 군인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검은빛 전투복에 검은 헬맷으로 얼굴을 가린 그의 모습은 하나하나가 정해진 리듬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가 중앙에 멈춰 서자 공간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고 공기마저 긴장으로 굳어졌다. 군인은 손에 들고 있던 투명 태블릿을 바라보더니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조 배정을 시작한다. 스크린에 나온 이름을 확인하고 정해진 구역으로 이동한다.”
수 천명의 보안본부 지원자들은 스크린에 배정된 자신의 이름을 찾아서 지정된 장소로 이동했다. 그리고 팔목에 조 번호가 새긴 밴드를 착용했다. 스크린에 나온 내 이름, 이든 카터는 B조에 배정되어 있었다. 나도 지정된 장소 가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팔을 내밀고 밴드를 착용했다. 그리고 곧 배정이 모두 끝났다. 같은 조에서 시험을 치르는 사람들은 모두 합쳐 200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앞에서 A조가 먼저 불려 들어갔고, 우리는 그들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불안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안쪽에서 들것에 실려 나온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얼굴이 창백해진 채 눈을 감은 이도 있었고 팔이나 다리를 움켜쥐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이도 있었다. 피로 얼룩진 옷자락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주변의 대기자들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지원자들 중 누군가는 두려움에 고개를 돌렸고 또 다른 이는 입술을 깨물며 눈길을 떼지 못했다. 잔뜩 웅크린 자세로 중얼거리며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억지로 태연한 척 농담을 던지던 이들마저 점점 말을 잃어갔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비명과 부딪히는 소음은 불안을 더욱 키워 대기실 전체를 차갑게 만들었다. 그 불안은 곧 우리 차례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기에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모두의 가슴속을 조여왔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거대한 자동문이 낮게 울리는 소음을 내며 천천히 열렸다. 차가운 숨결 같은 느낌과 함께 새로운 공기가 밀려들어왔고, 그 순간 나는 마치 공기마저 바뀐 듯한 낯선 기운을 느꼈다.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바람은 우리를 맞이하는 환영 같으면서도 동시에 위협처럼 다가왔다. 한 발씩 건물 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긴장감이 더해졌다. 뒤에서 들려오는 다른 지원자들의 숨소리조차 뚜렷하게 들렸고 발자국 소리는 묘하게 울려 퍼졌다. 잠시 뒤, 한 군인이 굵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첫 번째 테스트는 앞으로 달려가 정해진 라인을 넘어야 통과다. 이자리에 있는 200명 중 먼저 도착한 150명만이 다음 테스트로 나아갈 수 있으며 나머지는 전원 불합격이다.”
첫 시작은 체력 테스트였다. 겉으로는 단순한 달리기처럼 보였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러닝 트랙은 평범하지 않았다. 트랙 중간마다 다양한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장치들은 달리는 사람들을 방해하거나 넘어뜨리는 함정 같은 거였다. 이미 여러 번 경험해 본 테스트였기에 나는 어느 정도 익숙한 장소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처럼 이미 몇 번 경험이 있는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었고 처음 마주한 듯 긴장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곧 거대한 스크린에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숫자는 30초에서 서서히 줄어들었고 10초가 남자 모두의 시선이 화면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0이 되는 순간, 스타트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지원자들은 일제히 앞으로 달려 나갔다. 처음에는 평범한 달리기였다. 하지만 곧 숨겨져 있던 첫 번째 함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부 레일이 러닝머신처럼 움직이며 참가자들을 뒤로 밀어냈다. 앞으로 달려도 속도가 조금만 떨어지면 제자리에서 달리게 되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그대로 뒤로 밀려나 바닥에 구르고 말았다.
다행히 모든 레일이 작동하지는 않았고 불규칙적으로 계속 번갈아가며 작동했기에 지원자들은 정상적인 레일을 찾아 계속 라인을 바꾸며 달려야 했다. 그러나 진짜 조심해야 할 것은 함정이 아니라 바로 같은 지원자들 사이에 있었다.
“비켜! 건드리지 마!”
“위험해! 밀지 마!”
고함과 욕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몇몇은 고의로 옆 사람을 밀쳐 경쟁자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예상대로 앞서가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옆 사람을 밀어서 넘어트렸다.
“야, 뭐 하는 거야!”
넘어진 참가자가 소리쳤지만 이미 그는 러닝머신 구간에 휩쓸려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뒤쪽에서는 조심하라는 경고가 들렸고 곧이어 뒤엉킨 사람들의 비명과 충돌음이 연달아 터졌다. 넘어진 이들이 서로 부딪치며 쓰러지자 그 충격이 퍼져 나가며 달리던 여러 명이 도미노처럼 함께 구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혼란 속에서 쓰러진 참가자들을 가뿐히 뛰어넘으며 선두를 따라 달려 나갔다. 이곳에서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달릴 수 있었다. 비록 뒤처지더라도 앞쪽에서 서로 밀치면서 뒤처지는 사람들이 속출하기 때문에 충분히 따라잡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부상을 크게 당해 뛰기 힘든 상태라고 판단하는 순간, 그 기회는 사라졌다. 드론이 붉은빛을 비추며 다가와 즉시 불합격 판정이 내려졌고 그 대상은 그대로 경기장 밖으로 이송되었다.
