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특별 기획 단편>

산타는 내 아픈 기억을 훔쳐 (상)

by 윤설

산타, 이 망할 도둑놈 새끼! 올해 처음 알았다. 산타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렸을 때 알던 산타랑 뭔가 다르다.

선물을 주고 가기는커녕 반대로 내가 갖고 있던 걸 깔끔하게 훔쳐 갔다.


비단 크리스마스여서가 아니라 올해 12월 25일은 그 아침이 여느 때보다 유달리 상쾌했다. 밤새 지독한 열병을 앓다가 다음날 눈을 뜨니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과 같은, 그런 개운함이 있었다.


소주 세 병, 맥주 두 병, 위스키 반 병... 내 잠자리 옆에 늘어져 있던 간밤의 전리품들을 바라보았다. 찰나지간에 다시 취한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런데 실제 몸 상태는 꼭 몇 달이고 금주라도 한 것마냥 홀가분했다.


술병과 안주 접시를 치우고 커피를 내리는데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술 좀 마셔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게 말이 안 된다. 간밤의 기억이 흐릿하다 못해 아예 통편집된 걸 보아 필름은 제대로 날아갔다. 아무리 블랙아웃이 만성이라도 그 지독한 마법을 겪고 이렇게 실실거리며 하루를 시작할 수는 없다.


아마도 내가 틀림없이 일삼았으리라 추정되는 지난밤의 폭거를 규명하고자 휴대전화를 켰다. 문자 내역은 어제 저녁 편의점 카드 결제 내역이 가장 최신이었다. 문제없다. 다음은 전화인데... 22시 30분에 자주 연락하고 지내던 친구 놈과의 통화가 한 건, 그리고 그 뒤로 모르는 번호를 수신한 통화가 한 건 있었다.


"025-1224-1225."


25년 12월 24일에서 25일이라... 컨셉이라면 진짜 답도 없다. 이 시시한 컨셉의 번호를 눌러 통화 시간을 살폈다. 놀라웠다. 통화 시간이 2시간 36분이었다.


발신 버튼을 눌렀다. 지금 거신 전화가 없는 번호라면 나는 내 금융 어플부터 싹 다 뒤집어 털어야 했다.


"지금은 영업시간이 종료되었사오니 다음에 다시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영업시간은 12월 31일 22시 30분부터입니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빨래집게를 들어 내 머리를 힘차게 갈겼다.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제대로 후렸다. 요즘 세상에 저런 말도 안 되는 전화 멘트가 어디에 있는가? 꿈이 아니고서야 이 상황을 정확히 설명할 근거가 없었다.


"아아아아 씁!!"


강한 고뇌가 엄습했다. 이 백일몽 같은 상황을 믿어야 하나, 아니면 이 악몽 같은 통증을 믿어야 하나? 슬프지는 않았다. 단지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동시에 타격 부위를 진동시키는 아릿한 통증이 현실을 끝없이 말해주고 있었다.


급히 간편 송금 어플을 실행해 연동돼 있는 내 계좌 전체를 훑었다. 돈이 없었다. 당연하다. 엊그제 실직하고 지금은 실업급여를 기다리는 입장이니 통장이 빵빵할 턱이 있나.


그래도 모아둔 돈이 제법 있어서 연말 나기에는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 돈들은 멀쩡히 들어 있었다. 고로 내 의지와 무관하게 자금이 빠져나간 것은 아니었다. 그럼 저 2시간 36분짜리 통화는 다 뭐란 말인가?


인터넷 검색부터 AI 조르기까지, 저 번호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하지만, 그 어떤 포털 사이트 검색에도 저 시시껄렁한 번호의 근원지는 잡히지 않았고, AI는 '정말 창의적인 번호군요.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준비하기 위한 최적의 번호에요.'와 같은 답변으로 내 답답한 가슴속에 난로를 틀었다.


