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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가 Jul 24. 2020

장례식장에 다녀왔어요.

내 나이 사십하고도 하나.

함께 일하는 개발부장님의 부친상으로 퇴근 후 장례식장에 다녀왔어요. 하필이면 오늘 아침 '남자라면 핑크지'라며 핑크색 티셔츠를 주워 입고 출근했는데... 비가 참 많이도 오더군요. 회사에서 장례식장까지 1시간 반이나 걸렸어요.


사무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개발자. 늘 어느 기업체를 가던 제가 나이가 제일 많아 맏형처럼 생활했는데,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는 저보다 나이 많은 형님 개발자들이 많아서 좋아요. 의지하는 한편 "나도 저들 나이 때까지 실무에 남아 있을 수 있겠지"라는 작은 희망을 품게 해 줘요. 실제로 그런 개발자들을 종종 온라인에서 만나며 개발자로의 전향. 준비와 시도를 했었거든요. 결국 디자인이 좋아 중간중간 찾아왔던 관리직 제안, 물질적 대우 보장을 모두 마다하고 삼류 디자이너로 살아가고 있지만요.


아무튼 장례식장 구석. 검게 주름진 상복 차림에 씨벌 게진 눈으로 우리를 반기던 개발부장님의 얼굴을 보니 그간의 부러움. 또는 시기와 질투. 늘 강하게만 보이던 그가 그저 사람으로 보였어요. 나와 같고 우리와도 같은 그저 한 사람.


자리가 자리인지라 한 방울도 못 먹는 소주를 한 잔 주고받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결국은 개발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를 보며 '이 사람 정말 뼛속까지 개발자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를 보내는 슬프고 힘든 자리. 그런 상황을 개발 이야기로 덮으며 잠시나마 잊으려, 버티려 하는 게 보이더군요. 평소에도 "개발자는 이래야 해" 또는 "개발은 이러이러한 거야"라며 각종 잔소리와 오지랖 비슷한걸 자주 하시던 분이라...


많이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죠. 제 나이 사십하나. 저 또한 늙은 디자이너 취급을 받으며, 혹은 그런 제 나이를 탓하며 현실을 도피해 일에 갇혀 지내거든요. 주로 디자이너 커뮤니티에서 말이죠. 제가 매 글마다 직접적으로 제 나이를 언급하지 않는 이상. 다들 제 나이는 모를 테니...


이런저런 글을 싸지르며 저도 같은 행위를 반복해요. "디자인은 이러이러해", "디자이너라면 이렇게 살아야지"라고 꼰대질을 해대고 있죠. 오지랖을 가장한 일종의 거드름이에요. 누군가는 그런 저를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는 것도 알고 있고, '뭣도 아닌 놈이 입 디자인만 겁나 하고 있네'라며 손가락질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요.


6살 제 아들이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요. 걱정이 참 많이 돼요. 제가 어릴 적 저 또한 그러했고, 주변에서 항상 그런 말들을 자주 했어요.


"얘야. 그림 그리면 가난하게 살아야 해."


몇십 년이 지났건만 아직까지도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아요. 미술, 디자인 전공자들이 한국땅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사는 경우의 수는 그리 많지 않거든요. 그걸 깨버리고 싶었어요. 적어도 나의 아이가 훗날 미술이나 디자인을 하고 싶다 말할 때. 그때의 한국은 돈 때문에 디자인이나 미술 일을 망설이게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어요. 그러려면 디자인의 가치 자체가 상승해야 하고, 각 분야 디자이너들의 가치 또한 함께 상승해야 한다고 믿고 있죠. 모두가 함께 나아져야 하고 각종 지식이나 노하우/스킬 공유도 함께 실행되어야 하고요. 


한국의 디자이너들. 뭔가를 잘 공유하지 않아요.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나의 디자인을 오픈하지 않아요. 소극적이죠.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꽤 많은 실무자들이 해외 디자이너의 칼럼이나 아티클을 살펴요. 영어를 못하는 저도 해외사이트에서 주로 정보를 얻죠.


한편으로는 그래요. 아니 어쩌면 매일 그런 생각을 갖고 사는지도 몰라요.


저는요. 이제 막 디자인을 시작하는 여러분들. 혹은 아직 실무에 남아있을 시간이 많은 분들. 마음만 먹으면 저따위는 비교도 안될 만큼 더 좋은 디자인과 다양한 지식. 스킬 등을 채울 수 있는 지금의 여러분들이 너무 부러워요. 그래서 각종 커뮤니티나 블로그에 이런저런 투정 글을 쓰고 있는지 몰라요. 더 나아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멍하니 있는 사람들이 답답하고 안타까워서요. 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저 지금보다 훨씬 더 잘할 자신 있거든요.


물론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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