다음 달리기 코스는 모래지옥이었다. 단순한 모래길 같았지만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부터 바닥이 무겁게 발을 붙잡았다. 보기에는 그냥 모래밭같아 보이지만 조금만 힘이 실리면 바로 모래가 갈라지며 발을 삼켜버렸다. 깊은 곳은 아니었지만 속도가 조금이라도 느려지면 발이 점점 깊게 박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거, 장난 아니잖아!”
누군가가 먼저 지나가려 했지만 보기보다 나아가기 힘들자 멈추며 말했다.
“움직여! 멈추면 빠진다!”
바로 옆에서는 절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원자들은 가능한 한 가볍게 발을 디디며 속도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앞사람이 멈춰버리면 뒷사람도 같이 멈추게 되었고 동시에 그들의 발아래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젠장, 빨리 비켜!”
“야! 뭐 해! 빨리 가라고!”
서로가 고함을 지르며 트랙은 점점 아수라장이 되어 갔다. 누군가는 일부러 옆 사람을 밀쳐 경쟁자를 모래 속에 빠뜨리려 했다. 거칠게 밀려난 한 남자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며 몸의 절반 가까이가 모래 속으로 파묻혔다.
“잠깐! 누가 좀 잡아줘!”
그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지만 아무도 잡아주지 않았다.
“미안해! 나 먼저 갈게!”
한 남자가 그의 곁을 지나가며 외치며 지나쳐 갔다. 그는 안간힘을 써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발버둥 칠수록 몸은 더 깊이 끌려 들어갔다. 손을 뻗어 도움을 구했지만 주변의 지원자들은 그를 외면한 채 앞만 보고 달렸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를 발판 삼아 밟아갔고 그의 몸은 더욱 모래 깊이 박히며 사라져갔다. 모래 위를 달리는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 그리고 뒤편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는 외침이 섞인 긴박함이 체육관을 뒤덮었다. 여기서 주저앉는다는 건 곧 탈락이기에 전략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앞서가서 경쟁이 조금 누그러질 때를 기다렸다가 틈을 노려 순식간에 달려 빠져나왔다. 어차피 아직 코스가 많이 남아 있었기에 초반부터 무리하게 위험한 경쟁을 벌이는 건 현명하지 않았다.
잠시 후, 달리기 코스가 끝나가자 오르막 코스가 나타났다. 바닥은 미끄러웠고 경사는 거의 45도에 가까웠다. 군데군데 매달린 밧줄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지원자들은 손과 발을 모두 써서 몸을 끌어올렸다. 밧줄을 잡는 손에는 금세 땀이 배어 미끄러졌고 손목과 팔 근육이 찢어질 듯 저려왔다. 뒤쪽에서도 한 명이 올라오다가 미끄러졌다. 그의 몸은 그대로 아래로 구르며 다른 참가자들을 스쳤다. 비명과 함께 욕을 내뱉었다. 어떤 이는 본능적으로 다른 참가자를 밀쳐버리며 균형을 잡았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이곳은 경쟁의 장이었고 다른 사람의 추락은 곧 나의 생존이었다.
오르막 구간이 눈앞에 다가오자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며 체력을 회복했다. 작년엔 잠깐만 올라가도 금세 지쳐 버렸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경쟁이 덜한 밧줄 구간이 나타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숨을 가다듬고 타이밍을 재다가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쪽을 발견하자마자 몸을 던졌다. 손에 닿은 밧줄이 거칠게 미끄러졌지만, 이를 악물고 매달린 채 몸을 끌어올렸다. 다행히 내 계획이 통했다. 치열한 몸싸움도 없이 비교적 수월하게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예전에 수없이 떨어졌던 경험들이 이번만큼은 내게 도움이 되었다.
오르막 코스를 넘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참가자들의 얼굴에는 이미 지쳐 보였지만 여기까지는 속도와 근성을 시험하는 단계일 뿐, 진짜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정신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시야를 들자 거대한 벽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벽을 따라 넓은 사다리 구간이 이어지고 있었고 높이는 대략 8층 건물쯤 되어 보였다.
사다리 구간의 규칙은 간단했다. 사다리의 꼭대기층에 올라가면 통과였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손을 걸치며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땀에 젖은 손바닥을 미끄럽게 만들었다. 4층 높이쯤 올랐을 때였다. 발을 딛고 있던 금속봉이 갑자기 떨어져 나가며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본능적으로 손아귀에 힘을 주어 매달린 덕분에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떨어지지 않으려 이를 악물며 옆 칸으로 몸을 옮기고 겨우 균형을 되찾은 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쪽에서도 나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금속봉이 끊어지며 떨어졌고, 그 충격으로 한 지원자가 중심을 잃었다. 짧은 비명과 함께 그는 허공을 가르며 추락했다. 잠깐의 충격을 받아보였지만 다시 정신 차리고 사다리에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드론 한 대가 빠르게 날아와 그의 손목 팔찌를 스캔했다.