결국 번호 찾기를 포기한 나는 금전 손실 외에 또 내가 입은 피해가 없는지 점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리 뭐가 더 있겠는가? 불과 몇 시간 전 새벽에 받은 전화, 잠에서 깬 다음날은 공휴일, 집안에 외부인 침입 흔적 없음... 모든 정황이 내 인생의 무탈함을 보장하고 있었다. 별 소득 없이 나는 밤 22시 30분으로 찍혀 있는 친구와의 통화 내역을 찾아 발신 버튼을 눌렀다.


"웬일로 먼저 전화를 다 하냐? 정신 좀 차렸어? 너 진짜 그렇게 살면 안 돼 인마!"


'아, 문제가 여기에 있었구나. 그렇게 산다는 건 아마 저 술병들을 말하는 거겠지? 아니다, 뭐가 더 있나?'


전화를 받자마자 목이 갈라져라 소리부터 지르는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별 생각을 다 했다.


"어, 미안한데, 내가 기억이 잘 안 나거든. 일어나서 보니까 제법 많이 마셨더라고."


"어련하겠냐? 그래도 이제 울 만큼 울었다. 새해를 맞아서 정신을 차려야 된다느니 하는 잔소리는 안 하겠지만, 슬슬 사람 구실은 좀 해야 하지 않겠어?"


내가 술이 들어가면 개가 되던가? 그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사람 구실이라는 갑작스러운 단어가 내 메타인지를 비틀었다.


"야, 어제 내가 전화로 뭐 심한 말이라도 했냐?"


"아이고 그럴 리가요. 언제나랑 또오옥같으셨지요. 차라리 심한 말이라도 나올 정도로 예전 독기가 살아났으면 싶었습니다 그려. 새 일자리 소개해준다고 해도 묵묵부답, 여자 소개해준다고 해도 묵언수행..."


이상하다. 여자는 몰라도 일자리 소개에는 혹했을 텐데? 술이 꽤 들어가서 그냥 만사가 다 귀찮았나?


"일자리? 야, 뭐냐 그거? 우리 좀 진지한 마인드로 다시 이야기해 보지 않으련?"


친구가 해주는 일자리 소개가 늘 그렇듯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대충 던졌다. 그런데 놈의 반응이 예상 이상이었다.


"뭐? 진짜 이제 뭐라도 해보게?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나! 준비해서 한 시까지 나와라."


누가 들으면 자기가 로또에 당첨된 줄 알 것이다. 전화 너머 친구의 목소리에 그 정도 활기가 있었다. 적당히 친하게 지내는 사이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애틋하게 챙길 사이였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괜히 찡한 마음도 있었다.


최대한 정성 들여 씻고 옷도 신경 써서 입었다. 일을 소개해준다고 했지만, 혹시 그 일에 관련된 사람을 같이 만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괜히 집 밖으로 나가는 걸음이 설레었다. 외출이 즐겁다니, 나이 서른 넘고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낯선 기분이었다.


"너 이 자식, 이제 웃는구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친구에게 들은 첫마디가 이것이었다. 그럼 내가 언제는 죽상이었단 말인가?


"그래. 다 흘려보내고 다시 새 인생 살아. 겨울 가면 봄 오는데 뭐."


스스로 자작곡 만들기가 취미라며 떠들고 다니는 인간답게 친구 놈의 멘트는 한 번씩 오글거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렇다 해도 내가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던가?


"일 얘기나 하지 안 실장."


친구의 뜻 모를 호들갑을 태연하게 받으며 나는 카페 의자에 코트를 걸쳤다. 그 사이 놈은 실실 웃으며 서류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얹었다.


"어제 얘기했다만, 어차피 기억도 잘 안 날 테니까 처음처럼 다시 설명한다. 이번에 신규 상장한 곳인데, 1월부터 바로 시작할 새 프로젝트의 압박이 좀 센가 봐. 경력직이 한 명만 더 있었으면 하더라고. 너 전에 다니던 엔코어처럼 그렇게 꽉 막힌 분위기도 아니고 오히려 지금 니가 들어가면 긴급 수혈이나 다름없어. 엔코어 때처럼 더러운 취급은 안 받는다니까. 몇 군데에 더 찔러서 경력직 좀 빼온다길래 당장 홀드하라고 했다."


