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자리

3막

by 광수

3-1.

저녁 식탁.

밥공기에는 반쯤 식은 밥이 남아 있고, 찌개는 김이 다 빠져 미지근하다. 벽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그는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가볍지만 단호한 소리.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마치 평범한 일상을 끊어내듯 말한다.


“… 우리, 이혼하자.”


순간, 공기가 얼어붙는다.

아내는 젓가락을 쥔 채 멈춰 있고, 젓가락 끝에서 미역 한 줄기가 덜렁 매달려 있다.

얼굴 근육이 순간적으로 풀리더니, 곧 낯선 긴장으로 다시 굳는다.


“…뭐라고?”

아내의 목소리가 흔들렸지만, 눈빛은 곧 빠르게 가라앉는다.

계산기를 두드리듯 차분하고 건조하게 이어간다.

“집은 내가 가져갈 거야. 대출은 네 몫이야. 예금 절반, 퇴직연금도 나눠야지.”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숟가락을 가지런히 놓고,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아내는 잠시 말을 멈춘다. 침묵이 길게 늘어진다.

그 틈에서 표정이 무너진다.

눈두덩이 떨리고, 입술이 순간 굳지 못해 덜컥 내려앉는다.

그러나 이내 이를 꽉 깨물고, 눈을 치켜올린다.


“…애들은 내가 데려갈 거야.”


그 말 뒤로 짧은 정적.

아이들의 젓가락이 덜컥 떨어진다.

딸아이는 그릇 속을 뚫어져라 보고, 아들은 아빠를 한번 훔쳐본다.


식탁 위에는 김 빠진 찌개, 차가운 밥, 그리고 미처 먹다 만 반찬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누구도 다시 손을 대지 않는다.


3-2.

안방에서부터 옷장 문짝이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금속 걸쇠가 덜컥대고, 옷들이 끌려 나오는 소리가 벽을 따라 번진다.

아내는 말없이 옷을 꺼내다 가방 속에 마구 구겨 넣는다. 옷감이 씹히고, 지퍼가 억지로 잠기며 거친 금속음이 난다.


아이들은 방 문 앞에 서 있다.

아들은 두 손을 배 위에 모아 쥐고, 어깨가 미세하게 떨린다.

딸은 캐리어 손잡이를 잡은 채, 발끝으로만 바닥을 문지른다.


“집은… 당장은 네 명의니까 얹혀사는 꼴은 못 해. 아이들이랑 친정에 있을 거야. 하지만 이혼 후엔 이 집은 내 거야.”


말끝마다 확정적이다. 숨 한 번 고르지 않는다.


아들은 용기를 내서 묻는다.

“…엄마, 꼭 지금 가야 돼?”


아내의 손동작은 멈추지 않는다. 아이 쪽을 보지도 않고, 대신 아들의 책가방을 꺼내 벽 쪽에 툭 던져 놓는다.

딸의 눈에서는 눈물이 맺히지만, 아내는 고개를 젖히며 말한다.

“울지 마. 이제부터는 네가 강해져야 해.”


그러나 목소리는 흔들리고, 마지막 단어는 거의 속삭임에 가깝다.


현관 앞.

아내는 신발을 급히 꿰어 넣는다. 발끝이 자꾸 걸려 잘 들어가지 않는다. 한참을 밀어 넣다 결국 손으로 신발 뒷굽을 잡아당겨 억지로 발을 넣는다. 동작은 급하지만, 그만큼 초조하다.


아이들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아들은 흐느끼며 그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 말한다.

“…아빠, 뭐라도 말해…”


그러나 그는 소파에 앉아 있다. 등을 깊게 묻고, 손은 무릎 위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눈빛은 아내도, 아이들도 향하지 않는다.

그 침묵은 방 안을 메운다. 말보다도 무겁다.


아내는 문을 열며 아이들의 손을 붙잡는다. 아이들은 울면서도 붙잡힌 손을 뿌리치지 못한다. 결국 함께 복도로 나선다.


쿵.

현관문이 닫히자, 그 진동이 벽을 타고 집 안을 울린다.


복도 끝으로 아이들의 흐느낌이 멀어져 간다.


거실은 적막하다.

식탁 위, 식지 않은 찌개에서 김이 얇게 피어오른다.

그는 그 자리에 앉아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침묵만이 방을 채운다.


3-3.


며칠 전, 아들은 운동장 구석 벤치에 앉아 있었다. 친구들이 대회 유니폼을 받아 들고 서로 어깨를 치며 웃고 떠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코치가 명단을 들여다보며 짧게 말했을 때, 그는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참가비가 안 들어와서 네 이름은 빠졌다.”

가방끈을 쥔 손이 저릿할 정도로 힘이 들어갔지만, 항의할 수는 없었다. 그날 밤, 천장을 바라보며 한참을 누워 있던 그는 속으로만 되뇌었다.

“이건 공정하지 않아. 난 그냥 하고 싶었던 건데.”


딸의 기억도 남아 있었다. 미술 학원에서 새 종이를 받았을 때, 손에 쥐어진 건 유난히 색이 뭉치고 번지는 값싼 크레파스였다. 옆자리에 앉은 아이들이 힐끔거리고 웃는 기척이 느껴졌다. 붓을 잡은 손이 자꾸 흔들렸고, 그림은 엉망으로 번졌다. 학원에서 집까지 오는 길,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현관문을 닫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겨우 내뱉은 말은 짧았다.

“왜 나만 이래…”

문 밖에서 들려온 엄마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응석 부리지 마.”

그 말이 더 깊숙이 박혔다.


그리고 오늘, 현관문이 열리자 아들이 가방을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신발을 벗는 동작은 급했지만 표정만큼은 단단했다.

“엄마 규칙은 공정하지 않아. 난 아빠 집에서 살래.”

말끝이 떨리진 않았지만, 오랫동안 준비한 문장처럼 또렷했다.


잠시 뒤, 딸도 캐리어를 끌고 들어왔다. 바퀴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집 안에 울렸다. 그녀는 문턱에 멈춰 서서 시선을 한 번 떨군 뒤,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빠 집은 조용해서 좋아. 나도 같이 있으면 안 돼?”

그 말에는 투정도 변명도 없었다. 단지 지쳐서 기댈 곳을 찾는 아이의 목소리였다.


그날 저녁, 좁은 주방 식탁 위에는 컵라면 세 개가 올려졌다. 뜨거운 김이 천천히 퍼지자 아이들이 젓가락을 들며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오래간만에 들리는 웃음소리에 아빠는 잠시 젓가락을 멈췄다. 허술한 식사였지만, 둘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집 안은 오랜만에 따뜻해졌다.

작가의 이전글말해지지 않은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