[탈락]
차가운 음성이 공기 속을 울리며 퍼졌다. 이제부터 아래로 떨어지면 끝이었다. 탈락한 지원자를 본 사람들은 정신을 집중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 금속봉이 떨어질지 몰랐기에 손과 다리에 힘을 주며 올라갔지만 긴장감이 커질수록 불안도 함께 자라났다. 처음에는 단순히 누가 먼저 올라가느냐의 문제였다. 모두가 똑같이 위를 바라보고 땀에 젖은 손으로 철봉을 움켜쥐며 오르기 시작했다. 떨어지면 탈락. 단 한 번의 실수도 허락되지 않는 규칙. 그래서 다들 조심스럽게 그러나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누군가 그 규칙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체격이 좋거나 재빨라 보이는 몇몇이 중간쯤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그들은 조용히 옆 칸으로 이동하더니 올라오는 사람들을 향해 발을 차기 시작했다. 밑에서 올라오던 누군가가 갑자기 날아온 발차기에 중심을 잃고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떨어졌다.
그들은 곧 다른 사냥감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지원자들이 허겁지겁 옆으로 피하거나 아예 밑으로 내려가 몸을 피했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사다리를 타고 옆으로 이동하더니, 가까운 지원자들을 향해 몸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제네들 뭐야!”
“건드리지 마! 떨어진다니까!”
곧 비명이 뒤섞이며 공간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표적이 된 한 남자가 매달린 채 위쪽을 향해 외쳤다.
“제발, 좀 봐줘! 부탁할게!”
밑에서 매달린 남자가 간절히 부탁했다. 그러자 위에 있던 남자가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그래. 넌 안 밀게. 올라와.”
그 말에 밑에 있던 자는 안도한 듯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철봉을 잡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밑에서 올라오기 시작한 남자는 그의 바로 옆을 지나치려는 순간,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미안, 생각이 바뀌었어.”
그의 발이 위로 올라오던 남자의 몸을 강하게 걷어찼다. 올라오던 남자는 균형을 잃고 허공으로 떨어졌다.
“으악-!”
짧은 비명, 그리고 곧 쿵 하는 둔탁한 소리. 떨어진 그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드론이 날아와 그의 손목 팔찌를 스캔했다.
[탈락]
드론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려 퍼졌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위로 올라가려던 사다리 구간은 이제 완전히 뒤집힌 전장이었다. 누가 먼저 오르는가가 아니라, 누가 먼저 떨어지는가의 싸움이 되어 있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쫓는 동안 나는 숨을 죽인 채 기회를 엿보다가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중 한 명이 나를 발견했다. 그는 눈빛을 번뜩이며 빠르게 이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가까워지자마자 그의 다리가 날아왔다. 나는 간신히 몸을 옆으로 틀어 피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연달아 날아오는 발차기에 팔과 어깨가 여러 번 부딪혔다. 나의 몸은 크게 흔들렸지만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그가 또다시 발을 들어 올리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는 몸을 비틀며 발을 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놓지 않았다. 팔이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이 악물고 버텼다.
잠시 후, 그의 균형이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있는 힘껏 그의 다리를 끌어당겼고 그의 손에서 힘이 빠졌는지 그는 허공으로 떨어졌다. 짧은 비명과 함께 아래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드론이 곧바로 날아와 그의 손목을 스캔했다.
[탈락]
나는 한동안 그대로 매달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그를 떨어뜨렸다는 사실에 잠시 놀랐지만 이네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아래쪽에도 갑자기 움직임이 일었다. 흩어져 있던 지원자들이 서로 눈을 맞추더니 동시에 소리쳤다.
“지금이다! 동시에 같이 올라가!”
그들은 한꺼번에 사다리를 타고 위로 몰려갔다. 위에서 길을 막고 있던 방해자 하나가 당황한 듯했지만 다시 올라오던 사람을 떨어뜨리려 발을 들었다. 그 순간, 아래쪽에서 두 명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세 사람의 몸이 엉켜 흔들렸다. 방해자는 체격이 크고 힘도 강했지만 두 명이 동시에 매달리자 버티지 못했다.
결국 그는 금속봉에서 손을 놓쳤고 세 사람 모두 균형을 잃은 채 허공으로 떨어졌다. 짧은 비명, 이어지는 충돌 소리. 먼지가 일며 아래쪽이 잠시 정적에 잠겼다. 밑으로 먼저 떨어진 방해자와 다른 한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두 명 위에 부딪혀 내려온 한 사람만이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리고 멀리서 드론이 날아와 그들의 손목을 스캔했다.
