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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Sep 27. 2018

[영화] 죄 많은 소녀 : After my death

오랜만의 영화 리뷰


여러 날이 지난 뒤에야 겨우 이 영화의 감상을 쓴다. 폭력과 자해의 비린내를 되새길 때에는 어금니를 꽉 깨물어야 했지만, 그래도 마주해야 했다. 낮이건 밤이건 적요가 찾아올 때 나는 엉금엉금 이 영화로 기어갔다. 영화는 나의 가학적인 취향을 자극함과 동시에 피학적인 기억을 끄집어내었다. 작은 영화관에서 나는 질식할 것만 같았고 영화를 복기할 때에는 수년도 더 된 퀴퀴한 기억이 함께 고개를 들이밀었지만 생각을 그만둘 수 없었다. 꼭 생각해야 했고 반드시 기록해야 했다. 여느 영화처럼 감상을 무심히 흘려보내기에는 이 영화가 내게 가한 ‘사유의 폭력’이 컸다.

나는 해묵은 상념에 잠긴다.


영화는 보통의 저예산 영화들처럼 시작한다. 주류 영화관에서 상영되지 못하는 저예산 독립 영화들은 으레 소거된 사운드, 불규칙하게 이어 붙인 씬, 개연성 있는 설명을 제거한 채 관객들의 상상력에 기대는 불친절한 플롯 등을 특징으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고 없이 마주해야 한다.
불온하게 스크린을 잠식하던 무 소란의 씬들이 맞는 조용한 파국을


갑자기 경민이가 사라진다.
나에게 키스를 하고서는





1. 무지의 죄

가칠한 얼굴의 여자애가 무어라 손짓한다. 뜻 모를 손짓이 허공에 흩어지고 머뭇한 박수소리만이 그에 화답하듯 이어진다.


영화는 제일 먼저 ‘무지의 죄’에 대해 토로한다. 무지의 죄란 무엇인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행위자가 자기의 행동에 본질적이고 특정한 행위 요소를 알 수 있었고 고려했어야만 했으나 이에 필요한 앎을 얻으려고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 따라서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는 이런 무지는 죄’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무지의 죄단순히 '알지 못함'에 그치지 않는다. 알 수 있었음에도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무지의 죄는 '태만'을 뜻한다.


딸아이가 없어졌어도 동기나 상황을 전혀 모른 채 창백해진 얼굴로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기만 하는 부모, 매너리즘에 빠져 형식적인 수사와 의례적인 대질심문을 이어가는 경찰, 그저 책임을 면피할 수 있는 그럴듯한 이유를 찾고 대외적인 이미지 걱정하기에 급급한 학교, 몰이해 그 자체를 상징하는 학교 친구들


그러나 정작 행위의 주체는 자신의 죄를 인식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다. 따라서 모든 주체는 하나의 개체, ‘영희’에게 모든 죄를 강요하기 시작한다. 진술과 증거, 종합적인 정황에 의하면 영희는 그날 경민이 죽기 직전까지 함께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살을 종용하는 언행을 내뱉었다. 생사를 구경거리로 내몰고 경민의 불안정한 심리를 알면서도 극단의 선택을 방조했다. 영희는 경민의 모에게 멱살을 휘둘려 잡히고, 경찰에게는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받는다. 반 친구들의 반응 역시 냉랭하다.


영희는 약자 특유의 예민함으로 알아차리고 만다. 자신에게 주어진 죄의 굴레를

벗을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굴레의 중력과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까지도




2. 폭력의 총량


더 쓰고 있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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