자기가 무슨 대단한 입김이 있다고 홀드 하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류상으로 보이는 회사의 이미지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당장은 좀 힘들겠지. 일도 많을 거고, 연초부터 바쁘긴 할 거야. 그래도 전에 니가 엔코어에서 당했던 걸 생각해 봐. 오히려 젊은 회사에서 일찍부터 인정받는 게 다시 그 꼴 안 당할 기회 아니겠냐?"


엔코어 머티리얼즈, 근래에 내가 실직한 회사였다. 대한민국 회사원의 실직사가 어디 그리 유쾌하겠냐마는 현재의 나에게 생각보다 큰 감흥이 없었다. 그 회사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지옥 같았는가 하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잘 그만뒀지 하는 안도감이 더 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아플 만큼 아팠던 모양이었다.


다음날에 바로 이력서를 넣어 보기로 하고 친구 놈과 헤어졌다. 백화점 식당가에서 내려와 천천히 정문을 향해 걷는데, 말이 백화점이지 예전만큼 사람이 그리 북적이지 않았다. 연말에다 성탄절이니 평소보다는 사람이 몰리는 편이었으나 그럼에도 조금 휑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백화점 정문 앞 크리스마스트리를 옆에 끼고 멈춰 섰다. 버스 도착 시간을 확인하려고 휴대전화를 켰는데 아까 헤어진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야, 더 중요한 걸 얘기 안 했다. 정신 좀 차린 거 같으니까 사진 하나 보낼게. 보고 나서 다시 전화해라."


받은 지 5초 안에 끊어진 전화 화면 위로 카카오톡 표시가 떴다. 메시지에 첨부된 사진을 눌러보았다. 조금 성숙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의 여성이 파리의 에펠탑을 등 뒤에 두고 웃으며 서 있었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캡처한 모양이었다.


"괜찮지 않냐? 분위기랑 다르게 제법 활달한 편이야. 인영이 친구인데 나도 한 번 얼굴 본 적 있거든. 애가 나쁘지 않아."


그러니까 자기 여자친구의 친구를 나한테 소개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연말 실직자한테 여자가 가당키나 하냐? 됐다. 천천히 만날란다."


당장 입사 지원할 회사의 서류 봉투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심란함은 한결같았다. 다시 사회인 구실을 하게 된 뒤에야 다음 스텝을 생각할 요량이었다.


"내가 저 친구한테는 니 사진 안 보여 줬겠냐? 너만 생각 있으면 만나 보겠다던데?"


남심이란 참 단순한 것이다. 상대 쪽에서 관심을 보인다 하니 괜히 무심하던 가슴도 거짓말처럼 맥동하기 시작했다.


"그럼 뭐, 나도 얼굴이나 한번 볼까?"


전화를 끊고 내 옆에서 빛나고 있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돌아보았다. 아주 잠시, 전에 만났던 여자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헤어진 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그 모습이 희미했다. 쿨하게 헤어진 건 아니고, 오히려 아프게 이별했음에도 그저 무덤덤했다. 올해의 크리스마스에는 그랬다.


'메리 크리스마스!'


들뜬 마음으로 트리를 뒤로 하고 걸었다. 손잡고 단란하게 백화점을 구경하는 부모와 아이들, 그 위로 캐럴이 흘렀다.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 주신대!"


다가오는 기쁨은 선명하고 분명 존재했을 슬픔은 희미했던 그날, 나는 알아야 했다.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나에게 선물을 주지 않고, 오히려 내 아픈 기억을 거두어 갔음을. 아니, 도리어 망각이라는 선물을 준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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