[탈락] [탈락] [탈락]
공기 속에 차가운 방송음이 연속으로 메아리쳤다. 그 소리를 들은 다른 방해자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더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한 듯 포기하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곧 몇 명이 정상에 도착하며 통과 신호가 울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바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있었다. 움직임이 없는 몸들,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들. 그 광경에 나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변의 지원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멀리서 무장한 군인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검은 헬멧으로 인해 표정을 알 수 없었다. 가만히 서서 아무런 말도 없이 마치 사람의 생사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듯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사다리를 올려다봤다. 멈출 수는 없었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방해하는 자들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금속봉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중간마다 참가자들이 떨어졌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 익숙해진 듯했다. 누군가는 떨어질 뻔하다가 비틀거리며 다른 봉을 붙잡고 누군가는 떨어지는 도중에 간신히 봉을 잡고 추락을 피한 자도 있었다. 그 순간, 바로 앞을 오르던 한 여자도 발을 딛고 있던 금속봉 한쪽이 끊어지면서 허공 쪽으로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가까스로 버티는 듯하더니 손에 힘이 빠지는 게 보였다.
“아..!”
그녀가 미끄러져 떨어지려는 순간, 나는 재빨리 한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흔들리는 사다리 위에서 중심을 잡느라 나도 위험할 뻔했지만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다시 끌어올렸다. 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사다리에 매달린 뒤, 작은 숨을 몰아쉬었다.
“고마워.”
다행히 그녀는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흔들리던 몸을 바로 세우고 그녀의 뒤를 따라 다시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곧 맨 위층이 눈앞이었다. 긴장감이 조금씩 풀리면서 가슴속엔 기대가 차올랐다. 손끝의 떨림 대신, 드디어 끝에 닿을 수 있다는 희미한 확신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을 넘기 직전, 내가 발을 디디고 있던 금속봉이 갑자기 철컥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허공에 매달린 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 대비하지 못했고 결국 떨어진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순간, 먼저 올라가 있던 그녀가 몸을 숙여 내 손목을 붙잡았다.
“잡아!”
나는 남은 힘을 다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나를 끝까지 잡아당겼다. 드디어 꼭대기에 올라서자 숨이 거칠게 터져 나왔다. 나는 그녀를 보며 숨을 고르며 말했다.
"떨어질 뻔했는데 덕분에 살았네. 고마워.”
그녀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너도 그랬잖아. 이제 빚 갚은 셈이야.”
잠시 숨을 돌린 뒤, 나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바닥에는 이미 떨어진 지원자들이 군인들에게 끌려가고 있었고 누군가는 들것에 실려 나가고 있었다. 그 장면이 한동안 머릿속에 오래 맴돌았다. 먼저 사다리를 오른 사람들은 잠시 대기를 하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나도 땀에 젖은 머리와 옷을 말리며 한쪽에 앉았다. 팔과 다리가 아직도 떨렸지만, 마지막에 그녀가 손을 내밀어 준 순간이 계속 떠올랐다.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고 숨을 고르면서도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대부분은 지쳐 있었다. 팔뚝이 아픈 듯 주무르는 사람들과 눈을 감고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는 사람이 있었다. 서로 말을 건네기보다는 각자 다음 구간을 버틸 힘을 비축하는 듯했다. 방금 전까지 살벌했던 사다리 구간이 무색할 만큼, 이 짧은 휴식은 이상하게 평화롭게 느껴졌다. 잠시 후, 마지막 150번째 참가자가 정상에 도착했다. 드론의 알림과 함께 첫 번째 테스트가 종료되었다. 사람들은 안도한 듯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짧은 휴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군인들은 다음 장소로 사람들을 안내했다.
“첫 번째 테스트에 합격한 지원자들은 즉시 다음 스테이지로 이동한다. 지정된 구역 밖으로 이탈 시, 실격 처리된다.”
짧고 단호한 명령이었다. 사람들은 말없이 몸을 일으켜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군인들이 통로 양쪽에 서서 모두가 같은 속도로 이동하는지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발걸음에는 피로가 묻었지만 다음 테스트를 위해 조용히 이동했다. 어느 정도 걷자 눈앞에 있는 큰 문이 열리며 새로운 공간으로 이어졌다. 그곳에는 거대한 파크루 코스가 펼쳐져 있었다. 본래 파쿠르는 장애물이나 지형을 맨몸으로 효율적으로 넘나들며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신체 훈련법이다. 바닥에는 서로 높이가 다른 철제 박스와 파이프, 경사로가 이어져 있었다. 어떤 구간은 점프해야만 넘을 수 있었고 어떤 곳은 벽을 타고 달리거나 좁은 통로를 미끄러지듯 통과해야 했다. 정해진 길은 없었다. 오직 각자의 판단과 속도만이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곳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천장과 벽 곳곳에는 수십 대의 드론이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붉은 조명을 깜빡이며 코스 전역을 감시했다. 일부 드론은 공중을 떠다니며 불규칙한 궤도로 움직였고 어떤 드론은 벽면 가까이에서 탐지광선을 쏘며 지원자들의 움직임을 추적했다. 군인이 앞으로 나서서 룰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규칙은 간단하다. 100미터 앞의 목표 지점까지 먼저 도착한 상위 100명만이 오늘 테스트를 통과하며, 내일 있을 마지막 시험에 참가할 자격을 얻는다.”
군인은 주변을 천천히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 전 드론에게 잡히면 즉시 탈락이다. 그러니 움직임을 멈추지 마라. 주저하는 순간, 드론은 너희를 공격한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드론들의 붉은 조명이 천천히 깜빡이며 코스를 스캔했고 지원자들은 숨을 고른 채 언제 울릴지 모르는 신호를 기다렸다.
곧 큰 스크린에서 30초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3... 2... 1... 마지막 숫자가 꺼지자 출발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렸다. 동시에 여러 명이 일제히 달려 나갔다. 누군가는 철제 박스를 밟아 뛰어오르고, 누군가는 파이프를 타고 옆으로 이동했다. 점프하고 구르고 벽을 타며 여러 방법으로 수십 명의 몸이 동시에 움직이며 코스를 넘나들었다.
처음에는 무난한 진행이었지만 참가자들이 전체 거리의 약 3분의 1 지점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공기 중에서 윙 거리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드론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치 사냥감을 감지한 맹수처럼 드론들이 일제히 날개를 펼쳤다. 작고 민첩한 드론들은 벌떼처럼 흩어져 불규칙한 궤도로 날아다니며 전기 충격을 퍼부었다. 왼쪽에서 푸른빛 번개가 번쩍였다. 순간, 한 지원자가 전신이 경직된 채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드론 한 대가 곧바로 그에게 접근해 팔찌를 스캔하며 차갑고 무미건조한 기계음으로 말했다.
[탈락]
그 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쓰러진 지원자는 잠시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죽었는지, 정신을 잃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숨을 고른 나는 몸을 최대한 낮추고 드론들의 움직임을 예측하려 애썼다. 그러나 드론은 빠르고 불규칙하게 날아다녔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건 신음 소리와 지지직하는 무언가 타는 소리뿐. 머리카락이 스치듯 전기 섬광이 지나갈 때마다 정수리에서 타는 듯한 열기와 매캐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앞에서 한 지원자가 무모하게 전력 질주하다가 두 방향에서 동시에 날아온 드론을 피하지 못했다. 두 갈래의 푸른 전기가 그를 감싸며 발사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굴렀고 뒤따르던 다른 지원자들이 그의 몸을 뛰어넘으며 달렸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인간 방패처럼 붙잡아 세우기도 했다. 드론의 전격이 그 방패 삼은 지원자에게 명중했고 그는 그대로 쓰러졌다. 하지만 방패로 이용했던 사람은 미동도 없이 달려 나갔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이곳에서는 어떤 행위도 당연했다.
몇몇 사람들이 곧 목표 지점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나도 통과 지점에 가까워지던 그때, 드론 한 대가 갑자기 내 앞을 가로막았다. 푸른 전기가 충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날렸다. 전격이 내 바로 뒤에 있던 다른 사람을 향해 나아갔다. 전기공격에 맞고 스파크가 튀며 흰 연기가 피어올랐고 그는 쓰러졌다. 나는 그 힘없이 쓰러진 사람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더니 곧 움직임이 멈췄다.
다시 정신차리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바로 앞에 드론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드론의 눈이 나를 포착한 듯 붉게 깜빡였고 조준선이 내 가슴 한가운데를 따라 움직였다. 아직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상태였다. 이번만큼은 피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드론의 총구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번쩍이며 점점 커졌다. 나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끝이구나.’
하지만 예상과 달리 공격은 오지 않았다. 의아해하며 눈을 떠보니, 드론은 나를 향해 무기를 고정한 채 발사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마치 목표를 바꾼 듯 드론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다른 곳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나는 그 이상한 행동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표 지점에 다다른 순간, 나는 거의 몸을 던지듯 목표 지점을 통과했다.
차가운 흰색 바닥에 쓰러진 채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천장에는 여전히 수십 대의 드론이 다음 지원자를 향해 무심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이 믿기지 않을 만큼 선명하게 느껴졌다. 첫날의 테스트가 이렇게 끝났다. 그날 테스트에서 합격한 사람들은 모두 대기실로 이동했다. 두 번째 테스트는 내일 오전에 시작하며 그전까지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오늘 하루의 긴장감과 피로가 몰려왔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날카롭게 깨어 있었다.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곧 저녁 시간이 되었기에 안내를 받아 식당으로 향했다. 넓은 홀 안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길게 늘어선 배식대 앞에서 순서를 기다린 뒤, 쟁반을 받아 자리를 찾았다. 배고픔에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중, 옆자리에 누군가가 살짝 앉았다.
“안녕? 옆에 앉아도 되지?”
고개를 돌리니, 사다리 구간에서 서로 손을 내밀어 도움을 주고받았던 그녀였다. 순간 당황했지만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물론이지.”
그녀는 쟁반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며 자기소개를 했다.
“난 클레리아라고 해. 클레리아 홀로.”
“난 이든 카터야.”
“아까 고마웠어. 아니면 나 또 떨어질 뻔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마지막에 네가 잡아주지만 않았어도 나도 아래로 떨어졌을 거야.”
서로 웃으며 잠시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는 숟가락을 들기 전, 살짝 한숨을 쉬었다.
“이번이.. 벌써 열 번째야.”
“열 번째?”
“응. 성인이 되자마자 매년 지원을 해왔는데 계속 탈락했거든. 특히 오늘은 많이 위험했어. 그런데 네가 잡아줘서 이렇게라도 끝까지 와봤네.”
말끝에 묘한 웃음을 지었지만, 그 속에는 절실함이 묻어 있었다.
“그렇게까지 계속 도전하는 이유가 있어?”
클레리아는 잠시 나를 똑바로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 여기서 합격하면 죽을 걱정 하지도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잖아?”
클레리아는 잠시 웃었다가, 이내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나를 돌봐주던 삼촌이 있었거든. 그런데 공장에서 일하다가 기계에 손이 잘려버리는 사고가 났었지. 그때부터 제대로 일을 못 하게 되니 생계에도 지장이 생겼거든.”
그녀의 말을 들으며 그 삼촌이 얼마나 힘든 상황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 섀도우 시티에서는 대부분이 큰 걱정 없이 일하고 먹고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몸이 온전한 사람들에 한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한 번 다치면 끝이었다. 치료비는 감당할 수 없고 일자리는 몸이 정상인 사람들만 찾았다. 몸이 회복되지 않으면 제대로 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도시는 그런 사람들을 돕지 않는다. 그곳에서 인간의 가치는 일을 할 수 있는가, 그 한 가지로 결정된다. 몸이 고장 나면 물건처럼 버려지고 그 빈자리는 곧 다른 누군가로 채워진다. 도시는 사람 하나쯤 사라지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걸 몇 년 동안 봤어. 점점 말라가고, 결국 아무도 돌보지 않게 된 모습까지. 그리고 내가 독립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않아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클레리아는 잠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 생각했어. 이런 곳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겠구나 하고.”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너는 왜 이렇게까지 지원하는 거야?”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사실... 내 어머니도 내가 어릴 때 병으로 돌아가셨거든. 그때부터 계속 생각했어. 나도 언젠가 그런 병에 걸리면 어떻게 될까, 그때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고.”
내 목소리는 스스로도 모르게 낮아졌다. 말을 꺼내는 순간, 그때의 기억들이 다시 떠올라 가슴이 묵직해졌다.
그때, 식판을 들고 있던 한 남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여기 앉아도 돼?”
클레리아가 앉아도 된다고 말하자 그는 의자를 빼며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난 제임스라고 해. 제임스 플레티노”
“난 이든 카터, 여긴 클레리아 홀로.”
서로 소개를 하고 나서 제임스가 말을 이어갔다.
“아까 사다리 구간에서 서로 도와주는 거 봤어. 꽤 멋있더라.”
그의 시선이 잠깐 나를 스쳤다.
“솔직히 여기서 그렇게 움직이는 사람들 별로 없거든. 다들 자기 살아남기 바빠서 말이야.”
나는 피식 웃었다.
“살아남으려면 때론 옆 사람도 끌어올려야지.”
제임스는 젓가락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말처럼 쉽진 않지. 나도 그 구간에서 앞사람이 떨어지는 거 몇 번 봤거든. 그런데 너희는 서로 손을 뻗더라. 보기 좋았어.”
클레리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서로 돕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야.”
제임스는 흥미롭다는 듯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흥미롭네. 보통 이런 분위기는 오래 안 가는데.. 너희 둘은 좀 다를지도 모르겠어.”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제임스, 너는 왜 여기에 지원한 거야?”
그는 잠시 나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그냥 샤이닝 시티에 가보고 싶어서?”
“ 게 전부야?”내가 되물었다.
제임스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응. 나도 좀 멋지게 살아보고 싶거든. 이런 칙칙한 도시 말고 빛나는 곳에서 한 번쯤은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었어.”
제임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뭐, 큰 기대는 안 해. 합격하면 좋은 거고 아니면 그냥 섀도우 시티에서 계속 사는 거지 뭐.”
그의 말은 가벼웠지만 어딘가 씁쓸했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진심으로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기대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으니까. 섀도우 시티의 사람들은 그렇게 산다. 희망 대신 체념으로 하루를 버티고 그걸 현실이라 부르며 스스로를 달랜다. 제임스의 웃음 속엔 그 모든 게 담겨 있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제임스, 너는 이 테스트가 몇 번째야?”
나는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나? 오늘이 처음인데?”
제임스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옆에 있던 클레리아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쳐다보았다.
“처음이라고?”
“응. 다들 몇 번씩 도전했다길래 긴장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생각보다 별거 없네.”
나는 열 번이나 참가자격을 받지도 못했고 그나마 나온 테스트도 전부 얼마 못가 떨어졌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파쿠르 구간을 통과했는데 제임스는 첫 도전에서 이렇게 쉽게 통과했다는 게 놀라우면서도 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테스트는 이런 사람들이 통과하는 걸까. 겁이 없고 망설이지 않는 사람. 두려움이나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세상. 그런 사람들만이 끝까지 살아남는 걸까. 그때 식당의 안내 방송이 다음날에 있을 두 번째 테스트 일정을 알렸다. 제임스는 식판 위의 음식을 툭 치며 말했다.
“내일도 운 좋게 같은 조면 좋겠다. 그럼 또 재밌는 장면을 볼 수 있을지도.”
우리는 그렇게 식판 위의 음식이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잠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각자의 이유와 여기까지 오기까지의 이야기들. 그리고 내일이면 다시 시험이 시작된다는 사실이 그들의 대화 속에 묘한 긴장감을 더하고 있었다.
다음 날, 두 번째 테스트는 모의 작전 훈련이었다. 지원자들은 5명씩 소규모 팀으로 나뉘어, 가상의 범죄자 추적 시뮬레이션에 투입됐다. 시험장에 들어서자, 눈앞에는 복잡한 도시 미로 같은 구조물이 펼쳐졌다. 좁은 골목, 계단, 허름한 창고, 이동식 컨테이너. 그리고 곳곳에 드론이 떠다니며 시험을 감시했다. 규칙은 간단했다. 제한 시간 안에 가상의 목표물을 전부 잡아야 한다. 그들에게 맞아 전투 불가 상태가 되면 즉시 탈락. 제한 시간 초과 시, 팀 전원 탈락. 가상의 목표물은 총알 대신 전기탄이 발사돼, 맞으면 전신이 경직되고 그대로 쓰러졌다. 몇 초 이상 움직이지 못하면 드론이 와서 스캔 후 탈락 판정을 내린다.
“시작!”
사방에서 사이렌이 울리고 붉은 조명이 번쩍였다. 우리 팀은 곧장 몸을 낮추고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가상의 적들은 생각보다 영리했다. 골목 위쪽의 가짜 발코니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어 전기탄을 발사했다.
“조심해!”
빠르게 몸을 굽히며 옆으로 구르자, 파란 전기 스파크가 바로 코을 스쳤다. 벽에 닿은 전기탄이 지직 소리를 내며 불꽃을 튀겼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고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나는 직감적으로 방향을 틀어 좁은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랐다. 위에서는 목표물이 도망치고 있었고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뒤를 따라온 팀원이 한 명 있었지만 순간, 반대편 통로에서 날아온 전기탄에 맞고 경직되었다.
“으악!”
한 소년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곧바로 드론이 날아와 그를 스캔했다. 빨간 불빛이 깜박이며 차갑게 말했다.
[탈락]
나는 멈추지 않았다. 쓰러진 팀원을 부축했다가는 다음은 나였다. 골목을 빠져나가자 교차로 같은 넓은 공간이 나왔다. 여러 갈래의 길, 컨테이너, 철제 계단이 복잡하게 얽힌 구조였다. 가상의 목표물 셋이 포위하듯 사방에서 총을 쏘았다. 나는 숨을 고르고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며 바닥에 몸을 붙이듯 미끄러지며 전기탄을 회피했다. 우리 팀원이 목표물을 몰아세우자, 나는 뒤로 돌아가 가까스로 목표물의 어깨에 전기탄을 명중시켰다.
[타깃 처리 완료]
붉은 조명이 꺼지고 시험장의 안내음성이 차갑게 울렸다.
[통과]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팀중에 테스트에 통과한 자는 나를 포함해 3명뿐이었다. 쓰러진 두 명은 이미 사라지고 드론만이 공중에서 무표정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의 휴식이 지나고 드디어 마지막 테스트 단계가 시작되었다. 이번 마지막은 모든 조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전부 모였다. 이제 남은 사람은 겨우 단 50명. 다행히 그 사이에는 클레리아와 제임스도 있었다. 모두 지친 얼굴이었지만 누구 하나 포기하려는 눈빛은 없었다.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다시 이동했다. 도착한 방 안에는 거대한 벽들과 단 하나의 입구가 보이는 구역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미로처럼 얽혀 있을 것 같았다.
한 군인이 앞으로 나서서 단호한 목소리로 룰을 설명했다.
“지금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이번 테스트는 미로 구간이다. 룰은 단순하다. 먼저 출구를 찾아 통과한 10명만이 보안 본부 테스트에서 최종 합격한다.”
이번에도 큰 스크린에서 30초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다. 3... 2... 1... 시작과 동시에 지원자들은 달려 나가며 미로의 입구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긴장을 늦출 틈이 없었다. 갈림길 앞에서 잠시 멈춰 선 한 참가자가 방향을 고르려 하자 발밑의 바닥이 갑자기 꺼지며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비명 소리가 메아리쳤고 바닥은 곧 다시 닫혔다.
어떤 벽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벽은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빠르게 서로 맞물렸고 그렇게 통로가 열리거나 닫히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한 참가자가 열린 길을 따라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앞쪽 벽이 빠른 속도로 닫히기 시작했다.
“어! 위험해!”
뒤에서 누군가가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앞서 나가던 지원자가 놀란 눈으로 옆을 바라봤다. 그 순간, 양쪽 벽이 빠른 속도로 그를 향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피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벽이 맞부딪히며 묵직한 충돌음과 함께 붉은 자국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뒤쪽에 있던 사람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짧은 정적이 흘렀지만 곧이어 다시 발소리가 이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출구를 향해 달려 나갔다. 이곳에서는 멈추는 순간 합격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나도 여러 커브로 이어진 통로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런데 순간 앞에 출구로 보이는 곳이 보였지만 다시 벽이 생기며 가려버렸다. 그래도 대략적인 출구위치를 확인했기에 그 방향 쪽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나는 주위를 돌아보며 클레리아와 제임스를 찾아 나섰다.
“클레리아! 제임스!”
그녀가 내 목소리르 듣고 달려왔다. 그 뒤로 제임스도 따라붙었다.
“출구는 저 방향이야! 아까 벽이 사라지기 전에 있는 걸 봤어!”
나는 대략적인 위치를 손짓하며 말했다.
“좋아, 저쪽 방향으로 어서 움직이자!”
제임스가 외치며 먼저 달려 나갔다. 클레리아와 나는 바로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우리 앞쪽의 벽이 갑자기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이 바뀌고 있었다.
“이쪽이 아니야! 오른쪽으로 돌아!”
제임스가 소리치며 방향을 틀었다.
벽들이 서로 맞물리며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초반보다 훨씬 자주 그리고 불규칙하게 변했다. 닫혀가는 벽을 사이로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몸을 던져 그 좁은 틈을 통과했다. 숨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앞쪽에 아까 보였던 출구가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벽이 다시 생성되며 또다시 길을 막아섰다.
그때 클레리아가 천장 쪽의 큰 스크린 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출구를 찾아서 통과한 사람들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4/10]
전광판에 숫자가 번쩍였다. 벌써 네 명이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남은 자리는 6개. 시간이 우리 모두를 쫓고 있었다. 그때 바로 뒤쪽부터 벽이 움직이면서 차례로 통로를 닫기 시작했다. 마치 한 번 갇히면 다시는 못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서둘러 달려 나갔다. 눈앞에 두 갈래의 길이 나타났지만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틀어 왼쪽 통로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몇 걸음도 가지 않아 벽이 끝나버렸다. 막다른 길이었다.
우리는 몸을 돌려서 왔던 길을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막혀 있던 벽이 갈라지며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를 통과시켜주려고 열리는 느낌이었다. 저 멀리서 틈 사이로 한 줄기 빛이 스며들었다.
“잠깐, 저기 봐!”
저 멀리 희미한 출구의 불빛이 보였다. 그 빛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우리는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마지막 통로로 보이는 곳을 통과하며 드디어 끝이 가까워졌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뒤쪽에서 벽들이 빠른 속도로 닫히기 시작했다.
“빨리! 더 빨리!”
클레리아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쿵! 쿵! 쿵!
벽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바닥이 흔들리고 공기가 진동했다. 조금만 늦으면 우리도 그 안에 갇히게 된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출구의 빛이 점점 커졌다. 나는 온몸의 힘을 짜내 마지막 속도로 달렸다. 내 앞에 클레리아, 그리고 그보다 조금 앞에 제임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조금만 더. 이제 정말 조금만 더. 거의 출구 통과하려는 그 순간, 내 앞에 있던 바닥에서 갑자기 공간이 열리며 갈라졌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내가 빠진 구멍 밖의 밝은 빛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치며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그리고 짙은 어둠이 내 시야를 한순간에 가려버렸다.
“윙...”
미세한 기계작동음 소리가 들린다.. 드론인가.. 나를 스캔하는 것 같다.
[신원 확인, 이든 맥스웰, 샤이닝 시티 보안본부 본부장. 생존 가능성 제로. 1급 기억 백업 대상. 백업 시작]
‘이든.. 맥스웰? 내 이름은 이든 카터인데...’
그리고 내 정신은 어둠 속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